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
겉보기엔 라이자칸의 승리다. 하지만 조금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공연히 힘만 쓴 꼴이라는 걸 금세 알 수 있다. 나가떨어지기는 했지만 몸통이 잘려 나간 고스트 크레디온은 한 객체도 없었다.
전력을 다했는지 그것까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상당히 강한 공격을 하고도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는 건 고스트 크레디온을 없애는 게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다.
“불사의 몬스터네.”
김필도는 블랙칸에서 내렸다.
그러자 샤일록 또한 얼른 이야크에서 내려 김필도를 따랐다.
“저런 자들과 싸울 생각을 하다니 이야크 벌판에서는 제가 잠시 돌았나 봅니다.”
샤일록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래도 좋은 경험 했잖아.”
김필도는 피식 웃으며 주위에 흩어져 있는 나무를 주워들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한 겁니까?”
샤일록도 나무 조각을 주우며 물었다.
“무슨 생각?”
“이야크 창이 아닌 검으로 상대할 생각 말입니다.”
“창술을 배운 지 한 달밖에 안 되는 놈이 산전수전 다 겪은 자를 상대로 창을 들이댄다는 건 자살하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짓이잖아.”
“그래서 이야크 창은 페이크로만 사용하고 검으로 승부를 걸었단 말이군요.”
“내게 가드 맵이 있는 이상 날 죽이지 못할 거라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
“오른 어깨를 공격해 올 걸 알았단 말씀입니까?”
“이야크에 앉은 상태니까 하체는 어차피 공격이 불가능하고, 가슴이나 배를 공격하면 죽기 쉽고, 그럼 남은 건 오른편이나 왼편 어깨밖에 없는데, 인간을 벌레 취급할 정도로 무시하는 놈이라면 무조건 오른편 어깨를 노리게 돼 있어.”
“그럴 만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오른손잡이인 사람에게서 갑자기 그 팔이 사라지면 어떻게 될 것 같아?”
“비참한 상태로 만들려고 한다는 거군요.”
“맞아. 그리고 이야크 창두가 향할 방향을 알면 피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냐.”
“그랬군요.”
샤일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엔 놀라움이 가득했다. 그는 설마 김필도가 그런 것까지 염두에 두고 싸움을 시작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참! 전에 내가 준 술 있잖아?”
“신의 눈물 말입니까?”
“그거 진짜야.”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 술은 짝퉁이 아니라 신의 시대 때 만들어진 술이라고.”
“…오픈!”
샤일록은 바로 아공간을 열었다. 그러고는 김필도로부터 받은 술병을 꺼냈다. 빈 술병을 아공간에 따로 보관한 것은 워낙 정교하게 만들어진 술병을 그냥 버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수십 년 전에 만들어진 복제품이 아닌 수백 년의 세월이 느껴졌다.
수백 년 전에 만들어지고, 진짜 못지않게 정교하다면 상당한 금액을 받을 수가 있다.
“그런데… 응?”
샤일록은 술병의 문양을 자세히 살폈다.
얼마쯤 들여다보았을까. 비로소 안쪽에 또 다른 물체, 신의 물방울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와락!
샤일록은 김필도의 멱살을 잡았다.
“왜 그래?”
“왜 말하지 않은 겁니까?”
김필도의 멱살을 틀어쥔 손이 부들부들 떨었다.
술이 가득 들어 있는 신의 눈물 진품은 가격 산정이 불가능할 정도로 엄청난 보물이다. 그런 보물을 아무 생각 없이 아주 좋은 술이라면서 꿀꺽꿀꺽 마셔 버리다니.
“태어나서 신의 눈물 진품을 마셔 본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어. 술은 잊어버리고 그거나 관리 잘해.”
김필도는 빙그레 웃었다.
“아무튼 대공 전하는…….”
샤일록은 멱살을 잡은 손을 스르륵 풀었다.
그러고는 신의 눈물 병을 소중하게 싸서는 다시 아공간 안으로 집어넣었다.
장작을 챙긴 두 사람은 일행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김필도는 조금 전 봐 두었던 작은 동굴로 들어가 아공간에서 삼각대와 주전자를 꺼냈다.
김필도가 차를 준비하는 사이에 샤일록은 돌을 주워 와 둥글게 쌓아 화덕을 만들었다.
김필도와 샤일록이 차를 준비하는 사이, 이카렌 일행이 안으로 들어왔다. 맨 마지막에 들어온 라이자칸 얼굴엔 낭패한 기색이 역력했다.
“불티나!”
김필도는 손을 펴고는 외쳤다.
파앗!
그러자 그의 손바닥 한가운데 촛불처럼 작은 불꽃 하나가 생겨났다.
“……?”
“……!”
모든 눈이 김필도의 손바닥으로 쏠렸다.
불을 피우는 많은 마법을 봐 왔지만 저런 불은 처음이야 하는 얼굴들이었다.
불꽃은 촛불 대여섯 개를 합쳐 놓은 크기이고 그다지 뜨겁다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뭐야?”
이카렌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토치!”
김필도는 불쏘시개에 불을 가져다 대고 내심 라콰라고 외쳤다. 그러자 그의 손바닥 가운데에 아주 작은 마법진이 생겨났다. 그리고 불꽃이 쉬익 소리와 함께 쭉 늘어났다.
실전 마법의 응용이었다.
불꽃이 너무 약해 나무에 불이 잘 붙지 않자, 캠핑 장비인 토치가 문득 떠올랐다. 그래서 바람의 속성 마법인 라콰를 가미하자 화력이 세졌다.
재미있는 건, 파이어 볼 마법을 펼쳐 만든 불티나 불꽃은 아무리 강한 바람이 불어도 꺼지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불길은 금세 올라왔다.
불길이 커지자 주전자에 물을 붓고 석쇠 위로 올렸다.
어두워지려는 듯 슬슬 추위가 밀려오고 있었다.
물이 끓는 사이에 김필도는 카판을 준비했다. 카판은 로스팅을 해서 짙은 갈색을 띠었다.
손으로 가는 기계를 꺼내 카판을 갈았다.
그런 김필도를 이카렌은 관심 어린 얼굴로 지켜보았다.
카판이 전부 갈려진 순간 마침 물이 끓었다.
커다란 또호야 나뭇잎으로 깔때기를 만들고 간 카판을 넣고 물을 부었다.
“와우!”
김필도는 탄성을 질렀다.
물을 붓자마자 진한 커피 향이 피어올랐다. 커피 향은 완벽에 가까웠다.
커피가 다 내려지길 기다렸다가 컵에 따르고 설탕을 넣고 숟가락으로 저었다.
“자.”
김필도가 가장 먼저 카판을 건넨 사람은 샤일록이었다.
“왜 절 주십니까?”
“내가 지금 샤일록에게 주는 건 카판이 아니고 사업 아이템이야.”
“사업 아이템이라고요?”
“카판에 들어간 설탕의 양은 본인 취향에 따라 조절이 가능해.”
“그러니까 대공 전하 말씀은…….”
“일단 마셔 보고 말하자고.”
“아, 알겠습니다.”
샤일록은 카판을 한 모금 마셨다.
“정말!”
샤일록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설마 카판에 이렇게 깊고 그윽하고 독특한 맛이 숨어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지금까지 마셔 왔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맛이었다.
그 사이에 김필도는 카판을 따라 다른 이들에게도 한 잔씩 나눠 주었다. 그들의 반응 또한 샤일록과 다르지 않았다. 일행은 놀란 눈으로 김필도를 보았다.
“어때?”
김필도는 이카렌을 보았다.
“대단해. 어떻게 만든 거지?”
“그건 비밀이야. 아델리나는 어때요?”
이번엔 아델리나를 보았다.
“이거 잘못하면 중독될 거 같아요.”
전에도 자주 마시긴 했지만 지금처럼 깊지 않았다. 거의 머릿속으로 파고드는 맛이었다.
“샤일록은 나 좀 봐.”
김필도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어떻게 한 겁니까?”
따라 나온 샤일록은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돈 냄새를 맡은 듯 샤일록의 얼굴은 잔뜩 상기돼 있었다.
“오픈(Open)!”
김필도는 아공간을 열어 쇠망 두 개를 마주 붙인 듯한 기구를 꺼냈다.
“이거란 말입니까?”
“이걸로 볶았어.”
“볶았다고요?”
“실험해 보진 않았지만 볶는 방법에 따라 여러 가지 맛이 나올 것 같아.”
“연하게 볶으면 연한 카판이 나온다는 말이군요.”
“그럴 거야.”
“카판을 볶아서 팔면 떼돈을 벌겠군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
샤일록을 바라보는 김필도의 얼굴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물론 사업 아이템은 많습니다. 하지만 지금 제가 가진 자본으로는 어림없습니다. 전국에서 재배되는 카판을 사들이는 것만 해도 빠듯한데 그것들을 볶고 판매망까지 만들기 위해서는 다른 자본을 끌어들여야 합니다.”
“그럴 순 없지.”
김필도는 다시 아공간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가 꺼내 놓은 것은 신의 눈물 50병이었다.
“이, 이게 다 뭡니까?”
샤일록은 경악한 얼굴로 신의 눈물을 보았다.
그것들은 전부 뚜껑도 따지 않은 것들이었다. 신의 눈물 진품 50병.
“내 투자액이야.”
“그러니까 이걸로 카판을 사들이고, 판매망을 만들라는 말씀이십니까?”
“그 정도로는 안 돼. 대륙으로 돌아가서 샤일록이 할 일은 카판을 문화로 만드는 거야.”
“문화라고요?”
“고급스런 술집이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카판을 파는 카판숍에서 카판을 마시며 책을 보고 대화를 나누는 거야.”
“카판숍을 오픈하라는 겁니까?”
“카판숍 자체가 카판 판매망이 되고 판매처가 되는 거야.”
“카판을 문화로 만들려면 카판숍은 물론이고 카판을 마시는 잔도 최고급이어야겠군요.”
“설탕을 뜨는 스푼까지도 최고급을 써야 해. 단순히 카판을 판다는 생각을 하면 백이면 백 망해. 카판이 아닌 카판 문화를 판다는 생각으로 접근해야 해. 무슨 말인지 알겠지?”
“카판 문화라면?”
“카판을 마시는 법, 잔을 쥐는 법, 카판 스푼을 놓는 법 등 카판을 마시면서 지켜야 할 에티켓 같은 것들을 만들어 내면 돼. 그럴싸한 설명을 덧붙이고, 상류사회의 놀이 문화처럼 만들어 주면 금세 퍼져 나갈 거야.”
“존경합니다, 대공 전하.”
샤일록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
장사에 있어서는 누구 못지않게 많은 연구를 했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방금 들은 것들과 비교하면 지금껏 한 것은 수박 겉핥기에 불과했다. 장사에 새로운 눈을 뜬 기분이었다.
“이거 집어넣어.”
“넵.”
샤일록은 아공간을 열고 신의 눈물을 안으로 집어넣었다.
“아직도 리모스에 가고 싶어?”
“아닙니다, 대공 전하. 내일 돌아가겠습니다.”
샤일록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사실 그가 리모스로 가려고 했던 건 검사의 욕심도 있었지만 어쩌면 보물을 얻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곳으로 가기도 전에 보물뿐 아니라 엄청난 사업 아이템까지 얻었다.
더 이상 모험을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샤일록은 물끄러미 김필도를 보았다.
“뭘 믿고 그런 걸 주느냐고?”
“네.”
이야크 평원에서 처음 만났고, 환창을 전수해 주긴 했지만 아직은 수억 골드를 선뜻 맡길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니지 않은가.
“신의 눈물을 내게 준 분도 아무런 조건을 달지 않았어. 작은 부탁을 하나 하긴 했는데 그건 들어주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하더군.”
“그럼 그분 때문에 절 도와주시는 겁니까?”
“그럴 리가 없다는 건 샤일록도 알잖아.”
“그럼?”
“샤일록 같은 사람은 아무리 돈이 많아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투자를 한 거야.”
“사업을 할 수밖에 없는 팔자란 말씀이십니까?”
“아냐?”
“하하하!”
샤일록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오늘은 쉬고 내일 떠나도록 해.”
“알겠습니다, 대공 전하.”
샤일록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은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대공이라며?”
김필도가 자리에 앉자 이카렌이 불쑥 말을 건네 왔다.
“무슨 소리야?”
“둘이 사업 이야기 한 거 아니었어?”
“그게 들렸어?”
“마족은 원래 귀가 좀 밝아.”
“천족도 그래요?”
“마족보다 더 귀가 밝은 종족이 신족이네.”
라이자칸은 빙그레 웃으며 김필도를 빤히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