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
“다리가 훨씬 긴 모양이지?”
앉은키는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아 보이자 김필도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어때?”
“뭐가?”
“마족의 알몸은 처음 본 거 아니었어? 그것도 암컷 마족의 몸을 보는 건 쉽게 할 수 있는 경험이 아니잖아.”
“이렇게 깔끔할 줄 몰았어.”
“어떻게 상상했는데?”
“온몸에 털이 무성하게 자라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우리 마족은 털을 야만의 흔적이라고 생각해. 문명과 야만을 나누는 기준이라고 할까?”
“털이 난다고 해도 다 밀어 버린다는 말?”
“그런 셈이야. 그런데 그건 뭐지?”
이카렌은 김필도의 가슴을 턱으로 가리켰다.
“갑빠!”
‘씨팔! 대학을 쳐 나오면 뭐하냐? 결정적인 순간에 조폭 언어가 튀어나오는데.’
거의 무의식중에 튀어나온 갑빠라는 말에 김필도는 자책했다.
“갑빠?”
“가슴 근육을 그렇게 부르기도 해.”
“근육 말고 그림 말이야.”
“이거?”
김필도는 자기 몸에 있는 문신을 가리켰다.
“응!”
이카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잠깐이었지만 그녀는 김필도가 검은 피부를 가진 걸로 착각했다.
“문신.”
“문신?”
“바늘로 찔러서 잉크를 집어넣으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그림이 되거든. 그걸 문신이라고 불러.”
“왜 그런 짓을 하지?”
“이런 게 있으면 강해 보이거든.”
“강해 보여?”
그녀는 강하게 보인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마족은 절대 겉모습으로 상대를 판단하지 않는다. 일단 검을 맞대 보고 난 후 패하면 그때야 상대의 강함을 인정한다.
그런 그녀에게 강해 보이기 위해 문신을 한다는 김필도의 말이 이해될 리가 없었다.
“부자처럼 보이려고 비싼 옷을 입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보면 돼.”
“그렇게 하면 효과가 있어?”
“효과? 엄청나지.”
“이를테면?”
“길을 가다가 공연히 시비가 붙었을 때 입 아프게 지껄이는 것보다, 소매를 스윽 걷어서 문신을 보여 주면 상대는 조용히 꼬리를 말고 사라지거든.”
“진짜 그래?”
“응!”
“하하하!”
이카렌은 크게 웃었다. 그러자 그녀의 가슴이 요란하게 출렁거렸다.
순간 김필도는 뜨거운 것이 불쑥 치밀어 오름을 느꼈다.
“나무관세음보살!”
김필도는 불호를 읊었다.
“그건 무슨 소리지?”
“수컷이 흥분을 가라앉힐 때 사용하는 주문.”
“마법 같은 거?”
“응!”
“효과가 있어?”
“지금은 그다지.”
“다른 녀석이 그런 말을 했으면 머리를 부숴 버렸을 거야.”
“나라서 참는 거라고?”
“아니?”
“그럼?”
“네가 가드 맵의 주인이라서 참는 거야.”
“가드 맵이 뭐지?”
“리모스로 찾아가는 길이 나온 지도.”
“고대의 길이 표시된 그 지도를 가드 맵이라고 한다고?”
“응.”
“그 지도가 내게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우리뿐만 아니라 천족도 알고 있어.”
“천족?”
“너희들이 신족이라고 부르는 것들.”
“내게서 빼앗아 가려고 온 거냐?”
“아니. 가드 맵이 선택한 주인이 누군지 궁금해서 와 봤을 뿐이야.”
“가드 맵이 날 선택한 게 아니고 어떤 노인으로부터 유산으로 물려받았을 뿐이야. 주인은 그분이야.”
“하지만 가드 맵을 연 인간은 너잖아.”
“내가 연 게 아냐.”
“너와 함께 있던 그 마법사 계집이 열었다는 거야?”
“마법을 펼친 사람이 그녀니까.”
“내가 그 지도 이름이 뭐라고 했지?”
“가드 맵(God Map).”
“그런 엄청난 이름을 지닌 지도가 하찮은 인간의 언락 마법으로 열릴 거라고 생각한 거야?”
“그녀가 연 게 아니라고?”
“당연히 아니지.”
“그럼 나?”
김필도는 손가락으로 제 얼굴을 가리켰다.
“내가 보기엔 그래. 그런데 이름이 뭐지?”
“학사 사시미 김필도… 아니,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
“아이작이면 발탄 제국 황족 아냐?”
“전엔 그랬어.”
“전에?”
“외할아버지가 황제였을 때.”
“지금은 황제의 성이 바뀌었다는 말?”
“응!”
“그럼 지금 작위는 뭐지?”
“대공이 됐고, 차원 수리공을 이끌고 이곳으로 온 거야.”
“그림자 대공이란 말이구나.”
“나 같은 녀석을 그림자 대공이라고 불러?”
“작위가 대공이니까.”
“그럼 작위가 공작이면 그림자 공작, 후작이면 그림자 후작 그렇게 부르는 거야?”
“아마도 그럴걸? 난 더 이상 못 참겠다.”
츄악!
이카렌은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김필도 눈앞에 이카렌의 알몸이 무방비상태로 드러났다.
“나도 못 참겠다.”
김필도는 핏발 선 눈으로 이카렌을 보았다.
“나와 자려면 날 이겨야 해, 학사 사시미 김필도.”
이카렌은 싱긋 웃으며 몸을 돌렸다.
“윽!”
잇새로 신음이 흘렀다.
유혹은 앞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녀의 뒷모습 또한 치명적인 유혹이었다. 아니, 충격이었다.
“지금까지 네게 도전한 자가 몇 명이었지?”
김필도는 심호흡을 하며 물었다.
만일 이가 덜덜 떨리는 차가운 물속에 있지 않았다면 진작 폭발해 버렸을지도 몰랐다.
“총 1,250명이 내게 도전을 했고, 그중 4백 명은 죽고 850명은 내 부하가 됐어.”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는 말?”
“패했다면 진작 다른 사내의 아내가 됐든지 아니면 수컷들 노리개 노릇을 하고 있겠지.”
그녀는 걸음을 옮겨 호숫가로 나갔다. 그러고는 김필도 쪽을 바라보며 천천히 옷을 입었다. 마치 김필도에게 감상할 마지막 기회를 준다는 듯이.
김필도는 쉬지 않고 침을 삼켰다.
“침 삼키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
이카렌은 웃으며 말했다.
“그것까진 말리지 마.”
“하하하! 재미있는 녀석이구나. 그런데 안 추워?”
“지금 이 순간에 춥다면 그놈은 인간도 아냐. 온몸에 열이 나서 죽을 지경이야.”
“진짜 열이 나?”
“이거 안 보여?”
김필도는 옆을 가리켰다.
“풋!”
이카렌은 저도 모르게 픽 웃었다.
정말로 김필도 옆에는 물방울이 수증기가 되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극한의 흥분 상태에서 몸이 저절로 반응하여 불의 속성 마법인 세딕(Sedic)이 다시 발현되며 일어난 현상이었다. 하지만 이카렌은 물론이고 당사자인 김필도조차도 마법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란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다만 이곳에서 자주 발견되는 온천의 하나로 치부했을 뿐이었다.
“아무튼 즐거운 만남이었어. 그리고 네가 가진 그 가드 맵 잘 지켜야 할 거야. 만일 그걸 천족에게 넘겨주면…….”
스스스!
그녀의 몸 주위에서 차가운 기운이 몰아쳤다.
‘으음!’
김필도는 내심 신음을 흘렸다.
1,250명의 도전을 받고 그 중 4백 명을 죽였다는 말은 지어낸 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강자였다. 어쩌면 요른에 필적한 강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지도는 네가 갖고, 날 데리고 들어가 주면 안 될까?”
“가드 맵이 내 손으로 들어온 순간 천족들은 공격을 시작할 거야.”
“그 반대 상황이 되면 마족들이 공격하겠네?”
“아마도.”
“그럼 리모스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둘 다 나를 공격하지 않겠구나.”
“내 부하보단 머리가 훨씬 좋구나.”
“그런데…….”
김필도는 몸을 일으켰다.
“우리가 리모스로 들어가려는 이유를 알고 싶다고?”
“응!”
“그건 모르는 게 좋아. 그럼 가드 맵 관리 잘해.”
이카렌의 시선은 김필도의 하체에 한동안 머물렀다. 그러고는 싱긋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녀의 모습이 사라지자 김필도는 이야크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김필도가 옷을 입는 사이에 이야크는 온몸을 빠르게 흔들어 물기를 털어 냈다.
그 사이에 김필도는 속옷과 방탄조끼를 입고 로브를 걸쳤다. 그런 다음 이야크의 목에 걸린 줄을 잡고 힘껏 도약하여 등에 올라탔다.
“이러다가 높이뛰기 선수 되겠네.”
거의 3미터에 달하는 높이를 단숨에 뛰어오르는 자신의 모습에 김필도는 혀를 내둘렀다.
고대의 방에서 익혔던 마법이 조금씩 몸 안으로 녹아들어 가면서 나타나는 변화였다.
전 같으면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다.
설령 줄이 늘어뜨려져 있더라도, 그 줄에 의존하여 3미터를 도약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시도한다.
애초에 올라가지 못할 거란 생각을 하지 않는다.
엄청난 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
“가자!”
김필도는 블랙칸의 목을 슬쩍 쳤다.
쿠워워워워!
블랙칸은 우렁차게 포효하며 전방으로 질주해 나갔다.
“제로 백 5초다, 750. 5초.”
김필도는 고함을 내질렀다.
김필도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그건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블랙칸은 최대 속도로 질주했고, 어느 순간 털끝에 달려 있던 물방울이 얼기 시작했다.
김필도가 일행이 야영을 하고 있는 장소에 도착한 것은 30분 후였다.
톰벨 일행은 이야크 사냥꾼들과 함께 불가에 앉아 있었다.
“읍!”
아델리나의 눈동자는 곧이라도 튀어나올 듯했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톰벨을 비롯한 이야크 사냥꾼들도 깜짝 놀랐다.
이곳에 있는 이들 중 누구도 김필도가 블랙칸을 잡아올 거라고 생각지 않았다. 그런데 잡아온 것을 넘어 길을 들여서 타고 왔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1만 골드 주겠네.”
사냥꾼 중 한 명이 김필도를 보며 말했다.
“누구요?”
“난 샤일록이네.”
“베니스 상인?”
샤일록이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김필도의 입에서 그 말이 튀어나왔다. 셰익스피어의 소설 ‘베니스 상인’의 주인공 이름이 샤일록이었다.
“우리 아는 사인가?”
자기를 샤일록이라 소개한 사냥꾼은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은 이야크 사냥꾼이지만 이곳으로 오기 전 그의 아버지는 정말로 베니스에서 상업을 했던 것이다.
“그럴 리가 없잖소.”
“그런데 내가 베니스 출신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는가?”
“상인들의 꿈이 베니스 아니오. 그래서 넘겨짚어 본 거요. 그런데 정말 고향이 베니스요?”
“30년 전만 해도 할먼 상단 하면 발탄 제국을 대표하는 상단이었네.”
“다 말아먹은 모양이구려.”
“흐흐흐! 원래 잘난 아버지 밑에서 크는 자식은 주눅이 들어 있는 실력조차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법이라네.”
“아버지 재산을 전부 말아먹고 도망쳤다는 말로 들리오.”
“그렇지 뭐. 5백 개나 됐던 지점을 전부 말아먹고 빚쟁이들을 피해 문 대륙으로 도망쳤네.”
“지금은 권토중래할 날을 기다리고 있는 거구려.”
“그렇게 거창하게 말할 정도는 아니고 빚을 갚을 정도는 됐네. 그런데 팔지 않겠는가?”
블랙칸을 바라보는 샤일록의 얼굴엔 탐욕이 가득했다.
“그건 안 되오.”
김필도는 빙긋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어떻게 잡았죠?”
아델리나는 김필도를 보며 물었다.
그녀의 이야크는 블랙칸을 따라잡을 정도로 강하지도 빠르지도 않아서 하는 말이었다.
“저 양반들에게 하루 종일 쫓기는 바람에 많이 지쳐 있더라고요. 그리고 올라탈 때는 목에 걸려 있는 올가미를 이용했죠.”
김필도는 블랙칸의 목에 걸린 밧줄을 가리켰다. 김필도가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블랙칸은 도망가지 않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보물을 주웠네요.”
고개를 끄덕이던 아델리나는 아버지 톰벨을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