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
제6장 술 한 병 그리고 구슬 키스
붉은 갑옷을 걸치고 투구를 쓴 자들이 그림자 숲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만히 서 있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기운으로 주위는 완전하게 장악됐다.
일행은 전부 10명이었다.
가장 작은 자의 키가 2미터에 달하고 가장 큰 사내는 3미터에 육박했다. 현존하는 여러 종족 중 오우거나 트롤을 연상케 할 정도로 거대한 덩치를 가진 자들은 천족과 마족 두 종족이다. 하지만 이렇듯 칙칙하고 음습한 기운을 뿌리는 자들이 천족일 리는 없을 터였다.
아니, 굳이 이들의 정체를 알려고 할 필요도 없었다.
사내들이 쓰고 있는 투구의 양쪽에는 달팽이 형태의 뿔이 달려 있다. 투구에 만들어 단 뿔이 아니라 머리에 난 뿔이었다. 달팽이 형태의 뿔을 머리 양쪽에 단 자들은 마족밖에 없었다.
문제는 뿔의 색이 흰색이라는 사실이다.
그것도 잡티 하나 없는 완전한 흰색.
다섯 계급이 있는 마족에게는 황금색, 은색, 녹색, 붉은색, 검은색 뿔이 있을 뿐 흰색 뿔은 없다.
다만 한 부류만이 흰색의 뿔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죄수들이었다.
10명은 말없이 그림자 숲을 바라보았다.
사방으로 가지를 뻗은 자이언트 트리 때문에 가지 아래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확인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다.
그것은 이곳 그림자 숲에는 야생의 이야크들이 살지 않는다는 것이고, 땅이 울릴 정도로 내달리는 수백 마리의 이야크는 전투용이라는 사실이다.
“누가 지금 상황에 대해 설명을 좀 해 봐.”
키가 가장 큰 자가 입을 열었다.
“그들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일행 중 가장 작은 자가 말을 받았다.
“프리메우스는 물론이고 데메우스 그놈도 아무 말 없었다. 아무래도 놈들이 나 칼베리언을 우습게 보는 모양이야, 켈러.”
만일 마족 중 누군가가 이들의 이야기를 들었다면 질겁했을 것이다. 칼베리언이란 마족이 언급한 프리메우스나 그의 아들인 데메우스는 마족들이 놀랄 만한 이름은 결코 아니었다. 진정 그들을 깜짝 놀라게 만드는 것은 칼베리언과 켈러란 이름이다.
그 이름의 주인들은 1천 년 전 붉은 학살자라는 닉네임으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붉은 학살자.
지난 2천 년 동안 마계에서 잔인한 범죄자들 목록 중 가장 상위에 올라 있는 열 명을 일컫는 말이다.
칼베리언을 비롯한 붉은 학살자 열 명이 모든 마족이 알 정도로 유명해진 것은 그들의 신분 때문이었다.
황금색 뿔을 가졌던 칼베리언은 마계10군단 부군단장이었고 나머지 아홉 명은 칼베리언의 심복들이자 마계10군단 참모들이었다.
칼베리언을 비롯한 열 명은 잡히기 전까지 무려 1천 년 동안 무수한 악행을 저질렀다. 열 명의 손에 죽은 마족의 수만 해도 10만 명을 헤아린다고 했다.
만일 군단장 암살에 연루되지 않았더라면 그들의 범죄는 영원히 밝혀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열 명이 저지른 범죄는 그만큼 치밀했다.
군단장 암살 또한 그들 짓이라는 것은 수사를 담당했던 수사관들의 심증에 불과했다. 단지 암살을 묵인한 사실만 드러났을 뿐이다.
마계에서 가장 큰 죄는 하극상이고, 결투를 제외한 다른 방법으로 상급자를 살해하게 되면 신분에 상관없이 극형에 처해진다. 그러나 칼베리언 일행이 군단장을 살해했다는 증거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직속상관의 암살 방조죄만 해도 엄청난 중죄였다. 결국 칼베리언과 그의 심복들은 모든 작위를 박탈당하고 ‘상급자 암살 방조죄’라는 죄목으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군단장이 죽고, 부군단장이었던 칼베리언이 종신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갇히자, 서열 3위였던 히데우스가 군단장에 올랐다.
그런데 지금도 감옥에 있어야 할 붉은 학살자들이 문 대륙에 나타난 것이다.
“그들도 모르는 의외의 상황인 모양입니다.”
켈러가 말했다. 켈러는 과거 붉은 학살자의 머리를 담당했다.
“켈러 넌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칼베리언이 물었다.
“문 대륙에서 저 정도 무력을 동원할 수 있는 세력은 블러드 데빌단밖에 없습니다.”
“블러드 데빌단?”
“천계와 마계에서 추방된 자들로 구성돼 있는 조직입니다.”
“추방자들이란 말이냐?”
“그렇습니다.”
켈러는 고개를 끄덕였다.
“실력은 어느 정도냐?”
“정확하게 알려진 것은 없지만 웬만한 마계군단 정도는 될 거라고 합니다. 특히 블러드 데빌단의 단장인 크로는 마계10군단 조장 급에 필적할 정도의 실력자라고 합니다.”
“나쁘지 않군. 히데우스의 근황은 어떠냐?”
칼베리언은 싱긋 웃으며 물었다.
그가 히데우스의 근황을 묻는 이유는 1천 년 전 사건 때문이었다. 칼베리언은 전 군단장이 죽던 날 밤 히데우스와 함께 술을 마셨다고 변명을 했다.
물론 히데우스에게도 미리 말을 해 두었다.
그가 증언만 해 주면 최상급 마족으로 이루어진 마족 평의회는 무죄를 선언했을 것이다. 마족 평의회 또한 그들과 같은 신분인 최상급 마족에게 하극상의 죄를 묻는 건 여간 껄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군단장의 직급이 상급 마족이기 때문이다.
히데우스가 함께 있었다고 증언만 해 주면 그들 또한 무죄를 선고할 참이었다. 그런데 히데우스가 모든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함께 술을 마신 적이 없다고 부인해 버린 것이다.
무죄와 종신형을 가르는 증언이었다.
그 증언으로 인해 칼베리언과 그의 심복들은 종신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갇혔다.
칼베리언이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히데우스를 찾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때의 빚 정리.
“그에 대해서는 데메우스가 알려 주기로 했습니다.”
“연락해 봐라.”
“알겠습니다.”
켈러는 품속에서 마법 통신구를 꺼내 한 손에 쥐고 마나를 주입했다. 잠시 후 마법 통신구 표면에 데메우스 얼굴이 나타났다.
데메우스는 주위를 살피는 듯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나다.”
칼베리언은 마법 통신구를 보며 낮게 말했다.
“지금 어디냐?”
“놈!”
칼베리언의 입에서 살기 어린 외침이 흘러나왔다.
“네가 그 지옥 같은 곳을 나올 수 있었던 게 누구 때문이었는지 잊은 모양이구나.”
“프리메우스 덕분에 나왔다는 거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내게 반항하면 어떤 결과가 올지도 잘 알겠구나.”
그 말에 칼베리언은 데메우스를 가만히 쏘아보았다.
프리메우스는 그냥 풀어 주지 않았다.
말을 듣지 않으면 마나가 꽁꽁 얼어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금제를 걸어 둔 상태고, 그 금제를 풀 수 있는 자는 프리메우스 본인과 그의 아들인 데메우스밖에 없다.
그렇다고 순순히 따를 수는 없었다.
“그러다 죽는다, 애송이.”
칼베리언은 얼음이 얼듯 차갑게 말했다.
“너, 너는 자유를 원하고, 난 네 힘을 원했다. 서, 서로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말은 가급적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큭!”
칼베리언의 입가에 조소가 어렸다.
아무리 자식의 결점을 보지 못하는 존재가 부모라고 하지만 저런 녀석을 군단장으로 앉히려는 프리메우스가 한심하기까지 했다.
‘하긴 그 때문에 내가 나올 수 있었으니까.’
칼베리언은 이내 빙그레 웃었다.
그러고는 데메우스를 보며 입을 열었다.
“우린 그림자 숲에 있다. 지금 히데우스가 있는 곳은 어디냐?”
“군단장은 마계10군단과 함께 은밀하게 따르는 중이오. 그림자 숲에서는 반나절가량 떨어져 있을 거요.”
죽는다는 말에 위축된 듯 데메우스는 반 공대를 했다.
“또 연락하도록 하겠다.”
“약속 잊지 마시오, 칼베리언.”
“히데우스 그놈에게는 나도 묵은 감정이 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넌 네 일이나 잘해라.”
“알겠소. 그림 리모스에서 보도록 합시다.”
데메우스는 마법 통신구의 활성 상태를 유지시켜 주는 마나를 제거했다. 그러자 마법 통신구가 원래의 색으로 돌아가며 칼베리언의 얼굴이 사라졌다.
“흥! 무식한 새끼.”
데메우스는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다른 마법 통신구를 꺼내 마나를 주입했다. 잠시 후 마법 통신구 표면에 프리메우스가 나타났다.
“방금 칼베리언과 연락했어요.”
“뭐라고 하더냐?”
“놈을 확실하게 금제한 거 맞아요?”
데메우스는 확인하듯 물었다.
“물론이다, 아들아. 금제가 발동하는 순간 놈은 한 줌 독수로 녹아 버리고 만다. 그런데 왜 그러느냐?”
“날 죽이겠다고 하더군요.”
“널 협박했단 말이냐?”
“네.”
데메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죽일 놈!”
프리메우스의 얼굴에 진득한 살기가 어렸다.
마계4원로가 되면서 현역에서 은퇴를 하긴 했지만 프리메우스 또한 전사 출신이다. 아니, 마족들 중 전사 출신이 아닌 자들이 없다. 최상급 마족인 그가 살기를 쏟아 내자 주위가 싸늘하게 얼었다.
이윽고 표정을 푼 프리메우스가 입을 열었다.
“놈은 내 말을 거역하지 못하니까 걱정하지 말거라. 놈에 대한 건 접어 두고 마계10군단을 장악할 준비나 해라.”
“순조롭게 진행하고 있어요. 히데우스와 이카렌 그리고 히데우스의 친위대만 사라지면 마계10군단을 장악하는 건 어렵지 않아요.”
“그건 내게 맡겨라.”
“알았어요.”
“난 이곳에서 너를 각성시킬 준비를 하겠다.”
“저, 정말인가요?”
데메우스는 감격한 얼굴로 물었다.
“넌 프리메우스 아들이자 홀리바인 가문의 차기 가주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데메우스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일이나 잘 처리하고 돌아오너라.”
“네, 아버지.”
“그럼 다음에 보자.”
마법 통신구에서 아버지의 모습이 사라지자 데메우스는 마법 통신구에서 마나를 제거하고는 주머니 안으로 집어넣었다.
“크크크!”
데메우스의 입에서 나직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계집!”
으드득!
입에서 이 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 * *
두두두두! 두두두두!
여섯 마리의 이야크들이 무서운 속도로 벌판을 질주했다. 세 마리 이야크에는 두 명씩 탔고, 다른 세 마리는 안장만 올려져 있었다.
이들은 그림자 숲에서 빠져나온 김필도 일행이었다.
쐐애액!
이카렌이 시위를 놓자 공기 가르는 소리를 내며 화살이 쏘아져 갔다.
꾸에엑!
곧이어 이야크의 비명이 들려왔다.
“좀 정확하게 맞출 수 없어?”
김필도는 뒤를 흘끔 바라보며 말했다.
이카렌은 지금껏 열 대의 화살을 쏘았는데 블러드 데빌단 단원은 한 명도 맞히지 못하고 이야크만 없앴던 것이다.
물론 이야크의 달리는 속도가 엄청나기 때문에 처박히게 되면 중상을 입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운이 따른다면 부상을 입지 않을 수도 있다.
놈들의 추격 의지를 꺾는 방법은 화살에 맞으면 죽는다는 걸 보여 주는 것만이 유일했다. 그런데 이야크만 쏘고 있으니 제대로 위협이 될 리가 만무했다.
“저자들이 걸친 갑옷은 세기이온과 크레디온이야.”
이카렌은 항변했다.
“그게 어쨌다고?”
“내가 가진 화살로는 저들의 기갑을 뚫을 수가 없어.”
“기갑을 뚫을 수 있는 화살이 있기는 해?”
“세 가지 마나가 합쳐지면 가능해.”
“이를테면?”
“물, 바람, 땅이나, 바람, 땅, 불 등, 세 가지 마나를 동시에 주입할 수 있다면 전투기갑을 뚫을 수 있어.”
“세상에!”
김필도는 깜짝 놀랐다.
실전 마법은 모든 마법을 잡는다고 하였던 요른의 말이 떠올랐다. 그가 말한 모든 마법에는 천족이나 마족 또는 인간들이 착용하는 기갑도 포함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혹시 저 녀석들이 걸친 기갑, 마법으로 만드는 거야?”
“마법이 아니면 무슨 수로 그런 기갑을 만들어 내겠어?”
“그랬구나.”
아주 귀중한 정보였다.
물론 실전 마법에는 인첸트 마법이 없으니 화살에 마나를 주입할 수도 없다. 게다가 세 가지 마법을 한 지점에 동시에 모으는 것도 아직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언젠가는 익히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비로소 천존과 마족 앞에 당당히 서게 되리라. 아니, 어쩌면 내려다보게 될지도.
“타앗!”
김필도는 채찍을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