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 김필도-28화 (28/225)

# 28

제2장 최고의 스승은

대륙에는 총 세 개의 달이 뜬다.

1월부터 2월까지는 블루 문이 뜨고 3월부터 4월까지는 다크 문이 뜬다. 5월부터 6월까지는 레드 문이 뜨고 7월부터 12월까지는 세 개의 달이 한꺼번에 뜬다.

계절 또한 달에 따라 달라진다.

블루 문이 뜨는 달은 겨울, 다크 문이 뜨는 달은 봄, 레드 문이 뜨는 달은 여름이고 세 개의 달이 한꺼번에 뜨는 시기는 카오스, 즉 혼돈의 계절이라고 부른다.

무려 6개월 동안 계속되는 혼돈의 계절에는 혼란이 극에 달한다. 며칠 새 수십 미터의 눈이 쌓이기도 하고, 숨이 턱턱 막힐 정도의 폭염이 몰아치기도 한다.

낮은 40도가 오르내리고, 밤에는 영하 20도까지 떨어지는 날씨가 여름이었으니 무슨 말이 필요할까.

김필도 일행이 고대의 길 시작점인 다르곤 산에 도착했을 때는 세 개의 달이 나란히 떠오르기 시작한 혼돈의 계절 초입이었다.

김필도, 샤일록, 이카렌, 라이자칸, 톰벨, 아델리나, 렉스턴, 7명은 널따란 벌판과 마주했다.

“여…기가 고대의 길 시작점이라고?”

이카렌은 김필도를 돌아보았다.

“가드 맵에 나와 있는 곳이야.”

김필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끙!”

이카렌은 얼굴을 찌푸렸다.

“왜 그러십니까?”

오른편에서 벌판을 바라보던 톰벨이 물었다.

기둥처럼 보이는 것들이 우뚝우뚝 솟아 있는 벌판은 마치 고대의 무덤 같아 보이긴 하지만 별다른 위험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카렌의 얼굴은 적잖이 심각해 보였다.

“여긴 신성의 장소라고 부르는 곳이다.”

“신성의 장소면 공동묘지 아닌가요?”

“잘 아는구나.”

“그런데 왜?”

“인간이나 천족도 마찬가지겠지만 우리 마족도 무덤 속에 부장품을 넣는 풍습이 있다. 평군 마족의 무덤엔 일상 용품을 집어넣지만 고위 마족의 무덤엔 희귀한 보물은 물론이고 어떤 경우엔 마법이 심어져 있는 물건까지 집어넣기도 한다.”

“도굴꾼들로부터 그 부장품들을 지킬 가디언이 필요했다는 말처럼 들리네?”

듣고 있던 김필도가 끼어들었다.

“응. 그들은 자기 무덤을 지킬 가디언이 필요했어. 그래서 영생을 사는 가디언을 만들어 저곳에 배치했어. 우린 그 가디언을 고스트 크레디온이라고 불러.”

“크레디온이면 전투마갑의 이름 아냐?”

“맞아.”

이카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있는 것과 달라?”

김필도는 이카렌의 가슴을 가리켰다.

“내가 가진 크레디온은 고대의 갑옷을 기초로 해서 새로 만든 거야.”

“성능은 어떤 게 더 나은데?”

“비교해 본 적이 없어서 몰라.”

이카렌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데 그 크레디온이라는 거 나도 착용할 수 있는 거야?”

“고대 갑옷이라면 가능하겠지만 현재 우리가 착용하는 전투마갑은 불가능해.”

“왜?”

“마족의 피에만 반응하도록 만들어졌거든.”

“그럼 천족의 갑옷인 세이기온도 마찬가지겠네?”

김필도는 라이자칸을 돌아보았다. 이카렌과 달리 라이자칸은 여전히 갑옷을 걸치고 있다. 몇 번이고 갑옷을 벗는 게 어떠냐고 했지만 라이자칸은 신청도 하지 않았다. 아주 고집스러운 소를 보고 있는 듯하다. 그것도 늙은 소.

“아마 그럴걸?”

“이카렌 말이 맞네.”

라이자칸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그리 말이 없어요?”

김필도가 물었다.

“말이 없는 게 아니라 딱히 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닫고 있을 뿐이네.”

“사교적이지 못한 성격이란 말이죠?”

“난 그렇게 생각해 본 적 없네.”

“사람이 모인 자리에 5분 이상 머물질 못하죠?”

“난 늘 바쁘게 살아왔네.”

“책을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죠?”

“책을 아주 좋아하네.”

“왜 함께 어울려서 술을 마시고 시끄럽게 떠드는지 이해가 가지 않죠?”

“난 술을 좋아하지 않네.”

“비 오는 날 찻잔 위로 피어오르는 김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지며 편안한 느낌이 들죠?”

“안 그런 이도 있는가?”

“얘요.”

김필도는 손가락으로 이카렌을 가리켰다.

“이카렌 부군단장이 몇 살인 줄 아는가?”

“맞다, 이름은 아는데 나이는 아직 모르네. 몇 살이야?”

김필도는 이카렌을 보며 물었다.

“실망할걸?”

“왜?”

“인간의 기준으로 보면 난 꼬부랑 할머니거든.”

“몇 살인데?”

“505살.”

“……!”

김필도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놀라는 것 같지 않네?”

“간혹 실감이 나지 않을 때가 있거든.”

“무슨 실감?”

“내가 문 대륙에 와 있다는 것. 드래곤을 만나고, 마족을 만나고, 천족을 만나고 있다는 것, 이야크를 타고, 커다란 창을 들고 있다는 그런 사실들 말이야.”

“그게 내 나이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지?”

“네 나이하곤 상관없어. 다만 새로운 세상에 적응하는 게 쉽지 않다는 거지. 그리고 우린 505살 먹은 사람은 꼬부랑 할머니라고 부르지 않아.”

“그럼 뭐라고 부르는데?”

“머미(Mummy).”

“그럼 라이자칸은 뭐라고 불러야 하는데?”

“라이자칸은 왜?”

“4천 살이 넘었거든.”

4천 살이 넘었다는 말에 김필도는 라이자칸을 돌아보았다.

“4,100살이네.”

“휴우!”

김필도는 고개를 흔들었다.

4,100살. 감히 상상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세월이다. 지구로 따지면 BC2000년 전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 이카렌을 보았다.

“왜?”

“이-, 해 봐.”

김필도는 윗니와 아랫니를 붙이고 입술을 벌렸다.

“이는 왜?”

“인간은 보통 60년 정도면 옥수수가 작살나거든.”

“옥수수, 작살?”

“옥수수는 이를 말하고, 작살은 못쓰게 된다는 뜻이야.”

“너 대공 맞아?”

“그림자라고 했잖아. 아무튼 벌려 봐.”

“아무리 마족이지만 난 여자야, 인마.”

“알몸까지 봤는데 이 좀 보여 주는 게 뭐 대수라고 그래. 벌려 보라니까!”

“이상 없다니까 그러네. 자!”

이카렌은 입을 쩍 벌렸다. 그녀의 말처럼 이는 깨끗했다.

“하긴 5백 살 먹은 여자 몸매가 그렇게 탱글탱글한데 이라고 고장 날까. 그런 그렇고 저길 어떻게 빠져나가지?”

김필도는 벌판을 가리켰다. 좌우 폭이 3백에서 4백 미터 정도 돼 보이는 절벽이 가로막고 있어 돌아갈 곳도 없었다.

“우선은 어떤 곳인지 시험해 봐야지.”

이카렌이 말했다.

“내가 가보겠네.”

이카렌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라이자칸은 이야크에서 몸을 날려 벌판으로 쏘아져 갔다.

이카렌은 긴장한 얼굴로 벌판을 지켜보았다. 김필도 역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들이 있는 곳은 바위 사이였다.

문 대륙의 다른 사물처럼 바위도 엄청나게 컸다. 높이는 30미터에 달하고, 땅속에 묻힌 부분의 둘레는, 눈에 보이는 쪽만 해도 10미터가 넘는다.

김필도는 이야크를 몰아 바위 옆으로 갔다.

문득 30미터에 달하는 이 바위가 무덤을 지키는 토템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위 아래쪽에는 동굴처럼 널찍한 공간이 마련돼 있었다.

김필도는 블랙칸에서 내려 그곳으로 들어갔다.

어떻게 보면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것 같고 또 어떻게 보면 인공이 가미된 것도 같았다.

마침 햇빛이 동굴 안으로 비춰 들었다. 햇빛은 반대편에 서 있는 바위에 가려 전체를 밝히지 못하고 왼편 아래쪽 가로세로 30센티미터 부근까지만 미쳤다.

“자연적으로 만들어졌든 인공이 가미됐든 누군가 머물렀던 건 맞네.”

김필도는 햇빛이 비추는 곳을 보며 말했다. 그 반대편으로 그림자가 생겨났는데 그림자는 복잡한 문양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엉?”

김필도는 깜짝 놀랐다.

햇빛이 비춘 건 잠시잠깐이었고, 문양 또한 금세 사라졌다. 그런데 그 복잡한 문양이 머릿속에 고스란히 저장된 것이다.

“아무래도 차원을 이동하다가 천재가 된 모양이네.”

김필도는 그냥 웃고 말았다.

그때만 해도 김필도는 그가 얻은 복잡한 도형이 한 가문의 안배였다는 걸 꿈에도 알지 못했다. 아울러 그가 가진 이야크 창 라콰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도.

“나왔다!”

그때 이카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른 동굴을 나온 김필도는 블랙칸 위로 올라가 벌판을 바라보았다.

라이자칸은 1백여 미터 정도 진입해 들어간 상황이었다. 벌판의 길이가 약 2킬로미터이니까 입구라고 할 수 있는 지점이었다.

그런데 라이자칸 앞에 검은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쓴 자 20명이 진을 치고 있었다.

“크레디온!”

톰벨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그가 꿈에서도 얻고자 했던 전투마갑.

전투천갑인 세이기온은 간혹 발견되었고, 얻을 기회도 있었다. 하지만 그에겐 맞지 않았다. 빛의 기운보다는 어둠의 기운이 충만한 마나를 축적한 그에게는 세이기온은 오히려 독과 같았다.

그때 톰벨은 자신이 입을 수 있는 갑옷이 전투마갑인 크레디온과 전투전갑인 프라이온, 전투평갑인 페라시온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크레디온은 마족의 전투기갑이고 프라이온은 인간과 엘프 드워프가 공동으로 착용했던 전투기갑이며 페라시온은 현재 대륙에서 인간들이 사용하는 전투기갑이다.

그리고 신기라고 불리는 헤를리온이라는 전투기갑이 있기는 한데 그건 지금껏 얻었다는 사람도 없고 봤다는 사람도 없는 전설의 무구다.

애초에 헤를리온은 얻을 생각도 없었다.

그가 원하는 건 단 하나, 크레디온이었다. 그런데 그 크레디온이 신성의 장소에 널렸다.

“타앗!”

쿠아아앙!

라이자칸은 역시 강했다. 둔탁한 소성과 함께 검은 동체 하나가 10여 미터를 날아가더니 거칠게 나뒹굴었다.

“휘유! 엄청나네.”

김필도는 저도 모르게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나뒹굴었던 녀석이 언제 그랬냐는 듯 벌떡 일어나더니 라이자칸을 향해 쏘아져 간다.

“요홉!”

라이자칸의 기합이 커졌다. 조금 전 공격이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못했다는 사실에 기분이 상한 모양이었다.

파앗!

검을 번쩍 들어 올린 순간 그의 전신으로부터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강한 광채가 쏟아져 나왔다.

콰앙!

라이자칸의 동체가 무서운 속도로 이동했다.

얼마나 빠른지 그의 움직임은 육안으로 확인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콰앙! 콰앙! 콰앙! 콰앙!

새하얀 빛 무리가 폭발할 때마다 고스트 크레디온들은 뒤로 나가떨어졌다.

“으음!”

라이자칸을 지켜보던 이카렌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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