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거윈의 다리 근처 커다란 바위 아래쪽이었다.
래딕커와 싸움이 끝나고 곧바로 이곳으로 왔다. 하지만 일행은 다리를 건널 수가 없었다.
거윈의 다리는 단순하게 협곡에 걸쳐진 다리가 아니라 밤에는 모습을 감추고 낮에만 나타나는 마법의 다리였다.
톰벨의 말로는 ‘신의 시대’의 유물이라고 하는데 그것도 확실하지 않다고 했다. 그가 말한 신의 시대는 신마 전쟁의 다른 말이었다.
김필도는 가장자리에 놓인 커다란 구조물을 바라보았다. 5미터 간격을 두고 서 있는 구조물은 높이가 20미터에 달한다. 지름이 20미터 되는 거대한 원형 구조물을 가장자리에 세우고, 절반을 잘라 버린 듯한 모습이다.
저 구조물 또한 다리의 일부일 텐데 어떤 용도로 만들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어쩌면 멋을 부리기 위해 만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잠시 다리를 바라보던 김필도는 바닥에 쌓인 눈을 파헤쳤다. 시뻘건 눈을 헤집자 금세 손바닥이 붉게 변했다.
색은 붉었지만 눈에서는 어떤 냄새도 나지 않았다. 더욱 신기한 것은 주전자 안에 넣고 끓이면 붉은색이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몇 차례 더 눈을 헤집자 술병이 나왔다.
프라이드치킨과 맥주. 그 환상적인 궁합을 맞추기 위해 눈 속에 묻어 두었다. 술은 요른이 준 아공간에 들어 있었다. 술병의 표면에는 물방울 모양이 조각돼 있었다.
그가 눈 속에 묻어 둔 것은 1백여 병 중 두 병이었다.
그아우!
술병에 묻는 눈을 털고 있는데 나직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울음소리가 들려온 곳은 낭떠러지 근처였다.
김필도는 고개를 꺾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그는 술병을 챙겨 들고 바위 아래로 들어갔다.
“그게 술인가?”
김필도의 손에 들린 술병을 바라보며 톰벨이 물었다.
“튀김에는 뭐니 뭐니 해도 생맥주가, 아니 시원한 술이 최고거든요.”
김필도는 술병을 내려놓았다.
“자네도 생맥주를 좋아하는가?”
“생맥주가 있어요?”
김필도는 얼른 기억 회로를 더듬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릿속 곳곳을 뒤져보아도 생맥주란 말은 들어 있지 않다.
“이런 순진덩어리 같으니라고.”
김필도는 피식 웃었다.
루시안이 마신 술이라고는 포도주가 전부였다. 김필도는 포도주를 술이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그에게 과일주는 도수와 상관없이 전부 주스였다.
“다 먹었어요?”
술병을 내려놓은 김필도는 반도 더 넘게 남은 래딕커 튀김을 가리켰다.
“배가 터질 지경이네.”
“그럼 됐군요.”
김필도는 볼에 튀김을 주섬주섬 담았다.
잠시 뒤 튀김이 가득 담긴 볼을 들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커다란 구조물이 있는 곳까지 가서는 낭떠러지 바로 앞에 볼을 내려놓았다.
“아깐 고마웠다.”
그는 속삭이듯 말하고 몸을 돌렸다.
톰벨 일행이 있는 곳으로 돌아온 김필도는 눈앞 광경에 의아해졌다. 세 사람이 전부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튀김은 식으면 맛이 없어지거든요. 버리느니 배고픈 누군가에게 주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김필도는 어색한 얼굴로 말했다.
“이거 어디서 난 건가?”
톰벨은 술병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그가 김필도를 가만히 바라본 이유는 튀김을 들고 나간 것 때문이 아니었다. 김필도가 놓고 간 술병 때문이었다. 처음엔 김필도가 튀김을 들고 나가는 걸 이상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목이 말라 술을 한잔하려고 술병을 들었다가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여간해서는 놀라지 않는 톰벨을 깜짝 놀라게 한 것은 술병에 양각된 물방울 무늬였다.
“날 구해 준 형님이 준 건데, 문제 있습니까?”
“그분을 뵐 수 있는가?”
“살아 계시면 함께 다니고 있겠지요.”
“돌아가셨단 말인가?”
“네. 그런데 왜 그러십니까?”
“이건 신의 눈물이네.”
톰벨은 술병을 가리켰다.
“술의 이름이 신의 눈물이라고요?”
“신의 눈물은 신의 시대의 유물이네.”
“신의 시대 유물이라고요?”
김필도는 깜짝 놀랐다. 1백 병이 넘는 술이 신의 시대 유물이라면 요른은 신의 시대 유물이 숨겨져 있던 장소를 찾았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네.”
톰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신의 시대가 얼마나 오래전인 줄 아십니까?”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오래전이라는 건 나도 아네. 하지만 이건 그 당시 만들어진 신의 눈물이 분명하네.”
“이런 물방울무늬는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지 않나요?”
김필도는 물방울무늬를 다시 살펴보았다.
“물론 이게 유리라면 가짜일 수도 있네.”
“유리가 아니란 말입니까?”
“자세히 보게.”
톰벨은 술병을 불빛 아래로 가져갔다. 그러자 희미한 푸르스름한 광채가 흘러나왔다.
“설마…….”
김필도는 미심쩍은 눈으로 물방울무늬를 보았다. 문득 푸르스름한 광채를 보자 한 가지 보석이 떠올랐다.
“이건 이중으로 돼 있네.”
“안에 다른 물체가 또 들어 있단 말인가요?”
“그렇네. 이 술의 이름이 신의 눈물이라면 이 물방울은 신의 물방울이라고 부르네. 정확하게는 물방울 안쪽에 들어 있는 작은 물방울의 이름이지만.”
“설마 물방울 다이아몬드가 들어 있다는 건 아니겠죠?”
“맞네.”
톰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이 안에 들어 있는 게 물방울 다이아몬드란 말인가요?”
“내가 알기론 그렇네. 그런데 이걸 어디서 구했는지 아는가?”
톰벨의 얼굴은 어떤 기대로 인해 잔뜩 상기됐다. 하지만 김필도는 톰벨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아공간 안에는 정확하게 103병의 술병이 있다.
그것들 전부가 신의 눈물이라면 총 105개의 다이아몬드가 있는 셈이다. 병을 깨 봐야 알겠지만 들어 있는 다이아몬드의 크기는 엄지손톱만 할 것이다. 그 정도 크기라면 거의 천문학적인 금액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아니, 굳이 다이아몬드를 빼서 팔 필요가 없다. 다이아몬드가 들어 있는 술병 자체만으로 엄청난 가치가 있을 게 분명하다.
“완전 대박이네.”
김필도는 헤벌쭉 웃었다.
“술병 정도는 대박 축에 끼지도 못하네.”
“무슨 소립니까?”
뜬금없는 말에 김필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자네 형님이란 사람이 이걸 어디서 얻었는지 모르지만, 내가 알기론 신의 눈물은 신의 시대에 살았던 최고위층들이 마시던 술로 알고 있네.”
“그러니까 이것들이 있던 장소에 가면 그들이 남긴 진짜 유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인가요?”
“그렇네.”
톰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유물이 뭐죠?”
김필도는 술을 따르며 물었다.
그가 톰벨 일행을 따라나설 생각을 한 것은 이곳을 알 목적이 컸다. 루시안 또한 문 대륙에 대하여 아는 게 거의 없었다. 함께 왔던 자들이 아직 남아 있을 거라는 보장도 없고, 설령 아직 돌아가지 않았다고 해도 만난다는 보장도 없다. 그들을 만나지 못할 때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신의 시대에 대해 아는가?”
“1만 년 동안 신마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신의 시대는 그 1만 년 동안 일어났던 전쟁의 시대를 말하네.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이 치러졌던 그 1만 년은, 인류에게는 암흑기였지만 물질문명은 전성기를 구가했다네.”
“무기들 때문인가요?”
“무기뿐만 아니라 마법 또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시기였네. 오늘날 우리가 마법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들이 그 시기에 정립돼 내려왔다네. 신의 시대는 3기로 구분하는데 1기는 마나의 시대, 2기는 마법의 시대, 3기는 기갑의 시대라 부르네.”
“마나 시대의 유물은 그랜드 마스터일 테고, 마법 시대 유물은 마법이고 기갑 시대의 유물은 전투기갑으로 알고 있습니다.”
“잘 아는군. 그 시대의 유물은 대부분 전해졌고, 지금도 사용되고 있네. 마나 시대의 유물은 그랜드 마스터이고 마법 시대의 유물은 마법이네. 그리고 기갑 시대의 유물인 전투기갑은 페라시온으로 각국이 보유하고 있네.”
“그렇다면 이곳에 남은 건 이런 술밖에 없는 거 아닙니까?”
김필도는 술잔을 비우며 말했다.
“이곳엔 술만 남아 있는 게 아니네.”
“그 시대에 사용했던 기갑도 있단 말입니까?”
“그렇네. 신족이 사용했던 전투천갑 세이기온이 있고, 마족이 사용했던 전투마갑 크레디온이 있고 인간이 사용했던 전투전갑 프라이온이 있네.”
“그것들이 아직 남아 있을 거라고 보십니까?”
“찾아내지 못해서 그렇지 분명히 남아 있네. 자네가 자네 형님으로부터 얻었다는 그 술처럼.”
“그럼 톰벨이 얻고자 하는 건 뭡니까?”
“지금껏 많은 이들이 이곳 추방자의 땅으로 왔고, 고대의 유물을 발견했다네. 수많은 유물이 나왔는데 단 한 가지 크레디온만 나오지 않았네.”
“크레디온이면 마족들이 만들었다는 전투마갑을 말하는 거 아닙니까?”
“크레디온은 마나를 다루는 검사들의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전투기갑이네.”
“크레디온을 걸치면 얼마나 강해집니까?”
“지금 내 수준에서 크레디온의 힘이 더해지면 고룡의 단두 드래곤을 상대할 수 있네.”
“다두 드래곤은 불가능하다는 말이군요.”
모든 생명체가 여러 종족이 있는 것처럼 드래곤도 머리가 하나 달린 단두 드래곤과, 여덟 개의 머리가 달린 다두 드래곤, 두 종족이 있다.
두 종족 또한 인간이 민족끼리 전쟁을 하는 것처럼 끊임없이 충돌을 겪어 왔다. 드래곤의 역사는 두 종족 간의 전쟁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요른을 비롯한 다섯 드래곤들은 그 전쟁에서 패한 패배자들이었다.
“다두 드래곤은 여덟 마리의 단두 드래곤과 맞먹는 힘을 가졌네.”
“그건 외형적인 모습만으로 내린 평가일 뿐입니다. 무기를 쥘 팔이 많으면 싸울 때 유리하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무기를 든 수만큼 강해지는 건 아닙니다.”
“그들은 여덟 개의 무기를 든 게 아니라 여덟 개의 머리를 가졌네. 여덟 개의 머리를 가졌다는 건 동시에 여덟 개의 사고를 한다는 뜻이기도 하네.”
“내가 아는 속담 중에는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도 있습니다.”
“자네 다두 드래곤에게 감정이 많은가 보구먼.”
톰벨은 김필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톰벨이 김필도에 대해 아는 거라고는 마법인지 검술인지 구분이 모호한 특이한 기술을 구사한다는 것과, 정체를 알 수 없다는 것 두 가지다. 그런데 방금 나눈 대화에서 다두 드래곤에게 상당한 적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아니고 형님이 그놈들을 아주 미워했습니다.”
“형님 영향이구먼. 아무튼 좋은 쪽이 됐든 나쁜 쪽이 됐든 다두 드래곤과는 가급적 엮이지 않는 게 좋네.”
“성격이 괴팍한가 보죠?”
“괴팍한 게 아니라 그들은 인간을 몬스터와 동급으로 취급한다네.”
“그래도 벌레로 취급하는 것보다는 낫네요.”
“가르쳐 줄 수 있는가?”
“이걸 얻은 장소 말입니까?”
김필도는 술병을 가리켰다.
“은혜는 반드시 갚겠네.”
“내가 영감님에 대해 아는 거라고는 이름밖에 없는데 어떻게 은혜를 갚는다는 말입니까?”
“자넨 대륙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알기 위해 우릴 따라가고 있는 거 아닌가?”
“하하하! 이런, 들키고 말았네요. 맞습니다. 내게 필요한 건 나와 함께 왔던 동료들에게 가는 방법이나, 그게 여의치 않을 땐 발탄 제국으로 돌아가는 방법입니다.”
“발탄 제국 출신인가?”
“그렇습니다.”
김필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온 동료는 자넬 뭐라고 부르는가? 호칭 말이네.”
“…대공이라 부릅니다.”
잠시 뜸을 들이던 김필도는 사실대로 말했다.
영지도 없는 대공인데 굳이 숨길 이유가 없었다.
“그랬구먼. 아무튼 내가 문 대륙 전부를 다 아는 건 아니지만 차원의 벽으로 가는 길은 알고 있네. 그리고 자네가 동료를 만나지 못한다면 내가 차원의 벽을 통과하게 도와 줄 수도 있네.”
[아빠!]
아델리나는 텔레파시로 톰벨을 불렀다.
그녀와 톰벨은 텔레파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마법 장치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손목에 찬 팔찌와 톰벨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그 장치였다.
[난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을 거다, 리나.]
[우린 루시안을 데리고 갈 수 없어요.]
[저 녀석은 우리처럼 일부러 넘어온 자가 아니라 추방당한 추방자야.]
[그는 차원의 벽을 수리하고, 하만티움을 캐러 왔다고 했잖아요.]
[발탄 제국에서는 차원의 벽을 넘는 자들을 ‘차원 수리공’이라고 한다. 그런데 ‘차원 수리공’을 뽑는 기준이 뭔지 아느냐?]
“잠시 생각을 해 봐야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