# 14
캬우!
“됐어, 인마.”
김필도는 몸을 일으켰다.
츄악!
몸이 드러나자 전신에 새겨져 있는 문신이 드러났다.
문신은 과거와는 조금 달려져 있었다.
귀면이 새겨진 등과 용이 새겨진 가슴 쪽에는 약간의 공간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 공간도 사라지고 없었다. 얼마 되지 않았던 그 공간마저도 마법진으로 채워져 있었다. 귀면과 마법진 문신 그리고 용과 마법진 문신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며 근육의 움직임에 따라 모습이 변했다.
“나도 알아, 인마. 내 물건이 이거라는 걸.”
김필도는 엄지손가락을 세우며 빙긋 웃었다.
크!
“하지만 짐승에겐 절대 못 주니까 꿈도 꾸지 마.”
김필도는 얼른 아래를 감싸곤 밖으로 나갔다.
소지품이 있는 곳으로 간 그는 속옷을 입고, 방탄조끼를 걸쳤다. 그런 다음 로브를 걸쳤다.
츄악!
로브를 걸치고 도를 정리하고 있는데 오드가 나왔다.
“벌써 다 나은 거냐?”
김필도는 오드를 찬찬히 살폈다.
최소한 며칠은 요양을 해야 할 정도로 심한 부상이었다. 그런데 걷는 걸 보니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키이!
“다 나았나 보지? 그런데 그렇게 하고 다녀?”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깜박한 듯 김필도는 다시 말을 건넸다.
꼬리가 달렸고, 고양이 눈이고, 고양이 귀를 가졌지만 털이 나지 않았으니 몸은 인간과 비슷하다.
공연히 민망해서 하는 말이었다.
키!
“아니다, 내가 잘못 생각한 모양이다. 짐승이 옷을 입고 다니는 게 더 이상하지. 아무튼 앞으로는 잘 살피고 다녀! 덫 같은 거에 걸리지 말고. 잘 가.”
김필도는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걸음을 옮겼다.
오드는 멀어지는 김필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아아우!
그녀의 입이 쩍 벌어지고 송곳니가 드러났다. 그리고 그녀의 피부가 조금씩 변했다. 마치 검은 문신을 한 것처럼 가로로 줄무늬가 생겨났다.
이윽고 그녀의 전신에서 일어나던 변화가 멈췄다. 그녀는 마치 고양이 모습으로 보디페인팅을 한 것 같았다.
척!
오드는 상체를 숙이더니 양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그아아아우!
오드는 혀를 쑥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파앗!
그녀의 신형이 전방으로 폭사됐다. 나무가 앞을 가로막아도 그냥 타고 올라갔다. 그녀의 움직임은 치타보다 수십 배는 빨랐다.
순식간에 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간 오드는 좌우를 살폈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아래로 내려왔다.
중간 정도 내려온 그녀는 뻗은 가지를 디딤대 삼아 몸을 날렸다.
오드가 떠나고 2분 후.
공간이 열리는 듯하더니 붉은색과 검은색 로브를 걸친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로브를 걸친 자는 황금색 눈동자를 가졌고, 검은 로브를 걸친 자의 눈동자는 붉은색이다. 황금색과 붉은색 눈동자는, 신족과 마족에게서는 흔하게 보이지만 인간에게서는 흔히 볼 수 있는 눈동자 색이 아니었다.
“30년 동안 공을 들였는데…….”
황금색 눈동자 노인이 오드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모딕이란 이름의 이 사람은 마법사이면서 몬스터 사냥꾼으로 오드를 잡기 위해 덫을 놓은 장본인이었다.
“클클클! 일단 모습을 봤다는 게 어딘가?”
검은색 로브를 걸친 노인이 말했다.
그는 모딕의 동료인 디나인이었다. 디나인 역시 마법사였다.
“하이 오드에 대한 전설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확인한 걸로 만족하란 말인가?”
“수만 년 동안 전설로서 존재했던 종족 아닌가?”
디나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드(Odd).
언제부터 등장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몬스터의 왕이자,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몬스터가 하이 오드라는 전설이 끊임없이 회자됐다.
사실 검은 눈과 붉은 눈을 가진 오드는 간간이 발견되곤 한다. 그렇다고 그들을 하이 오드라고 하지도 않는다.
하늘색 눈과 초록색 눈을 가진 오드만 하이 오드라고 부른다.
잡았다는 사람은 물론이고 봤다는 사람조차 없는 몬스터.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유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욕망 때문이다. 하이 오드의 심장에 흐르는 피를 얻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전설이 이어져 내려왔으니 신족과 마족은 물론이고 모든 종족의 권력자들이 얻기를 원했다.
그런 엄청난 보물을 이곳에서 발견했다. 아니, 잡을 뻔했다.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더더욱 잡았어야지.”
“금세 찾을 수 있을 테니까 걱정 말게.”
“문 대륙이 얼마나 넓은지 알면서 그런 소릴 하는가?”
“그 계집이 갈 곳은 한 곳밖에 없네.”
“구해 준 그놈을 따라갈 거란 말인가?”
“내기를 하자면 난 따라갔다는 쪽에 걸겠네.”
디나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놈을 쫓아다니면 하이 오드를 잡을 수 있다는 결론이 되는 건가?”
“먼저 그놈이 누구인지 그것부터 알아야 할 것 아닌가?”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네.”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
들어 본 적이 있나 하는 얼굴로 모딕은 이름을 되뇌었다.
“6개월 전에 문 대륙으로 넘어온 자들의 우두머리네.”
“프리우스 대공이라고 했던 그 허수아비?”
모딕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아마 그놈을 따라갔을 거네.”
“그럴 가능성이 높겠구먼. 일단 그곳으로 가보세.”
디나인과 모딕은 서로를 보며 웃었다. 둘은 곧 마법을 펼쳐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제7장 연비 짱 SUV
“무슨 날씨가…….”
물을 마시기 위해 주전자를 들어 올렸던 김필도는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아공간에 있는 물통에 물을 따라 놓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그런데 바닥까지 꽁꽁 얼어 있었다.
“불을 피워야겠네.”
나무는 초저녁에 이미 모아 두었다. 혹시 기온이 더 떨어지면 불을 피울 생각으로.
그런데 로브가 워낙 따뜻하여 그냥 있었는데 차라도 한잔하려면 불을 피우는 수밖에 없을 듯했다.
불쏘시개를 안쪽에 놓고 잘게 쪼갠 장작을 위로 올렸다. 그러고는 파이어 볼 마법을 펼쳐 불을 피웠다.
그가 펼치는 파이어 볼 마법은 보통 마법사들이 펼치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
마법사들이 펼치는 파이어 볼은 초보라고 불리는 3클래스 마법사라 할지라도 크기는 사람 머리 정도다. 그런데 김필도가 펼치는 파이어 볼은 밤톨 크기, 말 그대로 불씨 수준이었다.
“완전 불티나 라이터네.”
하지만 말과는 달리 금세 불길이 활활 오르자 김필도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그는 아공간을 열어 삼각대를 꺼냈다.
접을 수 있게 돼 있는 삼각대에는 손잡이가 달린 냄비 따위를 걸 수 있도록 쇠사슬이 달려 있다. 쇠사슬은 삼각대의 꼭대기 부분에서 아래로 늘어뜨려져 있는데, 한쪽 끝을 당기고 풀어 가면서 높이를 조절한다.
그리고 삼각대 아랫부분에는 쇠로 만든 받침대가 달려 있다. 받침대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한쪽은 철판 형태 그대로고 나머지 절반은 석쇠처럼 구멍이 뚫려 있다. 철판에서는 스테이크를 굽고, 석쇠에서는 삼겹살을 구울 용도로 만든 고기구이 판이었다.
물론 고안자는 김필도고 제작자는 요른이다.
김필도는 석쇠 쪽에 주전자를 올려놓고 차를 꺼냈다.
카판이란 이름의 차로 커피와 비슷하다.
마시는 방식도 거의 같다.
먼저 아카카판이란 이름의 열매를 햇빛에 건조시켜 곱게 간다. 그런 다음 가루를 깔때기 모양으로 만든 또호야 나뭇잎에 넣고 컵에 걸친 채 뜨거운 물을 부으면 갈색 액체가 나오는데 그게 바로 카판이다.
설탕을 약간 넣으면 조금 밍밍하지만 그럭저럭 커피 맛이 난다.
“커피 한잔을 시켜놓고…….”
그 언제 적 노래를 흥얼거리며 카판 뽑을 준비를 하고 있으려니 물이 끓었다. 김필도는 장갑을 낀 손으로 주전자 손잡이를 잡고는 천천히 물을 부었다.
“바리스타가 별거냐? 내가 바로 바리스타다!”
독특한 커피 향이 풍겨 나왔다.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또호야 나뭇잎을 건져 내고 커피 잔을 들었다.
“다음엔 아카카판을 볶아 봐야겠어.”
김필도는 카판을 마시며 중얼거렸다.
카판의 맛은 마치 아메리칸 커피처럼 연하다. 그동안에는 그거라도 어디냐며 마셨는데 더 이상은 참아 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벌써 배가 불렀나?”
음식 투정까지 하는 걸 보면 어느새 이곳 생활에 많이 적응이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 정도면 거의 예술이지.”
김필도는 지금 상황이 더할 나위 없이 좋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는 어떨지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는 부족한 게 전혀 없다.
아공간에는 음식이 충분히 들어 있고, 한파와 더위를 막아 주는 마법 로브가 있으니 노숙도 걱정 없다.
이 정도면 거의 천국 같은 생활이라 할 수 있었다.
“그래도 집은 하나 있어야겠지.”
김필도는 품속에서 지도를 꺼냈다.
살 집을 구하려면 제국으로 돌아가야 하고, 제국으로 돌아가려면 함께 왔던 자들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전혀 모른다.
지도를 보며 처음 왔던 곳을 더듬어 보지만 얼마나 더 가야 할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두두두두! 두두두두!
지도를 불빛에 비춰 보려는데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김필도는 지도를 집어넣고 고개를 들었다.
말처럼 생긴 거대한 물체가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그것은 이야크라고 부르는 이동 수단이었다.
이야크에 대해서는 요른으로부터 말만 들었지 본 적은 없다. 잠시 후 거대한 이야크 세 마리가 김필도 옆으로 다가왔다.
김필도는 먼저 이야크를 살폈다.
말을 두 배 정도 뻥튀기해 놓은 듯하다.
얼굴은 낙타를 닮았고 다리는 사람 허벅지처럼 두껍다. 발은 호랑이나 사자 발과 비슷하다. 목에는 사자처럼 갈기가 나 있으며 풍성한 털로 온몸을 둘렀다.
특히 옆구리 털은 해초처럼 길게 늘어져 있어 바람이 불 때마다 갈기와 함께 휘날렸다. 그리고 얼굴은 낙타와 비슷하고, 길게 나 있는 꼬리는 말 꼬리를 닮았다.
전체적으로 순해 보이는 인상이지만 한 가지가 녀석을 야수로 바꿔놓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피처럼 붉은 눈동자였다. 붉은 눈동자는 공연히 섬뜩한 느낌을 자아냈다.
이야크를 관찰하고 난 김필도는 시선을 들었다.
세 사람은 전부 두꺼운 털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두 사람은 남자고 한 명은 여자다. 남자 중 각진 얼굴의 사내는 50대 후반에서 60대 초반쯤 돼 보이고, 얼굴에 칼자국이 있는 자는 40대 후반으로 보였다.
여자는 로브 후드를 쓰고 있어 종잡을 수가 없다.
“혼잔가?”
각진 얼굴의 사내가 물었다. 사내의 등에는 투핸드 소드가 걸려 있었다.
“그렇소만.”
김필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 대륙에서 혼자라… 대단한 실력자인 모양이군. 난 톰벨이네.”
사내는 자신을 소개했다.
“난 학사요.”
“캭샤?”
“캭사가 아니고 학사.”
“하악사?”
“그렇다고 해 두지요.”
김필도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칼자국 사내를 보았다.
김필도는 슬쩍 미소를 베어 물었다. 칼자국을 보자 문득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난 렉스턴이오.”
“반갑소.”
김필도는 목례를 하고는 여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로브 후드를 쓰고 있어 얼굴은 알아볼 수 없었다.
“난 아델리나예요. 직업은 마법사고요.”
여자가 조그맣게 자기소개를 했다.
“얼마나 됐습니까?”
“문 대륙에 온 지 얼마나 됐는지 그걸 묻는 건가?”
톰벨은 김필도를 가만히 살피며 말을 받았다.
“추방자 같아 보이지 않아서요.”
“나도 캭사 당신과 같은 생각을 하던 참이네.”
톰벨은 습관처럼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지금은 용병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톰벨은 그랜드 마스터에 오른 검사였다. 검사가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면 상대방의 몸 주위에 흐르는 기파를 파악하는 것만으로도 실력의 고하를 알아낼 수 있다.
그런데 눈앞의 사내는 검술을 익힌 흔적이 전혀 없다.
로브를 걸치고 있기는 하지만 기다란 검을 가지고 있는 걸 보면 마법사도 아니다.
물론 마법사라고 하여 검을 가지고 다니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엉덩이에 걸려 있는 두 자루의 검은 호신용으로 가지고 다니기엔 너무 특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