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 김필도-26화 (26/225)

# 26

제1장 김필도 대단한 호위를 얻다

헬만은 전면을 노려보았다.

투구 속 그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고, 길쭉한 눈동자는 실처럼 가늘어졌다. 지독한 모멸감 때문이다.

그의 이야크 창은, 앞은 가늘고 뒤로 갈수록 두껍다. 그리고 창간은 겉보기에는 매끈하지만 자세히 보면 작은 가시들이 촘촘하게 박혔다.

가시는 이야크 창과 수직으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창날 방향으로 비스듬히 누워 있다.

헬만이 가장 선호하는 공격 방법은 조금 전 보여 주었던 그 공격이다. 먼저 이야크 창을 상대의 심장에 찔러 넣고 손을 놓는다. 그런 다음 서로 지나칠 때 등으로 빠져나온 이야크 창을 틀어쥔다.

그럼 두 이야크가 달려가는 속도에 의해 이야크 창은 상대의 심장에서 빠져나온다. 갈수록 두꺼워지고, 날카로운 가시가 달린 이야크 창이 빠져나오면 구멍은 점점 커지며 고통은 가중된다.

그러다가 결국은 죽는다.

심장의 피를 전부 잃은 채 죽어 가는 나약한 존재를 지켜보는 것이 헬만의 취미였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어쭙잖은 기술을 부리는 인간의 심장에 이야크 창을 찔러 넣었다.

그리고 그 이후 과정은 다른 때와 다르지 않았다. 심장이 있는 왼편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고, 녀석은 죽어 가고 있었다.

잔뜩 흥분한 채로 녀석의 숨이 끊어지길 기다렸다.

그런데 느닷없이 나타난 놈이, 아니 가드 맵의 선택을 받은 녀석이 숨이 끊어져야 할 인간을 구해 낸 것이다.

죽일 생각으로 공격을 감행했고, 완벽하게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성과를 얻지 못했다는 건 헬만에게는 지독한 모욕이나 다름없었다.

“죽인다!”

헬만의 몸에서 지독한 살기가 쏟아져 나왔다.

[가드 맵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걸 명심하라.]

문득 머릿속으로 세이아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흥분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빌어먹을!’

마음 같아서는 죽여 버리고 싶다. 하지만 천좌 세이아칸의 말처럼 가드 맵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놈을 죽일 수는 없다. 가드 맵을 지니고 있다면 상관없겠지만 아공간 같은 곳에 넣어 둔 상태라면 큰 문제가 된다.

5백 년 만에 돌아온 가드 맵을 영원히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헬만은 앞에서 달려오는 김필도를 살폈다.

문득 검은 이야크가 상당히 빠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력도 없는 놈이 장비는 좋은 걸 가졌구나.”

투구 속 헬만의 얼굴에 질시의 빛이 어렸다.

“하지만 앞으로 이야크를 타게 될 일은 없을 거다.”

헬만은 자신이 패할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물론 김필도의 이야크가 뛰어나다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이야크는 전사를 이동시키는 이동 수단에 불과할 뿐 승패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헬만은 김필도의 오른편 어깨를 노려보았다.

“가루로 만들어 주겠다.”

두두두두! 두두두두!

프릉!

거리가 가까워진 모양이었다.

빠르게 달려오는 이야크 발굽 소리와 거친 숨소리가 확연히 들려온다.

꽈악!

헬만은 이야크 창을 불끈 틀어쥐었다.

“크아아아!”

헬만은 우렁차게 고함을 내질렀다. 어느새 거리는 50미터로 좁혀졌다.

“각오하라, 천한 놈!”

헬만은 차갑게 소리치며 이야크 창을 앞으로 내밀었다.

슉!

바로 그때였다. 검은색 창이 빠른 속도로 쏘아져 왔다.

이야크 창의 속도는 상당히 빨랐다. 하지만 처음 싸웠던 인간의 창보다 더 약했다. 날카롭지도 못할 뿐 아니라 정교함에서도 다소 떨어졌다.

“천한 놈!”

헬만의 입가에 조소가 어렸다.

“영원히 오른팔을 쓰지 못하게 될 거다!”

헬만은 김필도의 이야크 창을 무시하고 황금색 이야크 창을 쭉 찔러 넣었다. 그의 이야크 창끝에는 황금색 광채가 둥글게 생성돼 있었다. 하지만 그의 이야크 창이 나아가는 속도는 평소보다 느렸고, 샤일록을 상대할 때보다도 훨씬 느렸다.

“걸려들었구나, 초보.”

김필도는 차갑게 말했다.

“응?”

헬만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일부러 지금 상황을 유도했다는 뉘앙스다.

헬만은 이야크 창으로 시선을 모았다. 하지만 검은색 이야크 창은 별반 달라진 게 없다. 아니, 이야크 창을 뻗어 낸 상황에서 다른 변화를 준다는 건 불가능하다.

이미 쏘아진 화살이다.

그건 헬만 또한 마찬가지였다.

펑소 때보다 늦고, 샤일록과 싸울 때보다도 형편없이 늦었지만 변화를 줄 방법은 없었다. 그대로 밀고 들어가는 수밖에.

하지만 한 가지는 할 수 있다.

그것은 이야크 창끝을 주시하는 것이다.

“허억!”

이야크 창끝을 주시하던 헬만의 입에서 헛바람이 새어 나왔다.

막 이야크 창끝이 김필도의 오른편 어깨를 박살내려는 순간 환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전면을 향하고 있던 김필도의 오른편 어깨가 뒤로 물러난 것이었다.

스르릉!

그리고 김필도의 허리춤에서 설풍 뽑히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김필도가 선택한 필승 전략은 지난 한 달여 간 익혀 온 이야크 창이 아니었다. 이야크 창은 페이크에 불과했고, 그가 선택한 승부수는 차원을 이동할 때 가져온 설풍이었다.

슈캉!

설풍을 역수로 틀어쥔 김필도의 왼팔이 권투 선수가 혹을 치듯 강하고 빠르게 호선을 그렸다.

퍼억!

“커억!”

헬만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의 옆구리로 설풍의 날이 파고든 것이었다. 만일 갑옷을 입지 않았더라면 일도에 허리가 잘려 나갔을 정도로 설풍은 강했다.

“치사한 새끼!”

김필도는 도 손잡이를 쥔 손을 힘껏 내뻗었다.

그가 화를 낸 것은 헬만의 공격 방식 때문이었다.

비록 조폭이었지만 죽어 가는 자를 모욕하는 건 김필도의 취향이 아니었다. 그런데 헬만은 승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모욕했다.

차르르릉!

“크아악!”

헬만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야크를 탄 채 달려가는 그의 옆구리에서 피가 폭포처럼 흘러내렸다. 갑옷 때문에 드러나진 않았지만 허리의 절반 이상이 잘려 나간 상황이었다.

“크흠!”

싸움을 지켜보던 세이아칸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팼다.

실은 헬만의 패배보다 김필도가 사용한 수법 때문에 더욱 놀랐다. 그 역시 헬만처럼 김필도가 엉덩이 쪽에 있는 검을 승부수로 던질 줄은 생각지 못했다. 아니, 엉덩이 위쪽에 튀어나와 있는 그것이 검일 거란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다.

“테라함!”

“하명하십시오, 천좌.”

뒤편에서 우람한 덩치 사내가 앞으로 나왔다.

“헬만을 치료해 줘라.”

“알겠습니다.”

“이카나!”

“하명하십시오.”

이번에는 조금 왜소한 자가 이야크를 몰고 나왔다.

“놈을 끌고 와라!”

“알겠습니다.!”

두두두두! 두두두두!

이카나라 하였던 자가 고개를 드는 순간, 동쪽에서 이야크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의 눈이 그쪽을 향했다.

검은 갑옷을 걸치고 거대한 검을 든 자들이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마족이었다.

“천좌!”

이카나는 세이아칸을 보았다.

“기다려라!”

세이아칸은 낮게 말하고는 다가오는 마족들을 바라보았다. 마족의 선두에서 달려오는 자는 마계10군단 부군단장 이카렌이었다.

“오랜만이군, 이카렌.”

“그렇군요, 세이아칸. 그런데 지금 뭐 하고 있는 건지 질문을 드려도 될까요?”

“언제부터 마족이 신족의 일에 관심을 가졌지?”

세이아칸은 이카렌을 쏘아보았다.

그녀는 몸에 찰싹 달라붙은 기갑을 걸치고 있다.

이야크 오른편에는 검은 이야크 창이 놓였고, 왼편에는 대검이 걸려 있다. 대검 손잡이 끝에는 해골 문양이 달려 있다. 가드는 불꽃 형태다.

육중함을 자랑하는 그 검은, 수백 번의 싸움에서 그녀에게 승리를 안겨 주었다는 폭풍의 검 발콘이다.

“난 천족의 일엔 관심 없어요. 나는 물론이고 히데우스 님께서 관심을 갖고 있는 건 가드 맵이에요.”

“가드 맵을 탈취하고 싶은 모양이구나.”

“탈취하겠다는 생각은 없어요.”

“그럼?”

“천족의 손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뿐이에요.”

“우리와 전쟁을 하겠단 말이냐?”

세이아칸은 슬쩍 떠보았다.

“전쟁을 원하면 우리 또한 거절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건방진!”

세이아칸의 몸에서 진득한 살기가 요동쳤다.

스아악!

세이아칸이 흘린 살기는 이내 유형의 힘으로 변하여 주위를 휩쓸었다.

퍽! 퍽퍽!

이야크 아래쪽에 있던 풀들이 갈가리 찢기며 흩날렸다.

“하하하! 에바르본 가문의 급한 성격은 여전하구먼.”

휘이익!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세이아칸이 발산한 살기를 무력화시켰다. 그리고 환상처럼 검은 갑옷을 걸친 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내는 모든 것이 컸다.

키는 2미터 50센티미터에 달했고, 어깨는 하늘을 떠받칠 수 있을 정도로 떡 벌어졌다. 투구를 쓰고 있어 얼굴은 확인할 길은 없지만 투구 사이로 쏟아져 나오는 붉은 광채는 금세라도 주위를 피로 물들일 것처럼 섬뜩하다.

감히 마주 보는 것조차도 용납하지 않을 것 같은 강한 투기를 뿜어내는 이자는 마계10군단 군단장인 히데우스팔콘 세이디오 오테르였다.

“오십니까.”

“어서 오십시오, 군단장님!”

이카렌을 비롯한 마족들은 고개를 숙였다.

“우리가 만난 적이 있던가?”

히데우스는 세이아칸을 보며 물었다.

“오늘 처음 보는 걸로 알고 있소.”

“그렇구먼. 그럼 우리 마계10군단과 대천신군이 싸우게 되면 그 후엔 어떻게 될지 생각해 본 적 있는가?”

“내가 왜 그걸 생각해야 하는지 모르겠소.”

물론 세이아칸은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랬던 그가 부정한 이유는 히데우스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 때문이었다. 그 기운은 천계 제1계급인 신좌들에 필적할 정도로 강했다. 공연히 자존심이 상해 모른 척한 것이다.

“모른 척하는 건가 아니면 정말 모르는 건가? 정말로 모른다면 난 천좌에 대해 실망할지도 모르네.”

“실망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소.”

“난 내게 실망을 안겨 준 자는 상대로 인정하지 않는다네. 상대로 인정하지 않는 자와는 말을 섞지도 않고.”

세이아칸의 얼굴이 굳었다.

말을 섞지 않는다는 것은 곧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우리와 전쟁을 하겠다는 말이오?”

“자네가 약속을 하면 전쟁을 할 일은 없을 거네.”

“어떤 약속 말이오?”

“리모스에 도착할 때까지 가드 맵에 욕심을 내지 않겠다는 약속 말이네.”

“그러니까 저놈들에게 손을 대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란 말이오?”

세이아칸은 왼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김필도와 샤일록은 마족과 천족이 모여 있는 곳을 향해 이야크를 몰아가고 있었다.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샤일록은 불안한 얼굴로 뒤를 흘끔거렸다. 50미터 후미에 있는 톰벨 일행과 함께 있을 걸 공연히 따라왔다는 후회가 물밀듯 밀려왔다.

“지금이라도 돌아가.”

어느새 김필도는 샤일록에게 말을 내리고 있었다. 대불파의 이인자였던 터라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자들에게 말을 내리는 것에는 익숙했다.

“끙! 그럴 순 없습니다.”

“성격 참 특이하네.”

김필도는 빙긋 웃으며 블랙칸을 몰아갔다.

잠시 후 그는 신족과 마족의 중간 지점에 섰다. 두 종족으로부터 10미터 떨어진 지점이었다.

“안녕하쇼!”

김필도는 오른손을 들어 올리며 씨익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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