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 김필도-20화 (20/225)

# 20

날이 밝자 신기하게도 일행 앞에 다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마법의 힘은 대단하네.”

김필도는 놀란 얼굴로 중얼거렸다.

전날 밤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다리가 정말로 없는 건지 혹은 눈속임에 불과한 것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큰 돌을 던져 보았다. 눈속임으로 다리를 숨겨 두었다면 돌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거라는 생각을 하며.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돌 떨어지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잘못 던졌나 싶어 몇 번이고 다시 시도했다.

돌을 던지는 방향 또한 매번 달랐다. 그러나 돌 떨어지는 소리는 한 번도 듣지 못했다. 결국 다리는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날이 밝고 해가 뜨자 거짓말처럼 다리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리의 폭은 가장자리에 서 있는 구조물의 폭과 같은 5미터고 협곡 건너편까지는 3백 미터가량이다.

3백 미터를 연결하려면 중간에 기둥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건 눈을 씻고 봐도 없다.

다만 양쪽에 서 있는 거대 구조물 주위로 강한 역장이 형성돼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다리를 구성하는 판을 붙잡고 있는 힘이 바로 그 역장인 듯했다.

“이 도니아 협곡은 인간, 엘프, 드워프가 살았던 휴도니아와 마족의 대지인 루루시아의 경계라네.”

김필도가 다리를 바라보며 감탄사를 흘리고 있자 톰벨이 설명을 해 주었다.

김필도는 톰벨을 돌아보았다. 표정을 보니 간밤에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은 이미 잊은 것처럼 보였다.

상대방이 그렇게 나오는데 꿍해 있을 이유가 없었다.

“저 건너편이 마족의 대지였단 말입니까?”

김필도는 일부러 목소리 톤을 높였다.

“그랬다고 하더구먼.”

“그럼 거윈의 다리가 밤에 사라지는 것은, 밤을 이용해서 마족들이 넘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군요.”

“머리가 좋구먼.”

“그 정도야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거잖습니까?”

김필도는 걸음을 옮겼다.

수십 세기가 지났을 텐데 다리는 멀쩡했다. 마법의 힘을 다시 한 번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쉬이익!

다리 아래쪽에서 섬뜩한 소리가 올라왔다.

그는 빠르게 걸었다. 갑자기 다리가 사라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행히 그가 건너편에 당도할 때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루루시아의 첫 느낌은 칙칙함 그 자체였다.

마치 온대 기후와 한대 기후가 교차하는 지점을 지나온 듯한 그런 기분이 들었다.

숲을 채우고 있는 나무는 대부분 검붉은 빛을 띠고, 나무들 사이를 흐르는 대기는 눅눅하고 서늘하다. 다리 하나를 건넜을 뿐인데 완전히 다른 환경이었다.

“루루시아 중앙에 있는 다르곤 산까지 가야 하네.”

“설마 걸어가는 건 아니겠죠?”

“타세요.”

김필도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델리나가 말했다.

“고맙습니다, 아델리나.”

김필도는 구세주를 만난 얼굴로 이야크에 올랐다. 이어 렉스턴과 톰벨이 이야크에 올랐다.

“이럇!”

“타앗!”

이야크가 전방으로 달려 나갔다.

그런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들이 있었다. 눈동자는 천족과 마찬가지로 도마뱀처럼 길쭉했다.

척! 척척! 척!

이야크 두 마리가 모습을 감추자 검은 동체를 가진 자들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떨어져 내린 자들의 체격은 상당히 컸다.

키는 2미터 남짓에, 어깨가 넓고, 가슴은 떡 벌어졌다. 붉은 머리에 붉은 눈동자, 붉은 입술, 붉은 손톱, 모든 게 붉은색 일색이다. 단지 피부는 검었다. 대체로 검은 게 아니라 먹물처럼 새카만, 다크 블랙(Dark Black)이었다.

머리 양쪽에는 뿔이 나 있는데 거대한 달팽이를 붙여놓은 것처럼 동그랗게 말려 있다.

등에는 피부와 마찬가지로 검고 커다란 검이 한 자루씩 걸려 있었다. 붉은 눈동자, 붉은 입술, 붉은 손톱, 검은 피부, 달팽이처럼 생긴 뿔을 가진 이들은 마족이었다.

“어떻게 봤느냐?”

일행의 선두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데 목소리의 주인은 여자였다.

이카렌 쿤타 카킬레우스.

150살의 어린(?) 나이에 첫 싸움을 시작하여 4백 살이 된 250년 동안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던 무패의 승부사.

최연소로 백작이 됐으며, 450살의 어린 나이에 가장 강하고 거칠다고 소문난 마계10군단으로 들어갔다. 그것도 자원해서.

그리고 5백 살이 된 지금 마계10군단의 부군단장이 됐고, 차기 군단장으로 거론되고 있다.

강하다고 해서 얼굴이 남자 마족처럼 생긴 것도 아니었다. 붉은 머리카락 속에 숨은 녹색의 뿔이 아름다운 광채를 뿌려대고, 얼굴은 그 어떤 마족보다 아름답다.

사실 그녀의 이름이 전 마계에 알려지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얼굴 때문이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여자가 거대한 검을 휘두르며 사내 마족과 싸우는 모습은 화젯거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마계의 근간을 이루는 율법 중 ‘승자 독식’이란 조항이 있다. 승자가 모든 것을 차지한다는 규칙이다.

여기서 승자란 정당한 싸움을 통해서 승리한 자를 말한다. 반드시 도전을 해야 하고, 상대가 수락했을 때만 싸움을 할 수 있다.

즉 도전자가 도전을 하고, 도전을 받는 자가 수락을 한다는 것은 싸움에서 패할 경우에는 상대가 원하는 어떤 요구라도 듣겠다는 맹세가 포함되는 것이다. 설령 그 요구가 목숨을 원하는 것이라도.

그러한 규칙 때문에 싸울 때 비겁한 짓은 절대 용납되지 않는다. 정정당당하게 싸워 이기고 모두로부터 인정을 받았을 때 비로소 승자의 권리를 요구할 수 있다.

당연 그녀에게 도전하는 자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승리하면 마계 제일 미녀를 아내로 거느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단 한 명도 승리하지 못했고, 오히려 그녀의 부하가 돼야 했다.

그래서 마계10군단과는 별도로 이카렌은 쿤타 군단이라는 사조직을 거느리게 됐다.

“명령만 내리시면 지금 당장 지도를 빼앗아 오겠습니다.”

뒤쪽의 사내 마족이 고개를 숙이며 소리쳤다.

“데메우스 넌 그래서 늘 남작에 머물고 있는 거야.”

이카렌은 차갑게 말했다.

“늦으면 천족 놈들에게 선수를 빼앗길 수도 있습니다, 부군단장.”

데메우스라고 불린 마족의 눈동자가 더욱 가늘어졌다. 극심한 모욕감을 느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만일 가드 맵이 천족 손에 들어가면 넌 어떻게 하겠느냐?”

“바로 공격할 겁니다.”

“그럼 우리가 가드 맵을 얻으면 천족은 어떻게 나올 거라고 보느냐?”

“난 천족이 두렵지 않습니다.”

“나는 두려워한단 말이냐?”

이카렌은 데메우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온통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마족은 모욕감을 느꼈을 때 눈동자가 가늘어지고 극도로 화가 났을 때는 지금 이카렌처럼 좌우로 확장돼 눈 전체가 붉은색으로 변한다.

지금 이카렌은 극도로 화가 난 상태였다.

“아, 아닙니다, 부군단장.”

데메우스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상급자에게 무조건 복종하라, 라는 마계 율법을 어기면 즉결처분도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지금부터 내 질문에 대답하라. 만일 천족의 세이아칸이 리더로 있는 대천신군이 가드 맵을 탈취해 가면 넌 어떻게 할 거냐?”

“고대의 길이 시작되는 다르곤 산에서 놈들을 막을 겁니다.”

“그럼 천계에서는 어떻게 나올 것 같으냐?”

“난 그들이 두렵지…….”

캬아아!

이카렌의 입에서 흉포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오른손을 쭉 내밀어 데메우스의 목을 틀어쥐었다.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손톱이 튀어나와 데메우스 목으로 파고들어 갔다.

주르르!

데메우스의 목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데메우스의 눈동자에 공포의 빛이 어렸다.

“나는 네놈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적과 싸울 건지 그건 알고 싶지 않아. 내가 알고 싶은 건 우리가 공격을 시작했을 때 천족이 어떻게 나올지 하는 거야. 그것도 대답하지 못하면 넌 마계10군단에 있을 필요가 없어.”

이카렌은 데메우스 목으로 얼굴을 가져갔다. 그러고는 흘러내리는 피를 가볍게 혀로 핥았다.

“저, 전력을 증강시킬 겁니다!”

“그럼 우린?”

이카렌은 속삭였다.

“역시 전력을 증강시킵니다.”

“그럼 전쟁이 일어나겠지?”

“그렇습니다.”

“그것도 장기전이.”

“그, 그렇습니다.”

“어쩌면 제2차 마신전쟁이 일어날지도 몰라.”

“그, 그렇습니다.”

“1차 마신전쟁 기간이 몇 년이었지?”

“1만 년이었습니다.”

“내가 인간들에게서 가드 맵을 빼앗지 않는 이유를 알겠느냐?”

“아, 알겠습니다.”

“말하라.”

“일단은 리모스 안으로 들어가기 위함입니다.”

“맞다, 데메우스. 인간들에게서 가드 맵을 탈취하게 되면 우린 리모스로 들어가지도 못한 채 이곳에서 전쟁만 하게 된다. 즉 아무런 실적도 없이 전쟁만 치르게 된다는 거다. 그렇게 되면 마왕을 비롯한 마계 원로들이 뭐라고 하겠느냐? 리모스는 찾지도 못하면서 공연히 분란만 조장하는 무능한 군단이라고 할 것이다. 마계10군단은 마계 최강 군단이 아니라 마계 최강 말썽꾸러기 군단으로 전락한단 말이다. 하지만 리모스 안으로 들어가면 달라진다. 같은 전쟁이지만 이번엔 우리 마족의 고토를 회복하기 위한 숭고한 전쟁이 된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하지만 천계의 세이아칸이 우리와 같은 생각을 하리란 보장이 없습니다.”

“멍청한 놈! 넌 지금부터 평군이다, 데메우스. 율장!”

이카렌은 오른편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미치는 곳에는 마계10군단의 율법을 집행하는 켈베니오스가 서 있었다.

“하명하십시오, 부군장님.”

“이놈을 당장 평군으로 강등하라!”

“데메우스는 4대원로 중 한 분인 프리메우스 님의 아들입니다. 한 번만 재고를 해 주십시오, 부군장님.”

“생각하지 않는 놈은 우리 군단에 필요 없다. 당장 시행하라!”

“알겠습니다.”

켈베니오스는 데메우스를 보았다.

“켈베니오스, 시행하시오.”

데메우스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네.”

켈베니오스는 데메우스의 머리에 있는 붉은색 뿔을 잡았다. 이어 그의 입에서 나직한 주문이 흘러나왔다.

“크윽!”

데메우스는 비명을 토했다.

얼굴이 잔뜩 일그러지며 근육이 뒤틀렸다. 이마에서는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그리고 양쪽 이마에 나 있던 뿔의 색이 붉은색에서 검은색으로 변했다.

머리 양쪽의 뿔은 마족의 상징임과 동시에 신분을 나타내는 표식이었다. 마왕을 비롯한 최상급 마족은 황금색 뿔이, 상급 마족은 은색 뿔이, 중급 마족은 녹색 뿔이, 하급 마족은 붉은색 뿔이 그리고 평군 마족은 검은색 뿔이 달려 있다.

검은색은 곧 노예보다 한 단계 높은 신분, 즉 평군 마족을 의미했다.

뿔의 색이 완전하게 검은색으로 변하자 켈베니오스는 손을 떼고 물러났다.

“나는 강한 전사보다 생각이 깊은 전사를 더 선호한다는 걸 명심하라.”

“가, 감사합니다, 부군단장님!”

데메우스는 이카렌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정중한 말과는 달리 땅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눈동자는 전체가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가자!”

데메우스를 가만히 바라보던 이카렌은 몸을 돌렸다.

그녀가 몸을 날려 가자 데메우스는 고개를 들었다.

“죽일 년!”

데메우스는 거침없이 욕을 뱉었다.

“지금까지 널 아내로 삼기 위해 참았다. 이카렌. 하지만 이젠 아니다. 네년을 죽여 버리겠다. 아주 처참하게.”

데메우스는 아프게 주먹을 그러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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