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 김필도-35화 (35/225)

# 35

“얼마나 됐소?”

일행이 머물던 동굴을 나온 김필도는 라이자칸에게 카판을 건네며 물었다.

“뭐가 말인가?”

“군대 간 지 얼마나 됐냐는 말입니다.”

“군대?”

“조직에 발을 담근 기간, 아니 들어간 시간 말이에요.”

“그걸 인간들은 군대라고 부르는가?”

“난 그렇게 불러요.”

“정확하게 2천1백 년하고 230일 지났네.”

“젠장!”

김필도는 저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지구에 살 때가 서기 2011년이었다. 물론 BC2천, 3천 년 전 유물이 심심치 않게 발견되곤 하지만 그것들은 골동품이라고 부르고, 실제적인 역사는 2천 년 남짓이라고 보면 된다. 아니, 그 2천여 년도 시대를 나누어 구분하곤 한다. 그런데 라이자칸은 그 세월 동안 군대 생활을 했다고 한다.

“왜 그러는가?”

라이자칸은 의아한 얼굴로 김필도를 보았다.

“난 2년밖에 안 되는 군대도 안 가려고 지랄을 했거든요.”

김필도는 피식 웃었다.

“무슨 소린가?”

“그런 게 있어요. 그런데 2천 년이 넘었으면 은퇴할 때가 되지 않았어요?”

“이제 해야지.”

라이자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조금 전 세이아칸의 말이 떠올랐다. 이제는 그만 부군장 자리를 내려놓고 떠나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천족은 보통 은퇴를 하면 뭐 하고 살죠?”

“운이 좋은 자는 검술 학교 선생을 하고, 그렇지 못한 자는 벌어 놓은 돈을 까먹고 살아.”

대답은 뒤에서 들려왔다.

김필도는 고개를 돌렸다. 이카렌이 카판 잔을 들고 다가오고 있었다.

“돈이 문제라는 거야?”

김필도는 물었다.

“제1계급, 제2계급, 제3계급까지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만 가지고도 떵떵거리며 사는데 제4계급 이하는 죽을 때까지 일을 해야 해.”

“천족도 계급이 있어요?”

이카렌의 말에 김필도는 라이자칸을 돌아보며 물었다.

“총 여섯 계급이 있네. 제1계급에서 제5계급까진 시민 계급이라 부르고, 계급이 없는 자들을 무급이라 부르는데 인간 세상의 노예나 범죄자들과 비슷하네.”

“마족은?”

“지적 생명체는 두 명 이상만 모이면 서열을 정하는 습성이 있는데 몰랐어?”

이카렌은 김필도 옆으로 바짝 붙어 앉았다.

“마족의 서열은 어떻게 되는데?”

“최상급은 황금색 뿔, 상급은 은색 뿔, 중급은 녹색 뿔, 하급은 붉은색 뿔, 평군은 검은색 뿔, 이렇게 구분 지어.”

“평군은 천족의 무급과 비슷한 계층인가?”

“응! 참고로 히데우스 님은 평군 출신에서 상급 마족까지 오른 최초의 마족이야.”

“너희들은 현역에서 은퇴하면 뭐 하는데?”

“천족과 비슷해. 땅이 많거나 모아 놓은 돈이 많은 마족들은 편안한 노후를 보내고, 그렇지 못한 자들은 검술 스승 노릇을 하면서 살아.”

“사는 건 다 거기서 거기네.”

김필도는 픽 웃었다.

천족이나 마족은 인간과는 다르게 살 줄 알았다.

그런데 그들 또한 인간과 다르지 않았다. 젊어서 열심히 산 자들은 편안한 노후를 보내고, 이런저런 이유로 모아 놓은 게 없는 자들은 고용인으로 살아야 한다.

“마족이나 천족이 비교 우위에 설 수 있는 건 타 종족과 비교했을 때잖아. 천족 사회 안이나 마족 사회 안으로 들어가면 똑같을 수밖에 없어.”

“하긴 조폭 세계도 일반인과는 다른 세상이니까. 정히 갈 곳이 없으면 휴도니아 대륙으로 와서 날 찾아요. 아직은 영지도 없고 힘도 없는 그림자 대공이지만 이번 일을 마치고 돌아가면 땅은 생길 것 같으니까, 라이자칸 머물 곳은 마련해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김필도는 라이자칸을 보며 말했다.

“우리가 그렇게 친했는가?”

라이자칸은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아무 조건 없이 거처를 마련해 줄 사이는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정 갈 곳이 없다면’이란 단서를 달았잖아요. 조금 전에 말한 것처럼 힘도 영지도 없지만 돈은 좀 있거든요.”

“샤일록 그 친구를 믿고 하는 말인가?”

“아무리 성공 가능성이 높은 일이라고 해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맡길 땐 전부를 거는 게 아니에요.”

“상대방이 배신하면 끝장이란 말인가?”

“당연한 거잖아요. 그리고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일을 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야 건강하게 산대요.”

“그런데 내게 어떤 일거리를 줄 참인가?”

짐짓 태연한 척하고 있었지만 라이자칸은 내심 감격하고 있었다.

“영지가 생기면 해야 할 일이 엄청나게 많잖아요. 하지만 난 영지를 다스리는 법도 모르고, 아는 사람도 없거든요.”

“그러니까 나더러 집사를 맡아 달라는 건가?”

“집사가 아니라 보스 바로 밑에서 조직을 총괄하는 큰형님이죠.”

“큰형님?”

“나는 그렇게 부릅니다.”

“아무튼 제안은 고맙네.”

“잘 생각해 보세요.”

“나는~!”

“……?”

간드러지는 코맹맹이 목소리와 함께 등에 푹신한 느낌이 와 닿았다. 마치 물 풍선 두 개로 등을 누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귓전에 뜨거운 숨결이 끼쳤다.

김필도는 고개를 돌렸다.

새빨간 눈동자가 그를 빤히 보고 있었다.

“넌 은퇴하려면 수천 년 남았잖아.”

김필도는 짧게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뱉었다.

“마생은 알 수 없거든.”

“마생?”

“마족의 삶.”

“언제 어찌될지 모르니까 보험을 들어두겠다?”

“보험?”

“미래에 대한 대비책 말이야.”

“일종의 그런 셈이지 뭐.”

이카렌은 그윽한 눈으로 김필도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술 마셨어?”

“술은 왜?”

“나는 술을 진탕 먹고 나면 눈이 빨개지고, 괜히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어지거든.”

“내 눈은 원래 빨개. 그리고 지금 난 술을 마신 게 아니라 추워.”

“잘 생각했어. 추울 땐 원래 남자에게 안기는 게 최고야.”

“난 안긴 게 아니라 안고 있어. 그리고 루시안 네가 좋은 게 아니라 네가 입고 있는 로브가 좋아.”

이카렌은 팔을 뻗어 김필도를 안았다.

“너 계속 그러면 덮쳐 버리는 수가 있다!”

김필도는 짐짓 험상궂은 얼굴로 으름장을 놓았다.

“나와 싸워 이기면 덮칠 필요 없다니까 그러네.”

“내가 무슨 수로 마족을 이기냐. 그것도 마계에서 가장 강하다는 마계10군단 부군단장을.”

“열심히 노력하면 가능할지도…….”

휙!

김필도는 휙 몸을 돌려 이카렌을 감쌌다. 그러고는 발로는 라이자칸을 차고, 이카렌을 밀어붙이며 그 자리에 엎드렸다.

그의 모습은 마치 이카렌을 덮치는 것 같았다.

문제는 이카렌의 태도였다.

김필도가 위에서 내리눌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있었다. 아니 손을 돌려 껴안기까지 했다.

퍽! 퍽퍽퍽!

바로 그 순간이었다.

라이자칸이 있던 자리와 김필도의 등에서 둔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헉!”

라이자칸은 질겁했다.

그는 뭔가가 날아온다는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런데 방금 앉아 있던 자리를 보니 다섯 개의 화살이 꽂혀 있었다. 조금 전 그는 완전히 무방비 상태였고, 김필도의 발에 차여 나가떨어지지 않았더라면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 주위를 경계했다.

하지만 화살은 어디서 날아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라이자칸은 재빨리 갑옷을 활성화시켰다. 그의 몸 곳곳에서 황금색 운무가 솟아 나오고 곧 전신 갑옷을 걸친 모습이 됐다.

“괜찮은가?”

그는 김필도 옆으로 다가갔다.

김필도의 등에는 여섯 대의 화살이 꽂혀 있었다.

“화살을 맞았어요?”

김필도 아래 깔린 이카렌이 물었다.

“여섯 대나 맞았네.”

“말도 안 돼요.”

“뭐가 말이 안 된다는 건가?”

“화살을 여섯 대나 맞은 인간이 손으로는 내 온몸을 더듬고, 혀로 입 안을 살필 리가 없잖아요.”

“그 짧은 순간에 그걸 다 했단 말인가?”

라이자칸은 황당한 얼굴로 김필도를 보았다.

“안 일어날 거야?”

이카렌은 김필도의 가슴을 밀어냈다.

“나 화살 맞은 거 맞아.”

김필도는 몸을 축 늘어뜨렸다. 다시 그의 몸이 이카렌을 압박했다.

“화살을 맞으면 죽어야 하는 거 아냐?”

“화살 맞았다고 금세 죽진 않잖아.”

“이 상태에서 크레디온을 활성화시키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어떻게 되는데?”

“네 몸이 잘려 나갈 거야. 특히 아래쪽에 있는 그게 가장 먼저 잘릴지도 몰라.”

벌떡!

김필도는 재빠르게 일어났다.

“너 진짜 대공 아니지?”

그녀는 옷매무새를 추스르며 김필도를 흘겨보았다. 가슴 부분의 단추 네 개와 허리띠가 풀어져 있었다. 귀신같은 손놀림이 아닐 수 없었다.

“왜?”

소매치기 기술은 새끼 조폭 때 적성 검사를 받는 와중에 배운 것 중의 하나였다.

“대공이라면 소매치기보다 손이 더 빠를 리가 없잖아.”

“진짜 대공이라면 몸에 문신도 없을걸?”

“그것도 이상하고.”

이카렌은 김필도를 빤히 바라보았다.

“괜찮은가?”

그때 라이자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참! 나 지금 화살 맞았지.”

김필도는 제 머리를 툭 치고는 이카렌 앞으로 몸을 돌렸다.

“지, 진짜 맞네?”

이카렌은 깜짝 놀랐다.

김필도의 등에는 정말로 여섯 대의 화살이 꽂혀 있었다.

그녀는 얼른 화살을 뽑았다. 하지만 화살 끝에는 피가 묻어 있지 않았다.

“휴우!”

이카렌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피가 묻어 있지 않다는 건 부상을 입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그 두툼한 옷이 널 구한 거야?”

전에 신성의 장소에서 보았던 소매가 없는 옷이 떠올랐다. 천으로 만든 것 같았는데 상당히 단단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날 구한 게 아니고 널 구한 거지.”

“날 구했다고?”

“그 화살은 내가 아니고 널 노린 거였어.”

“날?”

이카렌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그녀는 금방 김필도의 등에서 뽑은 화살을 떠올렸다.

화살은 비스듬히 꽂혀 있었다. 즉 그녀의 등 뒤쪽에서 화살이 날아왔다는 뜻이었다.

이카렌은 고개를 돌려 라이자칸을 보았다.

“자네와 나 둘을 노린 거였네.”

라이자칸은 어둠 속을 바라보며 말했다.

스윽! 스윽! 스윽!

섬뜩한 소리가 주위에서 들려왔다.

턱!

그녀는 가슴을 툭 쳤다.

그러자 그녀의 가슴 부근에서 검은 기운이 흘러나오더니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스르륵! 철컥!

그리고 크레디온을 착용할 때 흘러나오는 쇳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이카렌의 몸을 감쌌던 검은 기운이 사라지고 크레디온을 걸친 모습이 드러났다.

“대단하네.”

김필도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투구의 양쪽엔 녹색 뿔이 드러나도록 구멍이 뚫려 있고, 이마 한가운데는 유니콘처럼 길쭉한 뿔이 돋았다.

입 주위만 드러난 투구를 쓰고 있는 그녀 모습은 마치 판타지 영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다.

이카렌은 김필도 앞을 가로막은 채 화살이 날아온 동쪽을 보았다.

휘익!

느닷없이 바람 소리가 들려오자 이카렌은 재빨리 검을 들어 올렸다.

차앙!

그녀의 가슴에서 날카로운 쇳소리가 흘러나왔다.

스악!

이번엔 라이자칸 쪽이었다.

차앙!

라이자칸이 검을 아래로 내려 막았다. 하지만 이카렌과 마찬가지로 그가 검을 내린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뭐죠?”

김필도는 주위를 경계하며 물었다.

“섀도 족이네.”

라이자칸은 땅을 살피며 대답했다.

“섀도면 그림자?”

“저길 보게.”

라이자칸은 검으로 앞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곳에 검은 그림자 수십 개가 움직이고 있었다.

김필도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구름이 잔뜩 끼어 설령 달이 떴다고 해도 보일 상황이 아니었다.

“그림자의 공격을 어떻게 막죠?”

“감각으로 막아 내는 수밖에 없네.”

“감각?”

“육감 훈련을 받은 적이 없는가?”

“그런 훈련이 있다는 말도 들어보지 못했네요.”

김필도는 왼편으로 향하고 있던 설풍의 손잡이가 오른편을 향하도록 위치를 바꿨다. 그러고는 왼손과 오른손을 뻗어 도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럼 오늘 한번 익혀 보게.”

“안 그래도 그럴 생각입니다. 어떻게 하면 되죠?”

“눈은 감고 귀는 열면 되네.”

라이자칸은 육감을 얻는 방법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어렵지 않겠네요. 오픈(Open)!”

김필도는 싱긋 웃었다.

역시 정(情)은 오고 간다는 말이 맞았다. 정 갈 곳 없으면 찾아오라는 말 한 마디에 라이자칸은 그의 심득을 김필도에게 가르쳐 주었다.

-뭔가를 얻고 싶으면 먼저 베풀어라!

단순한 진리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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