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
마법사도 아니고, 뛰어난 검사도 아닌 자가 문 대륙을 혼자 여행한다는 건, 톰벨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캭사가 아니고 학사라니까 그러네.”
“그 발음은 너무 어렵네, 캭샤.”
“그럼 루시안은 어때요?”
“그건 부르기 쉬울 것 같네.”
“그럼 루시안으로 부르시오. 한잔하겠소?”
김필도는 들고 있던 컵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카판?”
톰벨은 바로 알아맞혔다.
“그렇소.”
김필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고맙지만 지금 카판을 마실 시간이 없네.”
“바쁜 모양이군요.”
“우리뿐만 아니라 루시안 자네도 바빠질 거네.”
“난 별로 바쁜 일이…….”
캘캘캘! 캘캘캘!
김필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특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김필도는 홱 고개를 돌렸다.
커다란 물체 수백 마리가 우르르 달려오고 있었다. 걷는 모양새가 언뜻 보기엔 타조 같았다.
“뭡니까?”
김필도는 벌떡 일어나 짐을 챙기며 물었다.
“래딕커네.”
톰벨이 대답했다.
“뱀 머리 타조라고요?”
래딕커는, 머리는 뱀처럼 생겼고, 몸은 타조인, 육식과 채식을 겸하는 잡식성 몬스터의 한 종류였다.
캘캘캘! 캘캘캘!
김필도는 부산하게 움직였다.
카판을 쏟아 버리고 주전자를 집어넣고, 대충 삼각대를 접어 안으로 던져 넣었다.
그때 하늘에서 뭔가가 떨어졌다.
김필도는 고개를 들었다. 붉은 달빛 사이로 밤톨 크기의 덩어리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눈이네… 씨팔, 피네.”
환하게 웃던 김필도의 입에서 별안간 욕설이 비어져 나왔다. 손바닥으로 받아 본 그것은 흰 눈이 아니라 붉은색 눈이었던 것이다. 눈이 녹자 피처럼 붉은 물이 흘러내렸다.
“안 갈 건가?”
김필도의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던 톰벨이 물었다.
“가야죠.”
김필도는 앞으로 내달리며 대답했다.
“타앗!”
“차앗!”
“하아!”
세 사람은 채찍을 휘둘렀다. 곧 이야크는 김필도를 따라잡았다.
“그렇게 달려갈 텐가?”
톰벨은 답답하다는 듯이 김필도를 향해 소리쳤다.
“이야크가 없는데 달려가는 수밖에 없잖아요. 댁이 저놈들을 저쪽으로 유인해 가면 될 것 같은데요?”
김필도는 손가락으로 오른편을 가리켰다.
“자넨 저쪽으로 가고?”
“네.”
“래딕커를 처음 겪는 모양이구먼.”
“그걸 어떻게 아는데요?”
“래딕커를 안다면 그런 소릴 할 수가 없지.”
“래딕커가 어때서요?”
“개코네.”
“개코는 내 똘만이 별명인데?”
“똘만이는 또 뭔가?”
“그런 게 있어요. 그러니까 댁 말은 저놈들에게는 유인이 먹히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렇네.”
“그럼 신세를 지는 수밖에 없겠네요.”
“타게.”
톰벨은 손을 내밀었다.
“선택할 권리는 없는 겁니까?”
“무슨 선택 말인가?”
“이야크가 세 마리잖아요.”
“그러니까 아델리나 뒤에 타고 싶다는 말인가?”
“전에도 난 750을 타고 다녔습니다.”
“750은 뭔가?”
“진동은 거의 없고, 코너링도 죽이고, 밟는 대로 쭉쭉 뻗어 나가는 자동차, 아니 마차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좋은 마차를 타고 다녔단 말이구먼.”
“이해가 빠르시군요.”
“그런 마차를 원하면 내 뒤에 타야 하네.”
“저쪽은 아니란 말입니까?”
“직접 경험해 보게.”
“감사합니다.”
김필도는 히죽 웃으며 나아가던 속도를 늦췄다.
캘캘캘! 캘캘캘!
“부탁합니다, 아델리나.”
김필도는 손을 내밀었다.
“안장 아래쪽에 손잡이가 있어요.”
쌀쌀한 목소리가 로브 후드 안에서 흘러나왔다.
“좀 잡아 주면 어디 덧나나.”
김필도는 코를 찡긋하고는 안장 아래쪽을 살폈다.
그녀의 말처럼 안장 아래쪽에 손잡이가 있었다. 그런데 손잡이는 하나가 아니었다. 연속으로 세 개가 달렸다. 발을 디디는 등자 또한 사다리의 발판처럼 세 개가 연속해서 달려 있었다.
이야크의 등이 높아 한 번에 올라갈 수가 없어 만들어놓은 장치인 듯했다.
김필도는 맨 아래쪽 손잡이를 잡았다.
“처음 타는 거예요?”
아델리나는 김필도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이야크도 처음 보고 래딕커도 처음 봅니다.”
“문 대륙엔 언제 왔죠?”
“오기는 6개월 전에 왔는데, 이런저런 사정으로 모처에 숨어 있다가 며칠 전에 나왔습니다.”
“사다리는 탈 줄 알아요?”
“물론이죠.”
김필도는 왼손에 힘을 주고 왼 다리를 맨 아래쪽 등자에 걸쳤다.
“그렇게 하면 돼요.”
“알겠습니다. …어이쿠!”
하지만 빠르게 달려가는 이야크에 올라타는 게 쉽지는 않았다. 몇 번 헛발질을 하다가 겨우 이야크 위에 올라앉았다.
“염병할! 2인승이네요?”
김필도는 실망한 얼굴로 말했다. 아델리나 뒤편에도 안장이 따로 마련돼 있었다.
“뭘 기대한 거죠?”
“빠르게 달리는 물체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면, 가급적 앞사람과 밀착해서 앉고,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아야 하잖아요.”
“풋! 그 앞에 있는 고삐를 잘 잡아야 할 거예요.”
아델리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야크의 동체가 옆으로 쏠렸다. 방향을 틀고 있었던 것이다.
김필도는 급하게 안장 앞쪽에 매달린 줄을 잡았다. 그 줄은 바로 뒤쪽에 탄 사람이 중심을 잡을 때 사용하는 후미 고삐였다.
“이건 완전 경운기네. 운전 좀 조심해서 할 수 없어요?”
김필도는 빽 소리쳤다.
얼마 가지도 않았는데, 엉덩이와 허벅지에서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래딕커가 얼마나 빠른지 알고 그래요? 조금만 늦어도 녀석들에게 잡아먹힌다고요.”
캘캘캘! 캘캘캘!
두두두두! 두두두두!
아델리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래딕커의 울음과 함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김필도는 고개를 돌렸다.
“헉!”
김필도는 손등으로 눈을 비벼 보았다.
뒤쪽 벌판을 새카맣게 물들인 채 래딕커들이 쫓아오고 있는 광경은 꿈이 아니었다.
“좀 더 속도를 낼 수 없어요?”
김필도는 버럭 소리쳤다.
“이게 최고 속도라고요.”
“무슨 말이 이렇게 느려요?”
“말보다 두 배나 빨리 달리고 있는데 늦다는 거예요?”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조금 전 나랑 똑같이 달렸으면서.”
“똑같이 달렸다고…….”
아델리나는 깜짝 놀랐다.
래딕커가 쫓아오는 바람에 경황이 없어 깜빡하고 있었다. 루시안이란 사내를 태울 때 그녀는 최고 속도로 달리는 중이었다. 그런데 루시안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이야크를 쫓아 달리며 올라탔다. 그것은 그가 그 정도 속도로 달릴 수 있는 능력자란 뜻이다.
“아무튼 속도를 좀 내 보라… 와우!”
김필도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비로소 이야크의 속도가 실감났다. 고속도로에서 차를 몰고 갈 때 도로 위 흰색 점선이 빠르게 밀려가는 것처럼 땅이 뒤편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게다가 그가 앉아 있는 이야크의 어깨 높이는 3미터나 된다. 눈이 핑핑 돌아갈 지경이었다.
“말보다 두 배 빨리 달린다고 했어요?”
김필도가 물었다.
“측정해 본 적은 없지만 얼추 그래요.”
“말이 최고 속도로 달릴 때가 시속 70킬로미터 정도니까 이 녀석은… 완전 연비 죽이는 SUV네. 좋아, 결정했어.”
김필도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뭘 결정했다는 거죠?”
“연비 좋은 SUV 하나 장만하기로 결정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야크를 구입하겠다는 건가요?”
“이 정도면 구입할 가치가 충분하잖아요.”
“이야크 한 마리가 얼마인지 알고 하는 소리예요?”
“얼만데요?”
“얼마를 받기로 하고 문 대륙으로 온 거죠?”
아델리나는 김필도를 용병으로 여겼다.
“돈을 준다는 말은 없었는데요?”
“그럼 추방된 거예요?”
“차원의 벽을 수리하고 하만티움을 캐 오라는 임무를 받고 넘어왔으니까 추방은 아닐 거예요. 지금은 좀 의심스럽긴 하지만.”
“귀족?”
“아마도.”
“무슨 대답이 그렇죠?”
“나도 헷갈려서 그래요.”
“뭐가 헷갈려요?”
“그것 자체를 모르겠어요.”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정확하게 꼬집어 말할 수 없다?”
“딩동댕!”
“그건 내 말이 맞다는 뜻?”
“넵!”
“댁은 비밀이 많아 보여요.”
“댁들도 다르지 않아요.”
“워!”
“워!”
바로 그때 앞서 가던 톰벨과 렉스턴이 이야크를 세웠다.
“워!”
아델리나는 급하게 이야크를 세웠다.
“왜 그러세요?”
그녀는 이야크를 앞으로 몰아갔다.
“길을 잘못 든 모양이다.”
톰벨이 가리킨 전면에는 바닥이 보이지 않는 협곡이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협곡 건너편까지는 2백 미터쯤 되어 보였다.
바로 휴도니아와 루루시아의 경계인 도니아 협곡이었다.
“마법사라고 하지 않았어요?”
김필도는 아델리나에게 물었다.
플라이 마법을 써서 날아가면 간단하지 않느냐는 질문이었다.
“설마 내가 7클래스 마법사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죠?”
“하긴 7클래스 마법사가 문 대륙에 있을 리가 없겠죠. 그럼 어떻게 할 거죠?”
김필도는 뒤를 돌아보았다.
눈이 쌓여 이젠 발걸음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다만 무거운 뭔가가 이편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는 듯한 느낌이 든다.
“‘거윈의 다리’는 1백 킬로미터 북쪽에 있습니다.”
지도를 살피던 렉스턴이 말했다.
거윈의 다리는 도니아 협곡을 건너는 유일한 다리였다.
“방향을 잘못 잡았군.”
톰벨은 얼굴을 찌푸렸다.
“저걸로는 방향을 잡을 수… 안 보이네.”
하늘을 가리키던 김필도는 머쓱하여 손을 내렸다.
별로 방향을 찾아낼 수 없느냐고 물을 참이었다. 그런데 하늘엔 별이 보이지 않았다.
눈이 쏟아짐에도 불구하고 달이 그대로 있기에 별도 그럴 거라 여겼는데 아니었다.
“준비하게.”
톰벨은 이야크 등에서 기다란 물체를 꺼냈다. 세 개의 봉 모양의 막대를 조립하자 양끝에 날이 달린 창으로 변했다. 창의 길이는 4미터가량이었다.
그 사이에 렉스턴도 조립을 마치고 북쪽을 향해 섰다. 톰벨과 렉스턴이 자리를 잡자 아델리나는 두 사람 사이로 들어가 5미터 앞으로 나갔다.
“아가씨가 선봉?”
김필도는 허리춤의 설풍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장거리 공격을 해야 길을 틀 수 있잖아요.”
“래딕커와 싸운 경험이 많나 보죠?”
“문 대륙에서 생활하다 보면 지긋지긋하게 만나게 되는 녀석들이 래딕커예요.”
“그럼 난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네요.”
“걱정해야 해요.”
“왜죠?”
“보통 이동 중에 만나는 래딕커 떼는 50마리 내외거든요.”
“그럼 저기 래딕커는 어떻게 된 거죠?”
김필도는 1백 여 미터 전방에 모습을 드러내는 래딕커를 가리켰다. 눈이 녹은 녀석들의 몸은 피를 뒤집어쓴 것처럼 새빨갛다.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요.”
“갑자기 래딕커 무리가 커졌다는 거군요.”
“맞아요.”
아델리나는 마법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좌우를 살폈다.
“준비 끝났다.”
톰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요! 타앗!”
“차앗!”
“하아!”
궤! 궤궤궤궤궤!
래딕커들을 위협하려는 것인 듯 이야크는 특유의 괴성을 토해 내며 전방을 향해 질주해 갔다.
두두두두두! 두두두두두! 두두두두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