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
그아아우우우!
하이 오드의 입에서 살기를 잔뜩 머금은 섬뜩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이 오드는 천천히 신성의 장소를 향해 들어갔다.
캬우우!
날카로운 울음과 함께 하이 오드의 신형이 허공을 갈랐다. 엄청난 빠르기였다.
전에 라이자칸이 전력을 다해 달렸고, 이카렌 역시 같았다. 하지만 그들의 움직임은 하이 오드에 비하면 거북이에 불과했다.
하이 오드는 빛살 같은 속도로 나아갔다.
척!
스악!
쩌억!
고스트 크레디온 한 객체가 자기를 향해 날아오는 하이 오드의 기척을 감지하고 검을 들어 올렸지만 이미 하이 오드의 발톱은 목을 훑고 지나간 후였다.
척!
순식간에 30미터를 나아간 하이 오드는 몸을 돌려 방금 공격했던 고스트 크레디온을 보았다.
쩌억!
금이 쩍쩍 간 고스트 크레디온은 모래성이 무너지듯 가루로 변하며 풀썩 쓰러졌다.
그아아우우우!
하이 오드는 만족스러운 듯 나직한 울음을 흘리며 유유히 신성의 장소를 빠져나갔다.
“으음!”
나직한 신음이 신성의 장소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흘러나왔다. 멀어지는 하이 오드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이들은 그동안 김필도를 쫓아왔던 모딕과 디나인이었다.
“봤는가?”
모딕은 디나인을 돌아보았다.
“갑옷을 걸친 하이 오드라면 전에도 봤네.”
“갑옷 걸친 하이 오드가 아니라 하이 오드의 갑옷을 봤냐는 말이네.”
“전엔 크레디온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자넨 마족의 피를 이었으면서도 크레디온에 대해 나보다 더 모르는구먼.”
“난 눈만 마족일 뿐 나머진 인간 아닌가. 당연히 모를 수밖에 없지.”
“그런 사람이 고스트 크레디온은 어떻게 알았는가?”
“그거야 아비라는 놈이 가진 책에서 봤으니까.”
“클클클! 아무튼 자넨 특이해.”
모딕은 빙그레 웃었다.
“그건 그렇고, 전엔 하이 오드가 걸친 전투기갑을 크레디온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아닌가?”
디나인은 화제를 돌렸다.
“여기서 고스트 크레디온을 보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네.”
“지금은 아니란 말인가?”
“두 갑옷은 달랐네.”
“어떻게?”
“하이 오드가 착용하고 있던 전투기갑은 무광인 반면, 고스트 크레디온의 몸에서는 광채가 났네.”
“무광과 유광 차이가 있단 말인가?”
“현존하는 전투기갑 중 천족의 전투천갑 세이기온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검은색이네. 즉 마족의 전투마갑 크레디온, 인간이 가진 전투전갑 프라이온과 전투평갑 페라시온은 전부 검은색이란 말이지. 하지만 차이가 있네.”
“크레디온은 광채가 나고 프라이온과 페라시온은 무광이란 말이구먼.”
“그렇지.”
모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하이 오드가 착용한 전투기갑은 프라이온과 페라시온 둘 중 하나라는 말이 되는 건가?”
“그 부분에서는 고민을 좀 해야 하네.”
“하이 오드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프라이온이나 페라시온을 착용한 상태에서는 고스트 크레디온의 목을 일검에 잘라 낼 수 없다는 건가?”
“내 생각은 그렇네. 더구나 고스트 크레디온은 라이자칸이나 이카렌이 전력을 다해야 간신히 없앨 수 있을 정도였네. 그런 고스트 크레디온을 파리 잡듯 가볍게 없앴다는 건 아무래도…….”
“하지만 그게 아니고는 설명할 길이 없잖는가?”
“아니, 한 가지가 더 있네.”
“뭐란 말인가?”
디나인은 귀를 쫑긋 세우고 모딕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누가 제작했는지, 어떤 힘이 숨어 있는지. 아는 자는 오직 신밖에 없다고 해서 신갑이라고 부르는 전투기갑에 대해 들어 본 적 있는가?”
“전설이 아니고 정말로 존재한단 말인가?”
신갑에 대한 전설은 디나인도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전설일 뿐이었다.
“그게 아니면 조금 전 상황을 설명할 방법이 없네.”
모딕은 신성의 장소로 시선을 던졌다.
어둠이 밀려오면서 폐허로 변했던 신성의 장소는 다시 본래 모습을 되찾아 가고 있다. 비석이 원래 자리를 찾아가 세워지고, 구덩이가 메워진다.
이곳은 신성의 장소이면서 불사의 장소라고 불린다. 아마 밤이 되면 가루로 스러졌던 고스트 크레디온들은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되살아날 것이다.
“그 신갑의 이름이 뭔가?”
디나인의 눈은 호기심으로 충만했다.
“전설은 그 신갑을 헤를리온이라고 하였네.”
“헤를리온. 헤를리온이라…….”
디나인은 되뇌었다.
“고대어로 ‘불사’란 뜻이네.”
“정말 그런 전투기갑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건 나도 모르네. 하지만 하이 오드가 걸친 전투기갑이 헤를리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점점 강해지고 있네.”
“그렇다면 어떻게 되는 건가?”
“우리 힘으로는 잡을 수 없다고 봐야겠지.”
“그때 잡았어야 했다는 말이구먼.”
“아니네. 그때 잡았더라면 우린 죽었을 거네.”
“하이 오드에게서 덫을 제거하는 순간 전투기갑을 착용했을 거란 말인가?”
“그랬을 거네.”
“그럼 루시안 그놈에게 감사해야겠군.”
디나인은 조금 전 하이 오드가 고스트 크레디온의 목을 자르는 광경을 떠올리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두 사람은 하이 오드를 팔아먹을 욕심에 쇠창살 안에 집어넣고 치료를 해 주었을 게 분명했다.
그 상태에서 하이 오드가 갑옷을 걸쳤더라면…….
“어쩌면.”
모딕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덧 원래 모습을 회복한 신성의 장소는 본래의 정적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이제 어떻게 할 텐가?”
“계속 따라가야지.”
“우린 저곳으로는 들어갈 수 없네.”
디나인은 신성의 장소를 가리켰다.
“천족 애송이를 감시하고 있으면 되네.”
“세이아칸 말인가?”
“그리고 블러드 데빌단에게도 슬쩍 정보를 흘리고.”
모딕의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떠올랐다.
제5장 여섯 번째 감각을 깨워라
“접니다, 천좌.”
“지금 어디냐?”
세이아칸은 마법 통신구 속의 라이자칸을 보며 물었다.
“그림자의 숲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림자의 숲이면 헤린느 협곡 서쪽에 있는 숲 아니더냐?”
“헤린느 협곡 어딘가에 리모스로 들어가는 통로가 있답니다.”
“어디라고 하더냐?”
“정확한 위치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겠지. 그럼 난 그 근처로 이동하겠다.”
“흔적을 남겨 두었습니다. 그런데…….”
라이자칸은 말끝을 흐렸다.
“할 말이라도 있는 게냐?”
“…아무래도 히데우스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라이자칸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사실 그동안 몇 번이나 보고를 하면서도 히데우스에 대한 말은 꺼내지 못했다. 그건 바로 세이아칸의 기분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리모스가 가까워지자 보고를 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히데우스?”
“예.”
라이자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대한 정보를 얻은 모양이구나.”
세이아칸의 얼굴이 약간 차가워졌다. 세이아칸은 늙은 부하 라이자칸이 충성심에서 보고했다는 걸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나쁜 건 히데우스보다 한 수 아래로 여기지 않는다면 굳이 보고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대비를 해야 할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대비라… 어떤 대비 말이냐?”
“그러니까…….”
라이자칸은 신성의 장소에서 있던 일을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러니까 너처럼 나도 상대가 아닐 거란 말이냐?”
세이아칸은 차갑게 말을 뱉었다.
“그, 그건…….”
라이자칸은 고개를 숙였다.
그는 자신의 보고가 젊은 주인의 자존심을 건드렸다는 걸 직감했다. 예상하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더 심각한 듯했다.
“아무래도 라이자칸 넌 쉴 때가 된 것 같구나.”
“처, 천좌!”
“너에 대한 처우는 이번 임무의 결과를 보고 결정하도록 하겠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천좌.”
라이자칸은 더 깊이 고개를 숙였다.
“수고해라.”
세이아칸은 손을 가볍게 저었다. 그러자 마법 통신구를 활성화시켰던 마나가 회수되고 마법 통신구의 빛이 스러졌다.
“히데우스라…….”
세이아칸은 낮게 중얼거렸다.
그는 라이자칸의 실력을 잘 알고 있다. 최하층 계급인 무급에서 전사의 계급이라 부르는 제4계급까지 올라온 입지적인 인물이다.
물론 제3계급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가 상대가 되지 않는 자라면 엄청나다고 봐야 한다.
“대비를 해야겠지.”
그는 왼편에 놓인 마법 통신구를 바라보았다.
엷은 황금빛이 흐르는 그것은 천계와 직접 연락을 취할 수 있는 마법 통신구였다.
잠시 후 마법 통신구에 황금빛 수염이 가슴까지 늘어진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4대 원로의 한 명인 프리메우스였다.
“문제가 있는 게냐?”
“마계10군단 군단장 히데우스에 대한 처리 방안을 하달받기 위해 연락을 드렸습니다.”
“히데우스가 직접 나왔더냐?”
“그렇습니다, 신좌.”
“그를 없애면 마족과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 생각해 봤느냐?”
“히데우스는 중급 마족 이하의 마족들에게는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지만 상급과 최상급 마족들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별일이 없을 거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히데우스가 마계10군단 군단장이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자칫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단 말입니까?”
“그럴 가능성이 아주 없진 않다.”
“그럼 그를 그대로 둔단 말입니까?”
“그럴 순 없지. 놈과 마계10군단을 없앨 수 있는 절호의 기횐데 놓칠 수가 없지.”
“그럼?”
“마계 원로 중 한 명과 이야기가 됐으니까 걱정할 필요 없다.”
“알겠습니다, 신좌.”
세이아칸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잠시 후 마법 통신구 표면에 흐르던 빛이 사라졌다.
“그럼 난 이카렌 계집과 그 인간 놈을 없애면 되겠네.”
세이아칸의 눈 전체가 황금색으로 변했다.
그건 지독히 화가 났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