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 김필도-21화 (21/225)

# 21

검은 벌판은 더없이 넓었다. 얼마나 넓은지 일행이 서 있는 곳에서는 반대편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야크 평원이네.”

“처음이 아닌가 보죠?”

김필도는 톰벨을 돌아보았다.

“이 녀석들의 고향이네.”

톰벨은 타고 있는 이야크를 가리켰다.

“이야크를 잡은 곳이 여기란 말입니까?”

“우리가 잡은 건 아니고 야생 이야크를 길들여서 파는 자들이 있네.”

“이곳에도 마을이 있다는 말처럼 들리는데 맞습니까?”

“추방자들은 생각보다 많다네.”

“그럼 그들이 이곳에서 마을을 일구고 산다는 거군요.”

“그렇네.”

일행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야크 평원으로 들어섰다.

두두두두! 두두두두! 두두두두!

4킬로미터를 전진해 들어갔을 때였다. 바닥이 흔들릴 정도로 엄청난 굉음이 일행을 덮쳤다.

“이럇!”

“타앗!”

“차앗!”

“저쪽으로 몰아!”

그리고 익숙한 소리들도 들려왔다. 그것은 사람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굉음의 주인공들은 보이지 않았다.

“우리도 가보세.”

“이럇!”

“가자!”

촤악! 츄악!

톰벨과 아델리나는 채찍을 휘둘렀다.

그러자 이야크 두 마리가 질풍처럼 내달렸다.

약 1킬로미터가량 달렸을 때였다. 작은 언덕을 넘어서자 비로소 굉음의 주인공들이 보였다.

그것은 수천 마리의 이야크와 그들을 쫓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었다.

“와우!”

김필도는 저도 모르게 환성을 내질렀다. 엄청난 속도로 내달리는 이야크의 모습에서 무한한 자유가 느껴졌다. 문득 저들과 함께 달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잡았다! 블랙칸을 잡았다!”

멀리서 희열에 찬 외침이 들려왔다.

김필도는 소리 나는 곳을 보았다.

“허?”

김필도는 동상처럼 굳어졌다.

올가미에 걸린 검은색 이야크 때문이었다.

크기는 다른 이야크와 비슷했다. 보통 이야크의 크기는 머리에서 엉덩이까지 4미터에서 5미터 사이인데 녀석은 그보다 약간 커 보였다. 그런데 녀석의 몸에서 풍기는 위압감은 대단했다. 수백 미터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녀석의 파워가 감지될 정도였다.

구워워워!

우렁찬 포효와 함께 이야크가 앞발을 힘껏 쳐들었다.

녀석을 보는 순간 김필도의 심장은 둥둥 뛰었다.

문득 전에 타고 다녔던 애마가 떠올랐다. BMW750Li. 8기통 V8 트윈터보의 심장을 가졌던 놈.

크기 5미터 20센티미터, 무게 2톤에 달하는 육중한 몸이지만 시속 1백 킬로미터에 도달하는 시간은 5초. 최고 속도 250킬로미터. 풀타임 사륜구동으로 빗길 눈길을 가리지 않는다.

“넌 내 거다! 달려!”

김필도는 흥분을 가누지 못하고 소리쳤다.

“뭐라고요?”

“저 녀석을 향해 달리라고!”

김필도는 검은 이야크를 가리켰다.

쿠워워워!

“아악!”

검은 이야크가 억세게 몸을 튕기자 줄을 잡고 있던 자가 허공으로 붕 떠올라 내팽개쳐졌다.

그러자 검은색 이야크가 내달리기 시작했다. 검은색 이야크가 달려오는 방향은 김필도 일행 쪽이었다. 모든 방향이 막혀 있어 검은색 이야크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달려! 아델리나!”

김필도는 다시 소리쳤다.

“저놈은 블랙칸이에요, 루시안!”

“상관없으니까 달려! 아니, 내려!”

김필도는 아델리나의 허리를 잡고 번쩍 들어 올렸다.

“이봐요.”

아델리나는 질겁했다. 아래로 뛰어내리기는 너무 높은 위치였다. 그녀는 얼른 이야크 옆에 붙어 있는 손잡이를 잡았다. 그러고는 아래로 내려갔다.

휙!

아델리나가 내리자마자 김필도는 앞 안장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고는 안장에 앉자마자 이야크의 목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퍼억!

구억!

강한 통증에 깜짝 놀란 이야크는 전방으로 질주해 갔다.

검은색 이야크와 회색 이야크는 치킨게임을 하는 자동차처럼 서로를 향해 돌진해 갔다.

쿠워워워!

비키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위협하는 듯 검은 이야크는 포효했다.

“달려!”

김필도는 또다시 강하게 이야크의 목을 후려갈겼다. 이야크가 방향을 틀려는 조짐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왼편 고삐를 강하게 잡아당겼다. 하지만 이야크의 고집도 만만치 않았다. 아니, 고집이 아니라 검은 이야크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이었다.

“오픈!”

김필도는 아공간을 열었다.

아공간의 검은 입구로 손을 집어넣어 옷을 꺼냈다. 그러고는 이야크의 눈을 가렸다.

갑자기 눈앞이 보이지 않자, 이야크는 움찔했다. 하지만 김필도는 틈을 주지 않았다. 그는 오른손 주먹으로 사정없이 이야크의 목을 갈겼다. 이번엔 오른손에 전 힘을 다 실었다.

퍼억!

둔탁한 소리가 이야크의 목에서 터져 나왔다.

쿠억!

이야크는 비명을 지르며 전방으로 쏘아져 나갔다.

“흐흐! 눈물이 찔끔 날 거다, 이놈아.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놈이 바로 눈에 뵈는 게 없는 놈이야. 달려, 달려, 자식아!”

퍽! 퍽퍽퍽!

김필도의 주먹이 무자비하게 이야크의 목에 꽂혔다.

쿠어어억!

갑자기 앞에서 달려오던 검은 이야크가 방향을 틀었다. 김필도가 탄 이야크 때문이 아니었다. 잔뜩 흥분한 김필도가 이야크를 향해 주먹을 휘두를 때 그도 모르게 불의 속성 마법인 세딕(Sedic)의 힘을 끌어올렸는데 검은 이야크가 그걸 알아본 것이었다.

“코너링도 좋고!”

요 근래 이렇게 만족스러울 때도 없었다는 듯이 김필도의 얼굴이 상기됐다. 방향을 트는 이야크의 동작이 너무 자연스러웠다.

사실 검은색 이야크가 이렇듯 자연스럽게 방향을 틀게 된 것은 이야크 사냥꾼들 때문이었다.

이야크 사냥꾼들은 블랙칸이란 이름까지 지어놓고 생포하려고 했다. 블랙칸 자체도 엄청난 가치가 있지만 야생 이야크 무리의 대장인 녀석을 잡으면 녀석을 따르는 이야크들도 잡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블랙칸은 잡히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피하는 기술이 더욱 발전했다.

방향을 트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방향을 틀었을 때 가장 빨리 달릴 수 있는 자세를 스스로 파악해 냈고,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하지만 눈에 뵈는 게 없는 놈에게는 못 당해, 인마!”

김필도는 오른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의 주먹이 이야크의 목에 꽂히고 두 이야크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그리고 20여 분이 흘렀을 때 김필도가 탄 이야크는 블랙칸과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

이야크가 블랙칸보다 빨라서가 결코 아니었다. 이야크 사냥꾼들을 피해 하루 종일 도망 다녔던 까닭에 녀석은 거의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퍼억!

김필도의 주먹이 이야크의 목에 꽂히자 이야크가 블랙칸을 약간 앞서나갔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김필도는 블랙칸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가 노리는 것은 사냥꾼이 던졌던 올가미였다. 블랙칸의 목에는 10개의 올가미가 목걸이처럼 걸려 있었다.

재빨리 올가미를 잡은 김필도는 손을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위로 돌려 올가미를 그러쥐었다.

손으로 그러쥔 올가미가 그의 손목을 감싼 모습이 되었다. 이렇게 줄을 그러쥐면 손목이 끊어지기 전엔 절대 놓치지 않는다.

쿠워워워워!

갑자기 이상한 물체를 태워서인 듯 블랙칸은 앞발과 뒷발을 연속해서 차대며 뛰어갔다. 김필도의 몸은 블랙칸 위에서 춤을 췄다.

그 상태로 블랙칸은 무서운 속도로 내달렸다.

허연 거품을 토해 내면서도 녀석은 쉬지 않았다. 하지만 밧줄에 자물쇠를 채워 버린 김필도가 떨어질 리가 없었다. 그는 끝까지 붙들고 늘어졌다.

그렇게 1시간가량 달렸을까.

결국 블랙칸이 먼저 항복했다. 녀석은 속도를 늦추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김필도는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이러다가 언제 또 발광할지 모르는 게 바로 야생동물이기 때문이었다.

그의 예상대로였다. 10여 분 동안 숨을 고른 녀석은 다시 앞발과 뒷발을 차대며 내달렸다.

그렇게 다시 30분을 달렸고, 이야크는 다시 멈췄다. 그런 상황이 10번이나 지속됐다. 그리고 커다란 호수가 나왔을 때 마침내 블랙칸은 완전히 항복했다. 드디어 녀석의 몸 주위에 흐르고 있던 투기가 사라진 것이었다.

“저기로 들어가!”

김필도는 손으로 목을 툭 쳤다.

그러자 블랙칸은 호수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아아아우우우!

쿠억!

어디선가 고양이 울음 같은 특이한 소리가 들려오자 블랙칸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블랙칸은 본능적으로 최강의 몬스터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블랙칸은 겁먹은 눈동자로 두리번거렸다.

“괜찮아, 내 친구야.”

김필도는 빙그레 웃으며 블랙칸의 목을 쓰다듬었다.

쿠어!

“이제부터 넌 750이다. 거함750!”

김필도는 활짝 웃으며 로브를 벗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어둠이 닥치며 기온이 뚝뚝 떨어지고 있지만 김필도에겐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제10장 바람의 창 라콰

“대단한 인간이군.”

그런 김필도를 가만히 바라보는 자가 있었다.

어둠과 동화된 채로 목욕을 즐기는 1인 1수를 바라보는 이자는 마계10군단의 부군단장인 이카렌이었다.

그녀는 부하들을 암흑의 성으로 먼저 돌려보내고 혼자 톰벨 일행을 미행하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블랙칸을 쫓아가는 걸 보고 뒤따라왔는데, 최강의 이야크가, 그녀 견지에서 종족 중 가장 나약한 인간에게 굴복당한 광경을 목격한 것이다.

놀라운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 들려왔던 특이한 울음소리가 마음에 걸렸다. 마족은 인간이나 천족에 비해 특히 감각이 예민하다. 그런데 그 울음소리의 주인은 어디에 있는지 걸려들지 않는다. 다만 주위 어딘가에 숨어서 이편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만 느낄 수 있었다.

“가드 맵을 가진 인간은 저자다.”

그녀는 호수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쿠억!

물속에 몸을 담근 채 열기를 식히던 블랙칸이 낮게 울었다.

“나도 알아!”

김필도는 긴장한 얼굴로 호숫가를 보았다.

키가 2미터가량 되는 거대한 덩치가 다가오고 있었다. 김필도가 아는 한, 붉은 머리에 새카만 피부를 가진 종족은 마족밖에 없었다. 김필도의 시선이 머리로 향했다. 역시 예상대로 머리 양쪽에는 뿔이 달려 있었다.

“여자?”

김필도는 깜짝 놀랐다.

마족의 가슴은 풍만한 곡선을 이루고 있었다. 큰 키에 어울리는 커다란 가슴이었다.

“물은 어때?”

이카렌은 대뜸 물었다.

“조금 전까지 미친놈처럼 뛰었거든.”

“시원하다는 말?”

“지금까진.”

“그 말 믿어 보지.”

김필도를 빤히 바라보던 이카렌은 옷을 벗었다.

“이봐, 난 남자야.”

김필도는 질겁하여 소리쳤다.

“난 마계10군단의 부군단장 이카렌 쿤타 카킬레우스 백작이다.”

상의를 벗어 던지자 육감적인 몸매가 드러났다. 배에는 식스팩이 선명하고 몸을 움직일 때마다 근육이 물결친다. 푹 팬 쇄골과 그 아래 달덩이처럼 풍만한 가슴은 숨이 막힐 정도로 뇌쇄적이다.

“마족 중엔 가슴 달린 남자도 있다던데 네가 그런 모양이지?”

아직은 침을 삼킬 때가 아니었다.

하지만 입 안 가득 침이 고이는 수컷의 본능은 어쩔 수 없었다.

이카렌은 김필도를 빤히 바라보더니 바지를 벗었다.

꿀꺽!

김필도는 입 안 가득 고인 침을 꿀꺽 삼켰다.

마계10군단의 부군단장이라고 하였던 이카렌은 가슴 달린 수컷이 아니라 여자 마족이었다.

“이름을 들었으면 자기소개를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이카렌은 걸어가며 말했다.

물에 한 발을 담그던 이카렌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물이 얼음장보다 더 차가웠다.

아닌 게 아니라 수면에 사르르 얼음이 어는 중이었다.

그녀는 김필도를 바라보았다.

“냉수는 사내에겐 좋거든.”

김필도는 이카렌의 몸을 꼼꼼히 살폈다. 마족의 알몸을 본다는 건 흔치 않은 경험이었다.

“어떤 면에서?”

“정력에 좋대.”

“정력?”

“인간들 중 수컷은 때론 정력을 강자와 약자를 구분하는 척도로 삼기도 하거든.”

“공개적으로 하진 않겠지?”

“당연히 그렇지. 겉으로는 전혀 아닌 척 도덕군자처럼 말하고 행동해.”

“그렇다 밤이 되면 달라진다?”

“잘 아네.”

“마족도 별반 다르지 않거든.”

적당한 위치까지 들어간 이카렌은 그 자리에 앉았다. 다시 그녀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물은 이가 부르르 떨릴 정도로 차가웠다.

“사는 건 인간이나 마족이나 거기서 거기라는 말이네?”

“그런 셈이지. 그런데 정말 냉수가 남자에게 좋아?”

“그렇다고들 해.”

김필도는 이카렌 앞으로 걸어갔다.

기온이 뚝 떨어지고 있는 듯 물은 갈수록 차가워졌다.

그는 이카렌 바로 앞으로 앉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