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 김필도-30화 (30/225)

# 30

그림자 대공이라고 해도 신분으로만 따지면 황제 다음이다.

물론 별의별 황족들이 있긴 하지만 큰 틀에서 보면 황제, 대공, 공작 등의 순으로 이어진다.

그런 녀석이 장작을 주워 오고 불을 피우고 카판을 갈고 내리는 등, 남작만 돼도 하지 않는 일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척척 해 낸다. 더구나 조금의 어색함도 느껴지지 않는다. 자연스럽다는 건 익숙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젠 샤일록이란 자를 붙잡고 사업 이야기까지 한다. 여러 번 놀라게 하는 녀석이었다.

“전에는 발탄 제국 황실에서 주는 공짜 밥을 얻어먹었는데 지금은 그것도 아깝다고 죽이려 하잖아요. 이제부턴 내가 벌어서 사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잖아요.”

“그래서 사업을 한다?”

“대공 작위를 가진 자는 직접 사업을 할 수가 없어요. 얼마 안 가 귀족의 품위를 떨어뜨렸다면서 공격을 받게 되죠.”

“그러면 돈도 없고, 친한 친구도 없고, 황실의 지원도 없는 고위 귀족은 죽어야겠구먼.”

“천족이나 마족은 그렇지 않나요?”

“하긴…….”

라이자칸은 어색하게 웃었다.

사는 건 어디나 같다. 인간보다 수십 배 더 오래 사는 천족이나 마족도 마찬가지다. 사는 건 전부가 거기서 거기다.

“그런데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아요?”

김필도는 화제를 돌렸다.

“놈들은 말 그대로 불사신이네. 없애고 가는 방법은 없네.”

“그럼 허점을 찾아 낼 때까지 이곳에 머물러야 하겠군요.”

“자네가 사업 이야기를 할 때 그렇게 결론을 내렸네.”

라이자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단 식사부터 하죠.”

김필도는 샤일록과 함께 식사 준비를 했다.

늘 그래 왔듯 김필도는 음식 일부를 덜어 가지고 나가 주위 어딘가에 놓고 1시간 정도 지나면 다시 그릇을 회수했다. 그런 그를 이상하게 생각하긴 했지만 아무도 묻지 않았다.

식사를 마친 일행은 모닥불 당번을 정하고 잠을 청했다.

김필도는 마지막 순서였다. 식사 당번을 대부분 그가 맡고 있어 일부러 아침을 준비하는 시간에 넣은 것이다.

김필도가 잠에서 깬 것은 새벽 4시경이었다.

가장 먼저 불을 살폈다. 앞서 불침번을 선 이카렌이 나무를 집어넣은 듯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자!”

뻐근한 몸을 풀려고 목 운동을 하는데 이카렌이 잔을 내밀었다.

“카판?”

“응.”

“고마워.”

김필도는 카판을 호호 불어가며 마셨다.

상당한 양의 카페인이 든 듯 두어 모금 마셨는데 정신이 맑아진다.

“그럼 자!”

그는 카판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고해.”

이카렌은 김필도가 빠져나온 이불 속으로 몸을 뉘었다.

밖으로 나온 김필도는 블랙칸 옆에 끼워 두었던 라콰를 조립해서는 신성의 장소로 향했다.

신성의 장소 입구에 선 그는 로브를 벗어 한편에 놓았다. 하의는 이곳에서 만든 바지를 입었고, 상의는 드레스 셔츠와 비슷한 셔츠 위에 방탄조끼를 걸친 채다.

김필도는 그것마저 벗어 로브 위에 놓았다. 그런 다음 창을 세워 들고 심호흡을 했다.

한동안 벌판을 바라보다가 신성의 장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최고의 스승은 실전이지. 실전 마법을 익힌 내겐 더더욱…….”

나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3장 고스트 킹

“웃겨, 증말.”

김필도가 벗어 놓은 옷 옆에서 어이없다는 듯한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황당한 얼굴로 벌판을 바라보는 이는 이카렌이었다.

저녁때 마신 두 잔의 카판 때문인 듯 쉽게 잠이 들지 못했다. 그렇게 얼마쯤 잠을 청해 보려고 뒤척이다가 결국 포기하고 밖으로 나왔다. 김필도와 이야기라도 하는 게 낫겠다 싶어서.

그녀는 김필도에게서 마족에게서는 볼 수 없는 신선한 뭔가를 느꼈다. 사실 그 느낌이 어떤 건지 그녀도 알지 못한다.

“무슨 배짱이야?”

김필도에게서 느껴지는 신선함이란 어쩌면 저런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저런 무모한 행동은 생각하는 걸 지극히 싫어하는 마족도 하지 않는다. 마족보다 더 단순하고 무식한 녀석을 만난 것이다.

“사업 이야기를 하는 걸 보니까 무식한 것도 아닌 것 같던데…….”

카판이 아니라 문화를 팔아야 한다는 말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장사는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행위라는 고정관념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게다가 카판뿐만 아니라 카판과 관련된 물건들까지 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렇게 사업 수단이 좋은 자를 무식하다고 하면 말이 안 되겠지.

“이왕 나왔으니까 구경이나 해 볼까?”

이카렌은 김필도가 벗어 두었던 로브를 들어 편평한 바위에 깔고는 그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헛!”

이카렌은 깜짝 놀랐다. 로브에 엉덩이를 대자마자 따스한 기운이 올라왔다.

“이런 나쁜 자식!”

어째 추위를 잘 견딘다고 했다. 그런데 녀석은 추위를 몰아내는 마법 로브를 걸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카렌은 얼른 로브를 걸치고 로브 후드를 썼다.

길이가 짧고 가슴이 조이긴 했지만 그런대로 입을 만했다.

“와우!”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따뜻하게 달궈진 돌을 안고 있는 것처럼 순식간에 온기가 온몸을 감싸고돌았다.

로브의 효능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벌판으로 시선을 집중하자 뜻밖에도 시야가 더 밝아졌다. 놀랍게도 로브는 추위를 막아 줄 뿐 아니라 시력이나 청력 등 감각을 강화시켜 주는 역할까지 했다.

“어?”

신성의 장소를 바라보던 그녀는 황당하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김필도가 1백 미터가량 걸어가자 낮에 그랬던 것처럼 고스트 크레디온이 불쑥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고스트 크레디온의 등장이 그녀를 놀라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등장은 당연한 거니까.

그녀가 놀란 것은 고스트 크레디온의 수였다.

그녀가 알기론 신성의 장소에 있는 고스트 크레디온은 침입자의 실력에 맞춰 수가 달라진다.

어떻게 침입자의 실력을 알아내는지 그건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침입자의 실력을 간파하고 그에 맞춰 나타난다는 것이었다.

낮에 라이자칸 앞을 가로막은 고스트 크레디온의 수는 20객체였다. 그런데 김필도를 가로막은 고스트 크레디온의 수도 20객체다.

고스트 크레디온의 객체수로 따지면 김필도는 라이자칸과 비슷한 실력자란 말이 된다.

“말도 안 돼.”

고스트 크레디온들이 뭔가를 착각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광경이다. 아니면 김필도가 들고 있는 창이 고스트 크레디온들을 착각하게 만드는 대단한 물건이거나.

이카렌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벌판을 주시했다.

그때 김필도는 이야크 창으로 고스트 크레디온을 겨냥한 채 서 있었다.

그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고스트 크레디온과의 거리는 20미터.

녀석들은 경계선 안으로 들어오는 자들만 막을 생각인 듯 달려들진 않는다.

문제는 김필도 또한 달려들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형체가 있는지, 혹은 갑옷만 걸친 다크 나이트 모습인지 그것조차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기는 기운은 그랜드 마스터인 톰벨을 능가한다. 톰벨이 크레디온을 얻으려고 발악하는 이유를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전투마갑 하나만 주면 안 잡아머억~지.”

김필도는 고스트 크레디온을 향해 걸어갔다. 언제까지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가 다가가자 고스트 크레디온의 몸에서 흘러나온 싸늘한 기운이 더욱 강해졌다. 그 기운이 얼마나 강한지 10여 미터 떨어진 김필도의 몸이 따끔거릴 정도였다.

“무조건 선빵이다!”

파앗!

김필도의 신형이 가공할 속도로 쏘아져 나갔다.

그는 이미 바람의 속성 마법인 라콰(Laqwa)를 활성화시킨 상태였다. 그의 상체에 새겨진 마법진들이 새카만 광채를 흘려 댔다.

콰앙!

앞으로 내민 오른발이 강하게 진각을 밟았다.

쇄액!

그리고 오른손에 들린 창이 무서운 속도로 허공을 갈랐다.

스악!

창이 쏘아져 오자 고스트 크레디온 한 객체가 들고 있던 검을 사정없이 휘둘렀다.

슈캉!

강한 쇳소리가 흘러나왔다.

고스트 크레디온이 쳐낸 창의 앞부분이 오른편으로 휘어졌다. 하지만 탄성이 강한 재질이라 금세 원래 상태로 되돌아갔다.

순간 김필도는 왼발을 내밀며 왼손으로 창간을 잡았다.

“차앗!”

우렁차게 기합을 지르며 왼편으로 휘둘렀다.

스악!

카앙!

창에 부딪친 고스트 크레디온이 3미터가량 날아갔다. 하지만 크레디온에는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휙!

고스트 크레디온 한 객체가 김필도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쏘아져 갔다.

김필도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창을 오른편으로 쓸어 갔다. 굳이 창날로 공격할 이유가 없다. 바람의 기운이 어리면 이야크 창의 창간 또한 훌륭한 무기가 된다.

카앙!

창간에 걸려든 고스트 크레디온이 처음 날아갔던 녀석보다 더 멀리 날아갔다. 이번엔 5미터쯤 되었다.

쐐액!

팍팍팍! 휙!

고스트 크레디온들이 빠르게 다가오자 다섯 걸음을 연거푸 물러남과 동시에 훌쩍 몸을 날려 5미터를 더 물러났다. 거리를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탁탁탁! 탁탁탁!

거리가 확보되자 창을 수평으로 세운 채 전방으로 내달렸다. 그가 달려가는 속도 또한 엄청났다.

순식간에 고스트 크레디온 5미터 앞에 선 그는 오른발을 강하게 땅속으로 박아 넣으며 창을 찔러 넣었다.

슉슉슉!

라콰의 끝에서 강한 바람 소리가 흘러나왔다.

샤일록으로부터 배운 환창이었다.

까앙! 까앙! 까앙! 까앙! 까앙!

날카로운 쇳소리가 연달아 다섯 번 들려왔다.

그리고 고스트 다섯 객체가 7미터가량 날아가 거칠게 떨어졌다.

스악!

어느새 경계선을 넘어 안쪽까지 들어간 듯 김필도의 좌우측에서 고스트 크레디온들이 쏘아져 왔다. 머리 위로 들어 올린 고스트 크레디온의 검에서 검붉은 광채가 넘실댔다.

두 객체의 움직임이 너무 빨라 김필도가 피할 곳은 없었다. 그렇다고 막는 것도 쉬워 보이지 않았다.

‘땅의 속성 노콴(Noqan)!’

“강하!”

푸악!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가 서 있던 자리의 땅이 쑥 꺼졌다.

콰앙!

김필도의 신형이 땅속으로 꺼진 순간 고스트 크레디온 두 객체가 부딪치며 거친 굉음이 터졌다.

“부상!”

김필도의 신형이 빠르게 솟구쳐 올랐다.

철컥!

그리고 접혀 있던 한쪽 날이 펴졌다.

‘불의 속성 세딕(Sedic)!’

실전 마법의 장점 중의 하나였다. 굳이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전엔 말을 해야 마법 기운이 일었는데 지금은 생각만 해도 바로 펼쳐진다.

김필도는 창날을 보았다.

대장간의 노에서 막 꺼낸 것처럼 새빨갛게 달궈진 상태다. 마법을 펼치는 매개체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에 창날이 녹아내릴 염려는 전혀 없다.

‘바람의 속성 라콰(Laqwa)!’

휘이이익!

강한 바람이 몰아칠 때와 비슷한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의 주위에는 바람 한 점 없었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대신 김필도가 들고 있는 창이 무서운 속도로 진동했다. 바람의 속성 마법이 창 내부에서 펼쳐졌기 때문이다.

가공할 속도로 움직이는 바람의 기운은 벌겋게 달궈진 창날을 통해 배출됐다. 그러자 창날이 새파란 색으로 변했다. 극한까지 온도가 올라갔다는 의미였다.

불을 피울 때 사용했던 토치의 완성형이었다. 물론 최강의 상태는 아니다.

김필도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그가 토치라고 명명한 불 또한 강해질 테고, 최고의 경지에 이르면 닿는 순간 재로 만들어 버리는 엄청난 힘을 발휘할 것이다.

“차앗!”

어느새 김필도의 신형은 지상으로 나와 있었다. 그 순간 그는 창을 강하게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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