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 김필도-19화 (19/225)

# 19

김필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필도는 눈치 하난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 그는 아델리나와 톰벨이 비밀 이야기를 나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런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어색하고, 조금 전 내놨던 튀김이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현명한 결정을 내리길 바라겠네.”

김필도를 향해 말한 톰벨은 다시 아델리나에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제국 황실은 임무를 마치고 귀환하면 사면시켜 준다는 조건으로 죄수를 훈련시켜 보낸다.]

[그럼 루시안도 죄수란 말이에요?]

[죄수였다면 동료들에게서 떨어질 리가 없었겠지.]

[그럼 정체가 뭐라고 보세요?]

[아마 차원 수리공을 인솔해 온 인솔자 중의 한 명일 거다.]

[인솔자가 왜 낙오한 거죠?]

[낙오한 게 아니라 낙오시킨 걸 게다.]

[낙오시켜요?]

[그림자 대공이란 말 들어 본 적 있느냐?]

[그림자 대공이라고요?]

[작위는 있지만 영지가 없는 대공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 자리도 있어요?]

[황실에 해가 되는 자고, 살려 두면 장차 해악이 될 게 분명한 자라 무조건 죽여 없애야 하는데, 눈들이 많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경우가 있지.]

[이노시어스 공작 같은 자를 말하는 건가요?]

[적절한 예구나. 맞다, 이노시어스 공작 같은 놈이다. 발탄 제국에서는 차원 수리공을 이용해서 그런 자들을 처리해 왔다.]

[작위를 준 다음 차원 수리공의 리더로 삼아 문 대륙으로 보낸다는 말이군요.]

[아마 루시안은 대공에 임명되자마자 차원 수리공의 리더가 돼 이곳으로 왔을 게다.]

[그러니까 인연을 맺어서는 안 되는 자란 말이군요.]

[왕국을 되찾는다고 해도 루시안을 안다는 건 해가 됐으면 됐지 결코 도움이 되지는 않을 거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아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밖으로 나온 김필도는 거대한 구조물 아래쪽에 서 있었다. 가장자리에는 조금 전 내놓았던 볼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볼 안은 텅 빈 채다.

김필도는 볼을 집어 들어 아공간 안으로 집어넣었다.

“다음엔 더 맛있게 해 주마.”

김필도는 싱긋 웃으며 몸을 돌렸다.

잠시 후 바위 아래쪽으로 들어가자 이야기가 끝난 듯 톰벨 일행은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결정했는가?”

김필도가 돌아오자 톰벨이 물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잖아요. 한 가지만 분명히 하면 거래를 하겠습니다.”

“들어 보지.”

“나는 무기류와 전투기갑을 비롯한 기갑 종류에는 손을 대지 않겠습니다. 대신 이런 게 나오면 전부 날 주십시오.”

김필도는 술병을 들어 올렸다.

“보물을 달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좋네. 그렇게 하겠네.”

톰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있습니다.”

김필도는 품속에서 지도를 꺼내 내밀었다. 그것은 요른이 남겨 준 유물로, 술병과 함께 들어 있던 것이었다.

지도를 받아 든 톰벨은 꼼꼼하게 살폈다.

그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아델리나에게 넘겼다.

“마법 지도예요?”

아델리나는 지도에 마법이 걸려 있다는 사실을 대번에 알아냈다.

“풀 수 있겠느냐?”

톰벨은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일단 해 볼게요.”

아델리나는 마법 지팡이를 꺼냈다. 그러고는 지도에 대고 눈을 감았다. 한동안 눈을 감고 있던 그녀의 입에서 나직한 주문이 흘러나왔다.

“언락(Unlock)!”

이윽고 주문 영창이 끝나고, 시동어가 울려 퍼졌다.

스스스!

아주 조용한 공간에서 작은 벌레가 기어가는 듯한 소리가 지도에서 흘러나왔다.

‘응?’

아델리나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분명 마법을 펼친 사람은 그녀다.

그런데 지도에 걸려 있는 언락 마법을 푸는 마나는 바로 옆에 앉은, 루시안으로 알고 있는 김필도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아니, 그것도 정확하지 않았다. 다만 지도를 활성화시킨 마나가 그녀의 마나가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잠시 골몰해 있던 아델리나는 금세 현실을 인지했다. 언락 마법을 푼 주체가 누군지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걸려 있던 언락 마법이 풀렸고, 지도가 품고 있던 비밀을 토해 내려고 한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제9장 거함750

일행은 긴장한 얼굴로 지도를 바라보았다.

김필도 또한 다르지 않았다. 그는 술과 함께 나뒹굴던 지도에 저런 비밀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복사기의 복사 버튼을 누르면 복사할 정보를 읽어 들이기 위해 불빛이 이동하는 것처럼 반투명한 광채를 발하는 빛이 천천히 지도를 훑었다.

이윽고 지도 위로 붉은 실선 하나가 생겨났다.

실선은 서쪽으로 나아가다가 북쪽으로 향했다.

“맙소사!”

지도를 지켜보던 톰벨은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왜 그러십니까?”

김필도는 멀뚱한 눈으로 톰벨을 바라보았다.

“이 붉은 선 말이네.”

“아십니까?”

“내가 알 리가 있는가.”

“그런데 왜?”

“여기 ‘에인션트 로드’라고 적힌 거 안 보이나.”

“고대의 길?”

“‘에인션트 로드’는 신의 땅으로 들어가는 길이네.”

“신의 땅은 어디를 말하는 거죠?”

“여기네.”

톰벨은 지도 한가운데를 가리켰다. 그곳은 붉은 실선이 가리키는 마지막 지점으로 리모스라고 표시돼 있었다.

“리모스가 신의 땅이란 말입니까?”

“지금은 ‘사라진 땅’ 또는 ‘환상의 땅’이라는 의미로 불리고 있지만 원래 의미는 신의 땅이었네.”

“원래는 지명을 나타내는 말이었는데 단어의 의미가 변했다는 말이군요.”

“그렇네.”

“하지만 이 지도에는 표시가 돼 있잖아요.”

“자네 지도에는 리모스라고 돼 있지만 내 지도에는 ‘영원의 호수’라고 돼 있네.”

톰벨은 자기 지도를 꺼내 보여 주었다.

그의 말대로였다. 김필도의 지도엔 리모스 주변이 거대한 호수로 표시돼 있었다.

“그럼 원래는 도시였는데 나중에 호수가 된 걸까요?”

“그건 알 수 없네. 도시가 가라앉은 건지, 아니면 지하에 건설된 건지 알 수는 없지만, 거기에 존재하는 건 분명하네.”

톰벨은 흥분한 듯 점점 목소리가 커져 갔다. 그의 얼굴은 이미 신의 땅을 찾은 듯했다.

“이건 날 줘야겠지요?”

김필도는 아델리나가 들고 있는 지도를 낚아챘다.

척!

보고 있던 렉스턴이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목숨을 구해 준 사람을 죽이려고?”

김필도는 렉스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지도의 비밀을 푼 사람은 아델리나 님이었다.”

“그래서?”

김필도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왼편 무릎은 꿇고 오른편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 그러자 그의 엉덩이 위쪽에 걸어 두었던 두 자루의 검 손잡이가 왼편 허리 옆으로 튀어나왔다.

“물론 네 소유이긴 하지만 아델리나 님의 아버지이신 톰벨 님도 권리가 있다는 뜻이다.”

“난 권리가 없다고 말한 적 없어.”

“물론 그렇게 말한 적은 없지. 하지만 때론 말보다 행동이 더 정확할 때가 있다.”

렉스턴의 몸에서 차가운 기운이 무럭무럭 솟아 나왔다. 그는 금세라도 검을 뽑을 듯한 기세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이 지도는 내 거고, 나는 내 물건을 찾아 왔을 뿐이야. 그런 나의 행동을 보고 당신네들이 기분 나빴다면 사심이 있었다는 말이 되는 거야. 안 그래?”

“우릴 모욕하지 마라, 루시안.”

“난 학사 사시미 김필도야.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사시미 김필도 앞에서 너처럼 눈을 치뜬 놈치고 다리가 성한 놈은 한 명도 없었어.”

“건방진!”

스릉!

렉스턴은 검을 잡으며 사정없이 당겼다.

하지만 그는 검을 완전히 뽑지 못했다. 어느새 검 끝이 목 앞에 와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김필도의 허리춤에 있던 작은 도였다.

“험! 사과하게, 렉스턴.”

톰벨이 헛기침을 하며 나무라듯 말했다.

“마스터!”

“자네가 잘못했네. 루시안 대공의 말이 맞네. 지도의 주인은 그고, 우리와 계약을 했네. 우리를 속이는 일은 없을 거네. 그렇지 않은가?”

톰벨의 시선은 어느새 김필도에게 가 있었다.

“난 분명히 말했소. 아울러 말 나온 김에 한마디만 더 하겠소. 혹시 날 속일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날 속인 놈은 용서한 적이 없소. 단 한 번도!”

김필도는 도를 회수했다.

철컥!

소도는 나직한 소리와 함께 도집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자네도 명심하게. 나 또한 날 속인 자를 용서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네.”

“그럼 됐구려. 잡시다.”

김필도는 피식 웃으며 한편으로 누웠다.

* * *

“5백 년 전에 내보냈던 가드 맵(God Map)의 흔적이 간밤에 나타났습니다.”

황금색 갑옷을 걸친 중년인이 의자에 앉아 있는 청년을 향해 보고를 했다.

청년은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번쩍!

청년의 눈이 떠지며 황금색 광채가 쭉 튀어나왔다.

청년의 외모는 특이했다.

온몸이 황금으로 이루어진 조각상 같았다.

황금색 머리카락을 지녔고, 눈썹과 눈동자 그리고 손톱까지 죄다 황금색이었다.

온몸이 황금으로 뒤덮인 사내에게서는 온화하거나 부유하다는 느낌보다는 섬뜩하다는 느낌이 먼저 느껴진다.

그것은 다름 아닌 눈동자 때문이다.

황금색 광채를 발하는 눈동자는 뱀이나 도마뱀 같은 파충류의 눈동자처럼 세로로 세워져 있었다. 그 눈동자가 감정의 기복에 따라 폭이 늘어났다 줄어들었다를 반복했다.

황금의 종족.

아주 오래전에 천족을 불렀던 호칭이다.

황금빛 갑옷까지 걸쳐 황금으로 도금을 해 놓은 듯한 이 청년은 천족 정예 부대의 한 조직인 대천신군의 리더 세이아칸 카셀 디나브 에바르본이었다.

세이아칸의 황금빛 눈동자가 중년인에게로 향했다. 중년인의 황금색 외모 또한 세이아칸과 비슷했다.

“사실이냐?”

“어김없는 사실입니다, 천좌!”

세이아칸의 입이 열리자 중년인은 고개를 다시 숙였다.

“발견된 곳이 어디냐?”

“‘거윈의 다리’ 서쪽 휴도니아 지역입니다.”

“어디로 가고 있느냐?”

“아직은 그대로 있습니다. 하지만 날이 밝았으니까 루루시아로 들어갈 겁니다.”

“루루시아 동쪽엔 뭐가 있지?”

“이야크 평원과 어둠의 숲 그리고 마족들이 신의 산이라고 부르는 다르곤 산이 있습니다.”

“고대의 길 출발점이 다르곤 산이었던가?”

“가드 맵에서 우리가 밝혀 낸 유일한 장소가 바로 다르곤 산이었습니다.”

“히데우스도 신의 맵이 활성화됐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겠지?”

히데우스는 마계에서 가장 강하다는 마계10군단의 군단장이었다.

“그들 또한 가드 맵에 흔적을 남겼습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리모스로 들어가기 전에 싸움을 시작하면 다시 숨어버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일단은 두고 보는 게 낫다는 말이냐?”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만일 히데우스가 가드 맵을 차지하기 위해 나선다면?”

“5백 년 만에 나타났습니다. 그 역시 함부로 행동하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만일이라고 했다, 라이자칸.”

“그럼 우리 또한 전쟁에 뛰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좋다, 대천신군 대원들에게 출동 준비하고 대기하라 일러라.”

“알겠습니다, 천좌!”

“그리고 천좌10군은 나와 함께 다르곤 산으로 간다.”

“다르곤 산은 마족 구역입니다.”

“난 세이아칸이다. 걱정하지 말라!”

“당장 준비시키겠습니다!”

라이자칸이라 불린 중년 사내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로부터 1시간 후, 11마리의 이야크가 천신의 성을 나서 남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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