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
푸스스!
로브는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그렇게 모든 로브를 차례로 가루로 만들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김필도는 실망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짐을 아공간 안에 집어넣고 난 후에 몰살을 당했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저 안쪽은 정리하지 못한 것 같은데.”
김필도의 시선이 오른편으로 향했다.
가루로 만들었던 로브들은 문 주위에 몰려 있었다. 그건 곧 누군가를 그곳으로 들이지 않으려 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선 그의 얼굴은 어떤 기대감으로 인해 잔뜩 상기됐다.
“끙!”
하지만 이내 실망으로 일그러졌다.
문 안쪽은 작은 방이었다. 하지만 그곳 역시 다른 장소처럼 텅 비어 있었다.
아니, 한 가지는 있었다.
“어떤 자식이 여기서 복숭아를 처먹었나.”
바닥에 복숭아씨처럼 보이는 뭔가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김필도는 얼른 주워 들었다. 그러고는 한참을 살폈다.
진짜 복숭아씨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특별해 보이지도 않았다.
“빛의 땅에서 얻은 게 기껏 씨앗이라니. 젠장!”
김필도는 바로 앞에 수북하니 쌓인 가루를 걷어찼다.
퍽!
둔탁한 뭔가가 발에 걸렸다.
그는 가루를 헤집어 보았다. 가루 안쪽에는 두께 0.5센티미터가량 되는 얇은 판 하나가 놓여 있었다. 판 또한 하만티움으로 만든 듯 상태는 완벽했다.
김필도는 판을 주워 들었다. 판 위에 글이 씌어져 있었다.
-이제 머잖아 그가 올 것이다.
김필도는 입으로 바람을 불어 석판에 앉은 가루를 털어냈다. 그리고 창가로 갔다.
창 너머로 리모스를 바라보며 아공간을 열고 의자를 꺼냈다. 그러고는 카판 끓일 준비를 했다.
주전자를 꺼내고 불의 마법 세딕(Sedic)과 바람의 마법 라콰(Laqwa)를 펼쳐 토치라고 부르는 불길을 만들어 냈다.
쇄애액!
바람을 약간 강하게 하자 불길이 제법 세졌다.
그 불로 물을 끓였다. 물이 끓고 나자 또호야 잎을 깔때기처럼 만들어 카판을 넣고 컵에 걸쳤다. 그러고는 한 김 빠져나간 물을 부었다.
카판 냄새가 잔잔하게 피어올랐다.
카판이 내려지기를 기다리며 다시 판을 바라보았다.
“역시 뭐가 됐든 배워야 해.”
문득 요른으로부터 고대어를 배워 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은 천족, 마족, 드래곤, 엘프, 드워프, 인간, 여섯 종족이 있는 걸로 알지만 실제로는 한 종족이 더 있다.
그들을 일컬어 우린 철을 다루는 자들이라고 하여 철족이라고 불렀다.
철족이 남긴 발자취는 무수히 많다.
평화의 시기에는 호미와 괭이를 비롯한 농기구를 만들었고 전쟁이 벌어지면 무기를 만들어 각 종족에 공급해 왔다. 신마 전쟁 때도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천족의 세이기온을 만들고, 마족의 크레디온을 만들고, 엘프와 드워프, 인간의 전투전갑이었던 프라이온을 만들었다.
물론 제작 방법을 제공한 쪽은 우리였다.
그 무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실전 마법이 싹트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사실 실전 마법은 살상용이 아니었다.
쇠나 하만티움 또는 다른 금속을 좀 더 효과적으로 다루기 위해 만들어진 실용 마법이었다.
처음엔 우리도 그들의 마법을 그다지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실전 마법을 무기 안에 불어넣으면서 상황이 돌변했다. 놀랍게도 철족의 실전 마법이 실린 무기들이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신기가 돼 버린 것이다.
각 종족의 수장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전쟁의 와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철의 종족을 제거하는 결정을 하기에 이르렀다.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철족이 제작했다는 신기 헤를리온 때문이었다. 그들이 지금까지 만들어 왔던 모든 전투기갑들의 장점이 총망라됐다는 최강의 전투기갑 헤를리온.
그걸 탈취하기 위해 그들을 치기로 했던 것이다.
이미 충분한 수의 전투기갑을 보유하였고, 제작하는 방법까지 입수했기에 더 이상 그들에게 의지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은밀하게 척살대를 보내 철족을 공격했다. 일주일 후 20만 명에 달하는 철족을 몰살시켰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물론 그 보고서에는 철족의 족장이었던 헬칸(Hell kan)의 심장에 검을 찔러 넣었다는 보고도 포함돼 있었다.
그런데 보고뿐이었다.
5만 명에 달했던 별동대는 단 한 명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철족은 역사에서 지워졌다.
그리고 누구도 그 일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채 우리는 전쟁을 계속했다.
그리고 1천 년 후.
그들이 나타났다.
심장이 찔려 죽었다고 하였던 철족의 족장 헬칸과 헬이라고 불렸던 5천 명의 결사대가.
실전 마법으로 무장한 그들은 1만 년 동안 이어진 전쟁으로 피폐해져 있던 우리를 공격해 왔다.
그러나 우린 강했다.
전투를 치를수록 그들의 수는 조금씩 줄어들었고, 이곳 리모스로 들어왔을 땐 단 두 명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우린 그들을 리모스로 들이지 않고 막아 낸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피해도 엄청났다.
더 이상 전쟁을 치를 여력이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완전하게 망가진 상태였다.
리모스로 들어온 둘은 철의 종족의 마지막 족장인 헬칸과 그의 아내이자 몬스터의 왕이라 부르는 하이 오드인 카라(Kara)였다.
그 둘은 우리가 그렇게 얻기를 원했던 헤를리온을 착용하고 있었다. 천족, 마족, 엘프, 드워프, 인간으로 구성된 1천 명의 결사대가 그 둘에게 죽었다.
하지만 우린 이곳을 떠날 수가 없다.
왜냐면 우리가 떠나면 그들은 먼저 떠난 우리 가족들을 쫓아가 없앤다고 했으니까.
이곳에서 그를 죽이지 못하면 우리가 죽게 될 것이다.
신이여 부디 우리를 돌보아 주소서.
“인과응보네.”
그렇다면 신마전쟁은 스스로 자멸해서 끝난 게 아니고 철의 종족들에 의해 종식됐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 역사에는 철의 종족은 언급돼 있지 않다.
비록 철의 종족과의 전쟁에 패했다고 하지만 살아남은 종족들은 철의 종족을 역사로 기록하지 않음으로써 존재하지 않았던 자들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의 기록이란 누군가의 말이 그대로 증명된 경우라고 할 수 있었다.
“다 식었잖아.”
김필도는 피식 웃으며 카판을 마셨다.
“헬칸을 찾으면 대박일 텐데…….”
카판 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헬칸이 은거한 곳을 찾아 헤를리온을 얻는다면 지금까지 익혀 왔던 실전 마법이 완벽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디 있는 줄 알고 찾아 나설까.
“꿈은 빨리 깰수록 좋다, 김필도. 꿈보다는 현실에 집중해.”
김필도는 남은 카판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그러고는 아공간을 열고 카판을 끓였던 도구와 의자를 집어넣었다.
“무기고 같은 곳을 찾아내면 좋은데.”
김필도는 방 안에 쌓인 가루를 헤집고 돌아다녔다. 혹시 이곳에서 리모스의 지도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하지만 바닥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무기고를 찾으려는 이유는 전투기갑 때문이다.
지금보다 몇 배 강해지고, 마족이나 천족 앞에 당당하게 서기 위해서는 전투기갑을 착용하는 수밖에 없다.
물론 그는 전투기갑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떻게 착용하는지 알지 못한다.
전투 기갑에 대해 아는 거라고는 인간이 사용한 전투기갑은 프라이온과 페라시온이 있는데, 프라이온은 고대에 사용했던 전투기갑으로 전투전갑이라 부르고, 페라시온은 프라이온을 바탕으로 만든 전투기갑으로 전투평갑이라고 부른다는 것 정도였다.
생김새를 비롯하여, 전투 능력 등은 극비 시항이라 알 방법이 없었다.
문득 이곳으로 오기 전에 이카렌에게 물어보았더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봐야 의미는 없겠지만.”
문득 맥이 탁 풀렸다.
헬칸과 헬에 대한 걸 몰랐다면 일말의 기대라도 했을 터인데 지금은 그런 기대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그들에게 당한 결사대가 1천 명이 넘었는데 전투기갑이 남아 있겠나 싶었다.
김필도는 조금 전 나왔던 마법진으로 올라갔다.
“힘내라, 김필도. 넌 이제 시작했을 뿐이야.”
김필도는 자신을 다독이며 공간 이동 마법을 펼쳤다.
잠시 후 그는 새로운 장소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또 길을 잘못 들었네.”
김필도는 거칠게 머리를 긁적였다.
그가 나온 곳은 처음 들어갔던 그 건물이 아니었다.
창! 창창! 창창창!
콰앙! 쾅쾅! 쾅쾅쾅!
밖에서 무기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김필도는 창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무튼 쟤는!”
밖을 내다보던 김필도의 얼굴이 슬쩍 일그러졌다.
길에서 싸우고 있는 자들은 전부 마족이었다. 50여 명은 공격하고 한 명은 방어를 하고 있는데, 방어를 하는 그 한 명이 이카렌이었다.
“부군단장을 공격하는 건 하극상인데… 저놈이 괜찮은 빽을 가졌나 보네.”
김필도의 시선이 데메우스에게로 향했다.
한눈에 보아도 50여 명의 대장은 검은색 뿔을 가진 데메우스임을 알 수가 있었다. 물론 김필도는 데메우스를 알지 못한다. 다만 검은색 뿔을 가진 자가, 신분으로 따지면 가장 낮은 신분의 마족이 팔짱을 낀 채로 싸움을 지켜보고 있기에 대장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카렌은 연신 뒤로 밀리고 있었다.
비록 부군단장까지 오른 실력자라고 하지만 상대는 50명. 그들 전부를 상대한다는 건 무리인지도 몰랐다.
콰앙!
“커억!”
쩌쩌적!
고통에 겨운 비명과 함께 이카렌을 공격하던 마족 한 명의 전투기갑에 금이 쩍쩍 갔다.
퍼억!
이어 둔탁한 소리와 함께 기갑이 산산이 부서지며 떨어져 나갔다.
파앗!
그리고 마족의 심장에서 피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아악!”
처절한 비명이 마족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심장에서 피가 터져 나오더니 이번엔 온몸이 쩍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기갑과 몸은 하나라는 소린가?’
김필도는 고개를 갸웃했다.
폭풍의 힘을 내포하고 있다는 이카렌의 검 때문인지, 아니면 전투기갑 때문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콰앙!
쩌억!
“크악!”
또다시 마족의 비명이 들려왔다.
“으음!”
이카렌 또한 무리를 한 듯 신음을 흘렸다.
연신 뒤로 물러나고 있는 그녀의 입에서 거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데메우스는 잔뜩 상기된 얼굴로 고함을 내질렀다.
“계집이 지쳤다. 더욱 밀어붙여라!”
데메우스의 입가엔 차가운 미소가 맺혀 있었다.
“네년은 모를 거다. 내가 네년의 검에 서치 파우더를 뿌려 놓았다는 사실을. 그 서치 파우더는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다, 계집.”
데메우스가 이카렌을 발견한 건 우연이 아니었다.
그는 리모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이카렌을 찾았다. 원래는 이카렌도 칼베리언 일행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그랬다가 마음을 바꿔 직접 나선 이유는, 히데우스가 칼베리언과 싸우기 직전 차기 군단장으로 이카렌을 지목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마족 평의회 재가라는 절차가 남아 있지만 그건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하다. 보통은 전 군단장이 지목한 자를 군단장으로 삼는 게 관례였다.
아버지가 중간에 손을 써보긴 하겠지만 특별한 이변이 없는 한 이카렌은 군단장이 될 것이다.
데메우스가 이카렌을 찾아온 건 그 특별한 이변을 만들기 위해서다. 하이닐이 이끄는 친위대가 그녀를 찾기 전에 없애 버릴 생각이었다.
쉬이익!
콰앙!
“커억!”
쩌어억!
“크아악!”
대원 한 명의 몸이 폭죽처럼 터져 나갔다.
“죽일 년!”
데메우스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이카렌이 본격적으로 폭풍의 힘을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하지만 넌 완전하지 않아, 왜냐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