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 김필도-33화 (33/225)

# 33

안쪽 어디에도 통로는 없었다. 하지만 머릿속 도형엔 오른편에 문이 있다고 나와 있다.

턱!

확인을 위해 손을 내밀었는데, 차가운 벽이 만져진다.

“흐음!”

머릿속에 나타난 영상은 지금껏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즉 이곳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기억조차 못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곳에 들어오자마자 비밀 스위치를 켠 것처럼 나타났다는 건 여기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고, 통로가 막혀 있지 않다면 완벽하다는 말이 된다.

김필도는 다시 손을 내밀어 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차가운 벽만 만져질 뿐이다.

왜?

김필도는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생각에 잠겼다.

-절대적인 믿음은 기적을 불러오는데 그게 곧 마법이다.

문득 요른의 가르침이 떠올랐다.

김필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머릿속에서 통로라고 말한 그곳을 향해 사정없이 머리를 박았다. 통과하지 못하면 머리가 깨져 죽을 수도 있는 그런 무모한 행동이었다.

쑥!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몸은 막을 통과하듯 안으로 쏙 들어갔다.

새로운 공간 역시 머릿속 도형 안의 한 장소였다.

통로를 찾아 같은 방법으로 빠져나갔다.

그렇게 다섯 곳의 방을 빠져나갔을 때 처음으로 특이한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엎드린 채 숨을 거둔 시체였다. 시체의 옷은 15센티미터가량이 세로로 찢겨 있었는데 정확하게 심장 부분이었다.

이곳까지 들어왔다가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한 게 분명했다. 아마도 그 누군가는 고스트 킹일 것이다.

시체 앞에는 검은색으로 된 작은 상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김필도는 시체 가까이 다가가 옆으로 살짝 밀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것 같은데도 시체의 상태는 비교적 멀쩡했다. 나이는 60대 후반 정도로 보였다.

시체 아래쪽에는 기름종이 하나가 놓여 있고, 기름종이 옆에 마법 펜이 나뒹굴었다. 뭔가를 쓰다가 죽임을 당한 듯했다.

김필도는 기름종이를 들어 올렸다.

-나 아무탄 코니엘 헤라칸이 바람의 가문 마지막 가주가 되지 않기를 바라며 이글을 남긴다.

“훗!”

김필도는 피식 웃었다.

헤라칸 가(家)는 3백 년 전까지만 해도 대륙 최강 가문의 한 곳이었다. 그 강함을 바탕으로 제국에 대공의 작위를 요구했다.

그리고 라칸 공국이 탄생했다.

발탄 제국 다음으로 강성했던 그들의 영화는 50년을 넘기지 못했다. 250년 전 헤라칸 가문이 왕좌에서 물러나면서 급격하게 몰락했다. 그리고 지금은 누구도 돌아보지 않는 버려진 나라가 됐다.

그런데 이곳에서 그 라칸 공국을 세웠던 헤라칸 가문의 가주를 보게 된 것이다.

-우린 잃어버린 대공국을 되찾아야 했다. 하지만 힘이 없었다. 그래서 수천 년 전부터 우리 가문에 내려오던 비밀을 파헤치기로 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마신의 팔찌 파라온이다.

파라온이 보관된 장소는 문 대륙의 루루시아였다.

고대 문헌을 뒤지며 조금씩 파라온에 가까워질 수 있었다. 그리고 증조부께서 문 대륙으로 떠나셨다.

그분은 파라온과 함께 우리 가문에 내려왔던 이야크 창 라콰와 이야크 안장인 슈라를 가지고 가셨다.

그리고 50년 후 조부께서 떠나셨고, 다시 50년 후 아버지께서 그리고 다시 50년 후 내가 왔다.

결국 나는 아버지의 흔적을 더듬어 이곳까지 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놈을 생각 못했다.

마신의 무덤을 지키던 가디언을.

글은 거기서 끝나 있었다. 마신의 팔찌 파라온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기능을 가졌는지 그건 나와 있지 않았다. 아니, 유언을 남기다가 숨을 거둔 모양이었다.

“골 때리는 인연이네.”

김필도는 잠시 멍했다. 라콰와 안장은 2백여 년 전에 문 대륙으로 넘어왔고, 샤일록이 얻었다가 그에게까지 왔다. 그런데 라콰의 원 주인을 이곳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라칸 공국에 한번 가도록 하겠습니다.”

김필도는 시체를 향해 정중하게 합장을 했다.

그러고는 상자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에는 거무튀튀한 팔찌 하나가 들어 있었다.

“이름만 거창했지…….”

김필도는 팔찌를 돌려 보며 입을 삐쭉 내밀었다.

폭이 5센티미터 정도 되는 팔찌는 종로 리어카에서 파는 것보다 그다지 나아 보이지도 않았다. 지극히 평범한 수준이었다.

“어쨌든 이걸 얻으려고 대를 이어 노력한 분들의 성의를 봐서라도 그냥 둘 수는 없겠지.”

김필도는 팔찌를 들어 올렸다.

“이런!”

순간 얼굴이 슬쩍 굳었다.

볼품없어 보이는 것치곤 상당히 무게가 나갔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20킬로그램은 될 것 같았다.

아무리 보물이라고 해도 20킬로그램이나 나가는 걸 손목에 차고 다닐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아공간에 넣어 두는 건 더 이상할 것 같고. 일단 차 보고…….”

일단 끼워 보고 정 힘들다 싶으면 그때 빼는 게 낫겠다 싶었다. 팔찌를 들어 올리고는 힘을 가했다.

딸깍!

나직한 소리와 함께 팔찌의 한편이 열렸다.

우르릉!

팔찌가 벌어지는 순간 무덤 내부가 휴대전화를 진동으로 맞춰 놓았을 때처럼 부르르 떨었다.

“요란하게 싸우는 모양이네.”

김필도는 피식 웃었다.

그는 방금 무덤 내부가 흔들린 원인이 외부에서 벌어지는 싸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팔찌가 열렸다고 무덤 내부가 흔들릴 정도로 강한 진동이 온다는 건 김필도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그의 예상도 어느 정도는 맞았다.

김필도가 있는 곳 바로 위쪽 신성의 장소에서는 엄청난 접전이 벌어지는 중이었다.

거의 초토화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신성의 장소를 가득 채웠던 비석은 부서지거나 두 동강 났고, 바닥은 무덤을 파헤친 것처럼 커다란 구덩이가 생겨나 있었다.

콰앙!

“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이카렌의 신형이 훨훨 날아갔다. 라이자칸과 함께 협공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고스트 킹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콰앙!

이카렌의 신형이 절벽 깊숙이 박혀 들어갔다.

“내가 가겠네!”

라이자칸은 고스트 킹을 향해 몸을 날렸다.

슈악!

하지만 고스트 킹은 이카렌을 없애기로 마음을 먹은 듯 절벽을 향해 가공할 속도로 쏘아져 갔다. 고스트 킹이 나아가는 속도는 라이자칸이 따르지 못할 정도로 엄청났다.

“피하게!”

라이자칸은 고함을 내질렀다.

굳이 라이자칸의 경고가 아니더라도 이카렌 또한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조금 전 당한 일격의 충격이 워낙 커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제발!”

이카렌은 몸을 움직여 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근육이 굳어 버린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거대한 검이 돌진해 왔다.

이카렌은 절망적인 얼굴로 전면을 바라보았다. 검붉은 광채가 넘실거리는 검의 주인은 고스트 킹이다.

손을 들어 올릴 수도 없고, 몸도 움직일 수 없다.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크아아아아!”

고스트 킹의 포효를 들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죽기 직전엔 많은 생각이 날 줄 알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까앙!

고스트 킹의 검이 크레디온으로 파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머릿속이 캄캄해졌다.

정적이 온 사위를 감싸고 있는 듯하다.

“이게 죽음? 나쁘지 않네. 흐흐!”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냥 모든 것이 정지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헛헛한 웃음을 흘리며 이카렌은 눈을 감았다.

“괜찮은가?”

그때 라이자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못 들었겠지.”

그녀는 의아했다. 분명 조금 전 고스트 킹의 공격으로 죽었다. 라이자칸의 목소리가 들려올 상황이 아니었다.

“자네 안 죽었네!”

번쩍!

이카렌은 눈을 떴다. 죽지 않았다는 목소리는 환청이 아니었다.

“……?”

그녀는 할 말을 잃었다. 바로 앞에서 라이자칸과 톰벨이 잔뜩 경계하는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어, 어떻게 된 거죠?”

이카렌은 얼떨떨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갑자기 사라졌네.”

“사라져요?”

“서두르게. 고스트 킹만 사라졌을 뿐 다른 녀석은 그대로네.”

“아, 알았어요.”

이카렌은 몸을 움직여 보았다. 힘이 돌아오고 있는 듯 그제야 팔다리가 움직였다.

파앗!

그녀의 신형이 절벽에서 빠져나왔다.

“왜 저러고 있는 거죠?”

라이자칸 옆으로 내려선 이카렌은 가만히 서 있는 고스트 크레디온들을 보며 물었다.

“나도 모르겠네. 아마도 고스트 킹이 갑자기 사라져서 공황 상태에 빠진 듯하네. 우선 자리를 피하고 보세.”

“루시안은요?”

“나 여기 있어.”

바로 그때 50미터 앞에서 김필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행은 김필도가 있는 곳으로 내달렸다.

“괜찮아?”

김필도 앞에 선 이카렌이 물었다.

“말짱해.”

“어떻게 된 거야?”

“멋지게 뛰어올랐는데 내려서려는 쪽에 구덩이가 있더라고.”

“그래서 그 속으로 빠진 거야?”

“응! 그런데 넌 왜 거기에 박혀 있었던 거야?”

“고스트 킹에게 당했지 뭐.”

“그 자식은 어디 갔는데?”

“갑자기 사라졌어.”

“다시 나타날 수도 있겠네?”

“어쩌면.”

“그럼 얼른 가자.”

팔을 크게 휘저으며 달려가는 김필도의 눈에 오른손 손목이 잡혀 들었다. 그의 손목에는 거무튀튀한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20킬로그램 정도 나가는 팔찌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많았다. 그런데 팔찌를 차는 순간 거짓말처럼 무게가 가벼워지는 것이었다.

어떤 기능을 하는지, 어디에 쓰는 건지 모르지만 헤라칸 가문에서 2백 년 동안 찾아 헤맸던 물건.

인연이 닿는다면 언젠가 알게 되겠지.

‘뭐 안 닿아도 할 수 없고.’

다행히 고스트 크레디온은 쫓아오지 않았다. 벌판 끝으로 온 일행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제 어디로 가지?”

이카렌은 김필도를 돌아보며 물었다.

“저기로.”

김필도는 절벽 아래쪽에 나 있는 동굴을 가리켰다.

“저긴 아무것도 없겠죠?”

동굴을 바라보던 톰벨이 이카렌을 향해 물었다.

“없기를 바라야지.”

이카렌은 자리에서 일어나 김필도를 내려다보았다.

“벌써 가자고?”

“일단은 벗어나고 싶어.”

“그렇게 하지 뭐.”

김필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후 일행은 절벽 아래쪽에 나 있는 동굴로 들어갔다.

김필도 일행이 동굴로 들어가고 5분 후. 검은 물체 하나가 신성의 장소로 접근했다. 검은 물체의 정체는 온몸에 검은 줄무늬가 나 있는 하이 오드였다.

그아우우우!

하이 오드는 낮게 울음을 토해 내며 신성의 장소로 들어섰다.

스르륵! 스륵! 스륵!

하이 오드가 신성의 장소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고스트 크레디온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마도 하이 오드의 몸에서 흘러나온 마나를 감지하고 모습을 드러낸 모양이었다.

그아아우우우!

걸음을 옮기던 하이 오드는 그 자리에 엎드렸다.

우두둑!

뼈마디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오고, 허리가 날렵하게 빠지면서 엉덩이가 약간 위로 솟아올랐다. 그리고 손과 발이 고양이 발톱 모습으로 변했다.

하이 오드는 오른손으로 가슴을 가볍게 쓸었다. 그러자 하이 오드의 전신에서 검은 기운이 뭉클뭉클 피어올랐다.

스르르! 철컥! 스르르! 철컥! 스르르! 철컥!

뭔가가 미끄러지는 소리에 이어 쇠가 걸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하이 오드를 감싸고 있던 검은 운무가 조금씩 사라져 갔다. 그리고 기갑으로 무장한 하이 오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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