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 김필도-27화 (27/225)

# 27

“헐!”

히데우스는 황당한 얼굴로 김필도를 보았다.

짧지 않은 세월을 살아왔고 그동안 인간도 적잖이 만났다. 그들 대부분은 처분을 기다리는 죄인처럼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저렇듯 태연하고 능청스러운 인간은 처음이다. 그것도 천족과 마족이 함께 있는 데서.

“난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요.”

김필도는 자신을 먼저 소개했다.

“난 네놈을 부른 적 없다.”

세이아칸은 죽일 듯한 눈빛으로 김필도를 노려보았다.

“그건 나도 알아. 그리고 난 댁이 오란다고 오고 가란다고 가는 그런 사람이 아냐.”

“죽일…….”

세이아칸의 몸에서 진득한 살기가 쏟아져 나왔다. 그 살기는 곧바로 유형으로 변해 김필도를 향해 쏘아져 갔다.

“이걸 없애고 싶으면 알아서 해!”

유형의 기운이 막 블랙칸을 후려치려는 순간, 김필도는 품속에서 종잇장을 꺼내 앞으로 던졌다. 그것은 블랙칸 앞으로 떨어졌다.

“헉!”

세이아칸은 헛바람을 삼키며 황급히 기운을 거둬들였다. 하지만 워낙 창졸간에 일어난 상황이라 미처 다 거둬들이지 못했다.

“차앗!”

슈캉!

번쩍!

바로 그때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검은 광채가 블랙칸 앞에서 폭발했다. 검을 뽑아 세이아칸이 쏘아 낸 유형의 기운을 자른 이는 이카렌이었다.

“쯧! 호들갑은.”

김필도는 피식 웃었다.

휙!

보고 있던 히데우스가 오른손을 쭉 내밀었다. 그러자 바닥에 떨어져 있던 구겨진 종잇장이 히데우스 손 안으로 빨려들어 갔다.

“그걸 펼치면 전쟁이 시작될 거요, 히데우스.”

세이아칸은 날카로운 눈으로 히데우스를 보며 검 손잡이를 잡았다.

“펴 봐도 상관없소.”

김필도는 히데우스를 보며 말했다.

“이건 뭐가?”

“댁들에게 인간을 몬스터 취급할 자격이 과연 있는지 알아보려고 던진 낙서장일 뿐이오.”

“가드 맵이 아니란 말인가?”

히데우스는 황당한 얼굴로 김필도를 보았다.

세이아칸과 이카렌은 구겨진 종잇장이 가드 맵인 줄 알았다. 당연히 세이아칸은 급하게 기운을 거둬들였고, 이카렌은 검으로 세이아칸의 기운을 잘랐다.

그런데 가드 맵이 아니고 낙서장이라고?

“내가 내 몸에서 가드 맵을 떼어 놓는 순간 저 양반에게 죽을 텐데, 내 목숨과 직결되는 그 소중한 걸 버릴 순 없잖소.”

김필도는 세이아칸을 가리켰다.

“잘 아는구나, 놈! 난 네놈이 불필요한 인간이 되는 순간을 기다릴 거다. 그리고 오늘 모욕의 대가를 반드시 받아 내고 말 테다.”

세이아칸은 차갑게 말했다.

“아무튼 댁은 여러 가지 면에서 날 편하게 해 주는 것 같아. 결정을 앞당기게 해 주거든.”

김필도는 싱긋 웃으며 품속에서 다시 종잇장 하나를 꺼냈다.

세이아칸과 히데우스는 긴장한 얼굴로 김필도를 지켜보았다.

“불티나!”

김필도는 낮게 외쳤다.

화르르!

그러자 라이터 불보다 훨씬 큰 불이 그의 손바닥에 생겨났다. 그러고는 들고 있던 종이를 태워 나갔다.

“설마 그걸 가드 맵이라고 할 테냐?”

“풋!”

김필도는 세이아칸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절반 정도 남은 종이를 세이아칸이 볼 수 있도록 넓게 펼쳤다.

“헉!”

세이아칸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김필도가 태우고 있는 그것은 정말 지도였다. 손을 쓰기도 전에 지도는 이미 완전히 타서 재가 되고 말았다.

“딱 한 가지만 말하겠소. 누가 됐든 내 기분을 상하게 하는 놈이 있으면 나는 그 반대쪽 인물들에게 이 속에 들어 있는 내용을 전해 줄 테니까 그렇게 아쇼.”

김필도는 자기 머리를 툭툭 쳤다.

“머, 머릿속에 기억해 두었던 말이냐?”

“그렇소. 그런데 성함이…….”

김필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건넸다.

“난 세이아칸 카셀 디나브 에바르본이다.”

“반갑소, 난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요. 하지만 이름보다는 그림자 대공으로 더 많이 불리고 있소이다.”

김필도는 환하게 웃으며 자기를 소개했다.

‘세상에!’

옆에 있던 샤일록은 경악한 얼굴로 김필도를 보았다. 살다 살다 이렇게 배짱 좋은 사람은 처음이었다.

상대는 인간도 아니고 천족과 마족이다. 그것도 고위 천족과 고위 마족. 특히 마족의 이마에는 은색 뿔이 돋아나 있다. 마계 공작이란 의미다.

마계 공작의 실력은 그랜드 마스터라고 하는 검사 다섯 명이 힘을 합쳐야 평수를 이룰 정도로 강하다고 하였다. 더불어 신족의 세이아칸이란 자도 결코 약자가 아닐 터였다.

그런 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농락하고 있다.

방금 김필도가 태운 지도는 가드 맵이 아니고 자신이 준 지도였다. 즉 가짜 지도로 신계와 마계의 초강자들을 속여 넘긴 것이다.

너무 놀라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놀라움은 시작에 불과했다.

“호위를 좀 붙여 주시오.”

김필도는 히데우스를 보며 말했다.

“호위?”

“다르곤 산에서 리모스까지는 두 달가량 걸리잖소. 공연히 몬스터 때문에 개죽음당하긴 싫어서 말이오.”

“내가 보기엔 자네 실력도 만만치 않은 것 같은데?”

히데우스는 김필도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했다.

육감은, 세상을 바꾸는 거대한 뭔가가 있다고 하는데 겉으로 드러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말로 표현도 안 되고, 머릿속으로 정리도 안 된다.

그냥 뭔가 엄청난 걸 가지고 있는 자라는 어렴풋한 느낌만 있을 뿐.

이럴 땐 옆에서 관찰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부군단장!”

히데우스는 이카렌을 불렀다.

“말씀하십시오.”

“지금부터 리모스로 들어갈 때까지 저 인간 호위를 맡아라.”

“알겠습니다, 군단장님!”

이카렌은 가슴에 손을 얹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런 다음 이야크를 몰아 김필도 옆으로 다가왔다.

“라이자칸!”

세이아칸은 우렁차게 소리쳤다.

“부르셨습니까?”

그러자 세이아칸 머리 위쪽의 공간이 열리더니 라이자칸의 얼굴이 나타났다.

“당장 이쪽으로 와라.”

“알겠습니다, 천좌!”

고개를 숙인 라이자칸은 이야크에 올랐다.

그리고 잠시 후 세이아칸 옆으로 검은 통로가 생겨나고 이야크를 탄 라이자칸이 밖으로 나왔다.

“저게 빛의 마법?”

김필도는 이카렌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름만 다를 뿐 인간의 워프 마법과 비슷해.”

“마족의 암흑 마법에도 저런 마법이 있겠지?”

“당연히 있지.”

“부럽네.”

“풋!”

“무슨 의미지?”

김필도는 전면을 바라보았다. 방금 허공에서 나온 라이자칸이란 자와 세이아칸은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넌 빛의 마법이나 암흑 마법보다 더 강한 입을 가지고 있잖아.”

“정말 그렇게 생각해?”

“내가 알기론 마족과 천족 고위급을 농락한 최초의 인간이 너야.”

“그거 칭찬?”

“알아서 해석해.”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내가 아는 거라면 대답해 줄게.”

“이번 일이 끝나고 난 후 내가 살아남을 확률이 몇 퍼센트나 될까?”

“아마 이곳에 있는 천족이나 마족들 중 널 살려 주고 싶어하는 사람은 두 명밖에 없을걸?”

“그 두 명에 너도 들어가?”

“아마도.”

“그럼 난 훌륭한 호위를 둔 셈이네?”

“널 죽이지 않겠다는 것일 뿐인데?”

이카렌은 김필도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죽이지 않겠다는 건 구해 주겠다는 말 아냐?”

“잘못 알아들었어!”

“아니라고?”

“우리 마족의 머릿속엔 누군가를 구해 준다는 개념은 없어. 최고의 호위가 죽이지 않는 거야.”

“그럼 내가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한다고 해도 지켜보기만 하겠네.”

“그렇진 않아.”

“당연히 그래야지. 그동안 쌓은 정이…….”

“싸움이 끝나면 정중하게 묻어 주는 것까지는 해 줄 거야.”

“매정한 것 같으니라고.”

김필도는 이카렌을 흘겨보았다.

“우린 그렇게 생겨먹은 종족이야.”

“네가 날 구하게 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지?”

“날 이겨 종으로 거느리면 돼.”

“널 이길 정도의 실력자면 저런 허섭스레기들에게 당할 이유가 없잖아.”

“그런가?”

이카렌은 싱긋 웃었다.

“함께 자도 안 될까?”

“그러니까 목숨을 구하려고 몸을 판다는 거야?”

“모, 몸을 팔아?”

“아냐?”

“됐네.”

김필도는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미친 곳에는 황금 갑옷을 걸친 노인이 이야크를 타고 있었다. 노인은 다름 아닌 라이자칸이었다.

“난 라이자칸 데탄 일리아드 소르본느고 대천신군 부군장이다.”

시선이 마주치자 라이자칸은 자신을 소개했다.

“반갑소, 난 루시안이오.”

김필도는 짧게 자신을 소개했다.

“그럼 리모스에서 보세.”

히데우스는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부하들과 함께 자리를 떴다.

“그곳에서 뵙겠소.”

김필도는 손을 흔들었다.

“그때까지 반드시 살아 있어라,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

이번엔 세이아칸이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

“그건 내가 아니라 당신 부하에게 말해야 하지 않소. 날 잘 지키라고 말이오. 아무튼 잘 가시오.”

김필도는 싱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가자!”

“이럇!”

“타앗!”

곧 우렁찬 외침과 함께 세이아칸 일행이 벌판을 가로질러 갔다.

“천천히 쫓아오겠지?”

김필도는 이카렌을 보며 물었다.

“아마도. 클로스(Closed)!”

고개를 끄덕인 이카렌은 낮게 외쳤다.

철컥! 철컥! 철컥!

이카렌의 몸에서 쇳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검은 기운이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그 검은 안개는 이카렌의 가슴으로 모여들더니 흡수되듯 몸 안으로 빨려들어 갔다.

이윽고 검은 안개가 사라지자 간편한 복장을 한 이카렌의 모습이 나타났다. 전투기갑이 제거된 것이다.

김필도는 이카렌의 가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크레디온?”

뒤쪽에서 신음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필도는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다가온 듯 톰벨이 놀란 얼굴로 이카렌을 바라보고 있었다.

톰벨의 얼굴엔 부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크레디온은 전투마갑이라고 불리는 마족의 전투기갑이었던 것이다.

“이름은 같지만 고대에 만들어진 크레디온이 아니다.”

이카렌은 차갑게 말했다.

“그럼 2세대 크레디온?”

“그렇다. 그런데 넌 전투기갑에 대해 관심이 많은 모양이구나.”

“많을 뿐 아니라 가능하다면 크레디온이나 세이기온 둘 중 하나를 얻어 갈 생각이오.”

“그 실력에 전투마갑이나 전투천갑까지 착용하면 단두 드래곤과 비슷한 수준까진 오를 것 같은데, 드래곤에게 원수라도 졌느냐?”

이카렌은 대번에 톰벨이 그랜드 마스터에 오른 실력자란 사실을 알아차렸다.

“나는 내가 도둑맞은 걸 찾고 싶을 뿐, 드래곤과 싸울 생각은 없소이다. 참! 난 톰벨이오. 그리고 이 아인 내 딸 아델리나고 이 친군 내 호위 렉스턴이오.”

톰벨은 아델리나와 렉스턴을 소개했다.

이어 김필도는 샤일록을 소개시켜 주었다.

“어떻게 할 거야?”

김필도는 샤일록을 보며 물었다.

함께 갈 건지, 아니면 이곳에서 헤어질 건지 그걸 묻는 말이었다.

“전 함께 가고 싶습니다.”

“나야 엮여서 빠져나가고 싶어도 방법이 없지만 샤일록은 굳이 따라갈 필요 없잖아.”

“대공도 가드 맵을 넘겨 버렸으면 됐을 것 아닙니까?”

“내가 제일 존경하는 형님이 물려주신 건데 아무에게나 줄 순 없잖아.”

“하긴 그렇네요. 아무튼 저도 함께 가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검을 잡겠습니다.”

“알아서 해.”

상관도 아니고 주인도 아니다. 본인이 가겠다는데 가지 말라고 할 수도 없었다.

“감사합니다, 대공.”

샤일록은 팔도 일행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돌아왔다.

“일단 안전 가옥으로 돌아가 있으라고 했습니다.”

김필도가 바라보자 샤일록이 말했다.

“안전 가옥도 있어?”

“몬스터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든 가옥이 몇 군데 있습니다.”

“흐음, 그래? 아무튼 가자고.”

김필도는 블랙칸을 몰고 앞으로 나갔다. 이어 다른 이들 또한 이야크를 출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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