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 김필도-38화 (38/225)

# 38

두두두두두! 두두두두두!

블랙칸은 무서운 속도로 질주했다. 김필도와 이카렌을 태운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혼자 달리는 것처럼 빨랐다.

하지만 다른 이야크들은 달랐다.

3시간 이상 이어진 전력질주에 점차 지쳐 가고 있었다.

“다 왔습니다!”

김필도는 크게 소리쳤다.

저 멀리 거대한 협곡이 눈에 들어왔다. 폭이 1천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협곡은 리모스와 루루시아의 경계인 헤린느 협곡이었다.

헤린느 협곡에는 이야크 한 마리가 지나가면 꽉 찰 정도로 폭이 좁은 다리가 길게 놓여 있었다.

거윈의 다리와 마찬가지로 고대에 만들어졌으며 골든 브리지란 이름으로 불린다.

“멈추게!”

뒤따라오던 톰벨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왜 그러십니까?”

김필도는 블랙칸을 멈추었다.

그와 이카렌을 태운 블랙칸은 어느새 골든 브리지 앞에 당도해 있었다. 고삐를 풀어 주면 곧바로 진입할 태세였다.

“그 다리는 끊겼네.”

톰벨은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일행이 멈춰 서자 블러드 데빌단과의 거리는 급격하게 좁혀졌다. 블러드 데빌단 또한 다리가 부러진 것을 알고 있는 듯 화살 쏘는 걸 멈춘 채 반원을 그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뒤쪽 다리가 아니면 김필도 일행은 갈 곳이 없었다.

“끊겼어요?”

김필도는 톰벨을 돌아보았다.

“4백 미터 지점에서 끊겨 있네.”

톰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골든 브리지 또한 과거에 와 본 곳이었다.

“끊긴 거리는 어느 정도죠?”

“3백 미터 정도 되네.”

“뛰어넘는 건 불가능하겠네요.”

김필도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는 사이에 블러드 데빌단이 30미터 앞까지 다가왔다. 반원을 그리며 다가오고 있어 빠져나갈 곳도 없었다.

“난 블러드 데빌단 단장 크로다.”

선두로 나온 자의 입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검은 갑옷을 걸친 자는 키가 2미터 50센티미터쯤 되어 보이는 마족이었다.

“난 마계10군단 부군단장 이카렌이에요.”

이카렌은 세이프 벨트를 풀고 블랙칸에서 내렸다.

“나는 대천신군의 부군장 라이자칸이오.”

이번엔 라이자칸이 이야크에서 내렸다.

“거물들이었군.”

투구 속 크로의 얼굴에 언뜻 당황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가 들은 정보에는 리모스로 들어가는 지도를 가진 자들 중에 마계10군단이나 대천신군 대원들이 있다는 내용은 없었다. 그런데 일반 대원 급이 아니라 2인자들이 일행에 포함돼 있다니.

문득 일이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릴 뒤쫓은 이유를 알고 싶군요.”

이카렌은 차갑게 물었다.

“난 귀하들을 뒤쫓은 게 아니라 리모스로 들어가는 지도를 쫓았소. 아울러 귀하들이 마계10군단과 대천신군 소속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소.”

“눈이 나쁜가 보죠?”

입고 있는 갑옷을 보지 못했느냐는 질문이었다.

“난 귀하들이 추방자인 줄 알았소.”

“흥!”

이카렌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그녀는 아공간을 열고 검을 꺼냈다.

“헛! 무슨 놈의 검이.”

김필도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카렌이 꺼낸 건 검이 아니라 거대한 널빤지 같다.

그동안 수차례 보았지만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는다.

검신은 피처럼 붉고 길이는 손잡이를 포함하여 2미터나 된다. 폭은 20센티미터 정도 되는데 기름을 칠한 것처럼 반들반들하다. 손잡이 위쪽의 가드는 불꽃 문양으로 만들어져, 금세라도 불길이 피어오를 듯하다.

“가드에서 불길이 나와서 검을 달구면 기가 막힌 불판이 되겠네.”

널따란 판을 보자 갑자기 삼겹살이 먹고 싶었다.

“발탄 제국에서는 돼지를 기르던가?”

김필도는 루시안의 기억을 떠올렸다.

다행히 발탄 대륙에서는 돼지를 기르고 있었다. 그것도 크고 비계가 두꺼운 흰색 돼지가 아니라 흑돼지를.

“배에서 삼겹살을 잘라 낸 다음 잘라서 무쇠 불판에 놓고…….”

꾸울꺽!

입 안 가득 고인 침을 삼키면서 이카렌의 검을 바라보았다.

“바, 발콘(Balkon)!”

그때 경악에 찬 크로의 외침이 들려왔다.

“무슨 소리요?”

김필도는 라이자칸을 보며 물었다.

“이카렌이 든 검의 이름이네.”

“유명한가 보죠?”

“마계 3대 명검 중의 하나네.”

“이것도 명검 축에 들어가는 건데.”

김필도는 제 엉덩이 쪽에 튀어나온 설풍을 가리켰다.

“작고 얇구먼.”

라이자칸은 설풍을 흘끔 보며 말했다.

“작은 고추가 맵다는 말을 아직 모르는군요.”

“괜찮은 검이란 말인가?”

“직접 보시죠.”

김필도는 설풍을 뽑아 라이자칸 앞으로 내밀었다.

“좋은 검이구먼. 그런데 누가 사용하던 검인가?”

하지만 좋은 검이라는 말과는 달리 감탄한 표정은 아니었다. 천족의 입장에서 보면 그저 그런 검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6백 년 전에 만들어진 검인데 그저 그렇다는 겁니까?”

김필도의 목소리엔 불만이 가득 배어 있었다.

“이카렌이 들고 있는 저 검은 3천 년 전에 만들어졌고, 전 주인은 발콘 타무르 렉테이커였네.”

“끙!”

김필도는 할 말이 없었다.

이곳은 1천 년이란 세월을 마치 1년 정도로 생각한다는 걸 잠시 잊었다. 명도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설풍은 명함도 못 내미는 곳이었다.

“솜씨 좋은 드워프를 만나면 자네 체형에 맞는 검 하나 만들어 달라고 하게. 아마 조금만 더 좋은 검을 가졌더라면 헬만의 허리를 잘라 냈을 거네.”

“이 녀석이 부족해서 그놈 허리를 잘라 내지 못했다는 말입니까?”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네.”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발콘이란 마족은 강한 검사였나 보죠?”

검사의 이름을 따서 검명을 지었고, 세상 사람들이 알아볼 정도면 일반 검사는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3천 년 전 마계 최강 검사로 알려졌던 자네.”

“그런데…….”

“그의 제자인 이카렌은 고스트 크레디온을 간신히 이길 정도밖에 안 되냐는 말인가?”

“네.”

“발콘은 상급 마족인 공작이었고, 그녀는 중급 마족인 백작이기 때문이네.”

“고급 기술을 알고 있다고 해도 힘이 부족하면 펼치지 못한다는 말이군요.”

“그렇네.”

“고급 기술을 펼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되죠?”

“각성을 하거나, 마나가 집약된 마나단을 복용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면 되네.”

“마나단?”

“드래곤 하트 같은 거 말이네.”

“그렇군요.”

김필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크로를 보았다.

크로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쯧!”

김필도는 혀를 찼다.

크로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마음 같아서는 쓸어버리고 싶을 테다. 하지만 나중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생명체가 살아가기 힘들다는 문 대륙에서도 꿋꿋하게 살고 있는 자들이 아닌가.

“결정을 빨리 하는 게 좋을 거예요.”

이카렌은 발콘으로 크로를 겨냥했다. 마족들에게 있어 검으로 상대방을 가리키는 것은 곧 도전하겠다는 의사 표현이었다.

도전을 받게 되면 상대방은 검을 뽑아 마주 겨냥하든지 아니면 몸을 돌려 떠나면 된다.

“물러가겠소!”

크로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블러드 데빌단은 천천히 물러났다.

“우리에게 리모스로 들어가는 지도가 있다고 한 자들이 누구죠?”

이카렌은 물러나는 크로를 보며 물었다.

“사냥꾼들이었소.”

“몬스터 사냥꾼?”

“그렇소.”

“훌륭한 선택이었소, 크로.”

김필도는 멀어지는 크로를 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내가 겁이 나서 물러선다고 생각하느냐?”

크로는 이야크를 세웠다.

“당신 마음을 내가 알 리가 없잖소. 다만 나는 그렇게 살아와서 하는 말일 뿐이오.”

“어떻게 살았단 말이냐?”

“겁이 날 경우엔 바로 도망을 쳤소.”

“마음을 바꿀 수도 있다, 인간 놈!”

크로의 몸에서 살기가 쏟아져 나왔다. 그가 물러나는 건 결코 라이자칸이나 이카렌 때문은 아니었다. 그들 뒤에 있는 대천신군과 마계10군단 때문이었다.

“저치들은 어쩌고.”

김필도는 벌판 남쪽과 북쪽을 가리켰다.

크로는 고개를 돌렸다.

남쪽에서는 검은색 전투기갑을 걸친 자들이 이야크를 몰고 오는 중이고 북쪽에서는 황금색 전투기갑을 걸친 자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마계의 마계10군단과 천계의 대천신군이었다.

블러드 데빌단 대원들의 얼굴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문 대륙에서는 최강 세력이라고 하지만 마계10군단이나 대천신군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하다.

우선 대원들의 수부터 엄청나게 차이가 난다.

마계10군단은 1천 명이고, 대천신군은 1천5백 명이나 된다. 반면에 블러드 데빌단은 3백 명.

전투를 치른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천천히 후퇴하라!”

크로는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블러드 데빌단은 잔뜩 긴장한 채로 이야크를 후진시켰다.

블러드 데빌단이 뒤로 빠지고 있지만 히데우스나 세이아칸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들의 관심사는 오직 건너편에 있는 자들이었다.

어느새 양측의 거리는 5백 미터로 가까워져 있었다.

긴장감이 양측에 흘렀다.

“라이자칸!”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세이아칸이었다.

“말씀하십시오, 천좌!”

“보고하라!”

“인간이 안내한 곳은 여기까집니다. 천좌.”

“자세히 말하라!”

“골든 브리지가 리모스로 들어가는 입구라고 하였습니다.”

“골든 브리지가 입구라고?”

세이아칸은 골든 브리지를 보았다. 골든 브리지는 1천 미터에 달하는 길이를 제외하면 아주 평범한 다리다. 그마저도 중간 3백 미터가량이 떨어져 나가고 없다.

그런데 입구라니.

“맞느냐?”

이번엔 김필도를 보았다.

“오픈(Open)!”

김필도는 아공간을 열어 안쪽으로 고개를 들이밀고 작은 상자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에는 요른으로부터 받은 맹약의 구슬이 들어 있었다.

김필도는 맹약의 구슬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레드 드래곤 이나함이 남긴 맹약의 구슬이었다.

맹약의 구슬은 탁구공보다 약간 크다.

사실 드래곤들이 맹약의 구슬을 던지는 행위는 성룡이 됐음을 축하하여 뿌리는 선물 같은 것이다.

설령 맹약의 구슬을 줍는다고 해도 드래곤을 만나 뭔가를 요구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드래곤을 만나는 게 하늘의 별 따기이기 때문이다.

운이 좋아 드래곤을 만난다고 해도 ‘날 주인으로 모셔!’ 또는 ‘황제로 만들어 줘!’ 같은 허무맹랑한 소원을 빌었다가는 그 자리에서 맞아 죽는다.

자신의 처지에 어울리는 소원을 빌어야 한다.

그렇다고 자신에게 어울리는 소원을 빌자고 평생 드래곤을 찾아다닐 수도 없다.

결국 맹약의 구슬은 자식에게 물려주든지 돈을 받고 팔게 된다. 당연 권력자에게로 모일 수밖에 없다.

루시안이 맹약의 구슬 다섯 개를 가지고 있었던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다르지.”

김필도는 붉은 구슬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나함은 성룡이 되던 해에 그녀의 하트로 구슬을 만들었고, 비밀의 방에서 더욱 강화시켰다.

드래곤 본체 상태에서 강화한 것보다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10클래스 마법사의 힘이 담겼다.

누군가의 인생을 바꾸기엔 충분한 힘이다.

물론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김필도가 유일하다.

“이카렌!”

김필도는 아공간에 고개를 밀어 넣은 채 이카렌을 불렀다.

“왜?”

이카렌은 김필도를 돌아보았다.

“이리 와 봐.”

김필도는 신의 눈물 한 병을 빼 들었다. 그러고는 이나함의 구슬을 입 안으로 집어넣었다.

“좋은 거라도 주려고?”

김필도 옆으로 이야크를 몰아간 이카렌은 아공간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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