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게냐?]
[문득 아빠가 전에 했던 말이 떠올라서요.]
[어떤 말 말이냐?]
[운이 따르는 사람은 말릴 수 없다는 말 말이에요.]
[그가 운이 따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빤 생각은 아닌가 보죠?]
[운이 따르는 사람 같았으면 그림자 대공이 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이곳에 오지도 않았을 게다.]
[재수가 없는 사람이라는 건가요?]
[재수가 없는 사람인지 그건 나도 모른다. 하지만 운이 따르는 사람은 결코 아니라는 건 맞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아델리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김필도를 돌아보았다.
그때 김필도는 블랙칸의 목에 채워진 올가미를 풀어내고 있었다.
“쩝! 이런 엄청난 놈을…….”
김필도 옆으로 다가간 샤일록은 입맛을 다셨다.
“아무리 입맛을 다셔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요. 내가 타지 못할 형편이 되면 다시 야생으로 놓아 줄 거니까 그때 잡든지 말든지 하쇼.”
“팔지 않고 풀어 준단 말인가?”
샤일록은 놀란 얼굴로 김필도를 보았다.
야생의 상태였을 때 1만 골드 정도라면 길들여진 상태인 지금은 그 10배를 받아도 충분하다. 사실 블랙칸이 비싼 이유는 전투용으로서의 가치 때문이 아니다.
녀석이 지닌 가장 큰 가치는 종마, 즉 씨받이 역할을 한다는 데 있다. 제대로 된 암컷을 골라 녀석과 교미를 시키면 블랙칸 같은 이야크 수백 마리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마리당 5천 골드만 받아도 1백 마리면 50만 골드가 된다. 투자비 10골드를 회수하는 건 일도 아니다.
그런데 그런 엄청난 보물을 다시 놓아 주겠다고 한다. 물론 탈 형편이 아니라면, 이라는 단서를 달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놀랄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비록 내게 굴복했지만 이 녀석은 한 조직의 대장이오. 대장은 차라리 죽이는 게 낫지 모욕을 주는 건 아니라고 했소.”
“허허허! 이거 내가 실수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지금껏 반 하대를 했던 샤일록은 바로 말을 올렸다.
비록 아버지가 일군 재산을 전부 말아먹긴 했지만 샤일록은 대륙 최고의 상단에서 뼈가 굵었고 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런 경험은 그에게 소중한 것들을 주었는데 그중 하나가 일상적인 대화에서 상대의 신분을 파악하는 기술이었다.
대장은 차라리 죽이는 게 낫지 모욕을 주는 게 아니라는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적어도 일개 조직의 책임자 급은 돼야 하고, 배포 또한 대단해야 한다. 샤일록은 그렇게 생각했다.
적장에 대한 예우를 논할 수 있는 신분.
김필도는 지극히 조폭적인 견지에서 원론적인 말을 했다. 하지만 김필도의 전직이 대불파의 이인자였다는 사실을 알 리 없는 샤일록은 다르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왜 그러는 거요?”
김필도는 의아한 얼굴로 샤일록을 보았다.
“그냥 그러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혹시 안장 있소?”
“좋은 건 없고, 문 대륙에서 얻은 안장이 있습니다.”
“골동품?”
“골동품이라고 부를 정도는 아니지만 그런 대로 쓸 만합니다.”
“필요 없으면 날 주시오.”
“알겠습니다. 오픈!”
샤일록은 아공간을 열고 검은 덩어리 하나를 꺼냈다.
그것이 바로 이야크 안장이었다.
이야크 안장은 말과 달리 앞쪽과 뒤쪽 두 개로 돼 있다. 이야크의 안장이 두 개로 돼 있는 것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전투용이라는 가설이 가장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야크의 덩치가 워낙 커서 한 명이 탄 상태로는 적 보병의 공격을 효율적으로 막아 낼 수 없어 2인용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샤일록이 꺼낸 이야크 안장은 온통 검은색 일색이었다.
“이 녀석과 아주 어울리겠군.”
김필도는 이야크 안장을 받아 내렸다.
안장 옆에는 150센티미터가 조금 넘어 보이는 쇠막대기 세 개가 함께 묶여 있었다. 세 개 중 두 개의 한쪽 끝에는 양날검 형태의 창날이 달려 있었다.
“이건 뭐요?”
김필도는 쇠막대들을 가리켰다.
“안장과 함께 발견한 이야크 창인데 고장 난 건지 조립이 되지 않더군요.”
이야크 창은 이야크 위에서 사용하는 무기였다.
김필도는 이야크 창을 바라보았다.
전에 톰벨이 사용한 걸 보긴 했지만 자세히 보는 건 처음이었다. 창날의 길이는 50센티미터가량이고 양날 검 형태로 앞쪽으로 갈수록 좁아졌다. 이야크 창의 색 역시 안장과 마찬가지로 검은색이었다.
“이건 또 뭐요?”
김필도는 손잡이 부분에 있는 문양을 가리켰다.
어떻게 보면 물결 문양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바람 문양 같기도 했다. 하지만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듯 희미했다.
“저도 모릅니다. 그보다 안장을 올리려면 이 녀석의 털을 좀 정돈해야겠습니다.”
샤일록은 블랙칸을 가리켰다.
“털을 정리하는 사람이 있소?”
“훌륭한 미용사가 있습니다.”
샤일록은 대답했다.
“밤인데도 상관없소?”
털을 정리하기엔 너무 어둡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 저 녀석의 위용을 보고 싶습니다.”
샤일록은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
김필도는 샤일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칼 들고 장난치다가 전 재산을 말아먹었구려.”
김필도는 빙그레 웃었다.
조금 전 샤일록은 자신을 상인이라고 소개했다. 하지만 그건 지금 상인이라는 뜻이지 과거에도 상인이었다는 말은 아니었다. 샤일록의 눈에는 숙명적으로 검을 좇을 수밖에 없는 전사의 불길이 일렁이고 있었다.
“이젠 이 손에 검을 들 일은 없을 겁니다. 눈으로 보고 즐기기만 할 참입니다.”
샤일록은 씨익 웃으며 오른손을 들었다.
“그 생각 변치 말기를 바라오. 원래 이걸로 흥한 놈은 이걸로 망한다고 했으니.”
김필도는 이야크 창을 들어 올렸다.
“팔도! 하임! 이 녀석을 최대한 예쁘게 치장해 봐.”
“알겠습니다, 마스터!”
이야크 사냥꾼들이 모여 있던 곳에서 두 사람이 일어나 앞으로 나왔다.
“야! 너희들은 이 녀석 털 좀 빗겨!”
왜소한 체격의 청년이 사냥꾼들을 보며 소리쳤다. 그 사내가 바로 이야크의 미용 담당인 팔도였다.
팔도가 부르자 다섯 명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사내들은 조심스럽게 블랙칸 옆으로 다가갔다. 블랙칸이 날뛸까 봐 몸을 사렸다.
“저기…….”
왜소한 청년이 김필도를 보았다.
“알았어.”
김필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블랙칸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배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지금부터 미용할 거야. 그러니까 얌전히 있어. 무슨 말인지 알겠지?”
꾸억!
“시작해.”
팔도가 소리치자 여섯 사내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이야크의 털을 골랐다.
김필도의 말 때문인 듯 여섯 명이나 되는 사내들이 우르르 달라붙었지만 블랙칸은 가만히 서 있었다.
그들을 지켜보던 김필도는 다시 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건 얼마나 오래됐는지 파악조차 할 수 없는 골동품입니다.”
“그런데 왜 날 주는 거요?”
“골동품이라고 해도 하자가 있는 물건은, 역사적인 가치는 있을지언정 큰돈은 받을 수 없습니다.”
“이게 그렇단 말이오?”
“네.”
“아깝네.”
김필도는 창을 묶은 줄을 풀었다.
그러고는 조립된 부분을 살폈다.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고장 난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샤일록을 보았다.
“저도 처음엔 공자처럼 생각했습니다.”
김필도의 생각을 알아차린 샤일록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참! 난 루시안이오.”
“루, 루시안이면?”
샤일록은 깜짝 놀랐다. 퍼스트 네임만으로도 김필도의 신분을 알아차린 것이었다.
“그림잔데 뭘 놀라쇼.”
“허허허! 그렇군요.”
샤일록은 크게 웃었다.
“이게 고장이라 이거지…….”
김필도는 끝 부분을 가만히 살폈다. 육각형 형태로 구멍이 뚫려 있었다. 날이 달린 부분을 끼우게 돼 있는 구조였다.
김필도는 날이 달려 있는 부분을 들어 올렸다. 예상대로 한쪽은 육각형 형태로 깎여 있다. 김필도는 그 부분을 구멍에 대고 밀어 넣어 보았다. 아무런 저항 없이 쑥 들어갔다.
“조립되는데?”
그는 샤일록을 보았다.
“하지만 무기로는 사용할 수 없죠.”
김필도는 창을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샤일록의 말대로였다. 안으로 들어갔으면 단단하게 고정이 돼야 하는데, 걸리는 게 없다. 손으로 잡아당기자 쑥 뽑혀 나왔다.
“안쪽에 뭔가 걸리는 게 있어야 말인데… 나사가 빠진 건가?”
다시 안으로 집어넣고,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그렇게 하다 보면 걸림쇠 같은 게 튀어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같은 상황만 되풀이됐을 뿐 변화는 없었다.
“진짜 고장이네.”
김필도는 아쉬운 얼굴로 창을 내려놓았다.
바로 그때였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가 창을 내려놓으려고 잡고 있던 위치를 옮겼을 때였다. 우연히도 문양이 있는 부분을 잡았는데, 두 개를 끼워 넣었던 부분에서 희미한 광채가 일렁이더니 철컥! 하는 쇳소리가 흘러나온 것이었다.
“어?”
김필도는 깜짝 놀랐다. 그는 연결 부위를 보았다.
“오 마이 갓!”
그의 입이 쩍 벌어졌다.
분명 한쪽을 끼워 넣었다. 그런데 연결 부위가 보이지 않았다. 처음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이어져 있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샤일록 역시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그는 수백 번도 더 창을 조립해 보았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그렇게 된 적이 없었다.
“낸들 알겠소.”
김필도는 다른 쪽을 밀어 넣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연결이 되지 않았다.
“혹시?”
조금 전 상황을 떠올리며 문양이 있는 부분을 잡고 힘을 주었다. 그러자 연결 부위에서 희미한 광채가 흘러나오더니 쇳소리와 함께 하나로 이어졌다.
“비밀은 이거였군요.”
샤일록은 김필도의 오른손을 보았다.
그 부분에서 희미한 광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김필도는 손을 뗐다.
“그런가 보오.”
김필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광채는 문양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우물 속에 빠져 있던 랜턴이 천천히 떠오르는 것처럼 문양은 점차 선명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완전한 모습이 됐다.
창의 길이는 5미터가량이었다.
“물결무늬군요.”
문양을 바라보던 샤일록이 말했다.
“물결문양이 아니라 바람이오.”
“바람이라고요?”
“그렇소. 왜냐면 이 녀석의 이름이 라콰이기 때문이오.”
“라콰라고요?”
“이건 그림이 아니라 글이오. 바람을 표현한 고대어란 말이오.”
김필도는 창을 들어 올리며 활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