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 김필도-43화 (43/225)

# 43

데메우스는 차가운 눈으로 이카렌을 노려보았다.

마족의 힘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신분이다. 즉 최상급 마족이 가장 강하다는 말이다.

물론 개개인의 능력과 드래곤 하트 같은 마나단을 복용한다면 달라지겠지만, 외적인 요인이 작용하지 않는 순수한 상태라면 중급 마족은 상급 마족을 이길 수 없고, 상급 마족은 최상급 마족을 이길 수 없다.

그건 마족의 무기인 검에도 적용된다.

폭풍의 검 발콘을 사용하던 발콘 타무르 렉테이커는 상급 마족이었기 때문에, 그의 검을 자유롭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상급 마족은 되어야 한다. 아니면 마나단 등을 복용하여 상급 마족에 필적하는 마나를 보유하고 있든지.

그러나 데메우스가 알기론 이카렌은 마나단 같은 기연을 얻은 적이 없다. 폭풍의 힘을 남발하다 보면 금세 지치고 만다.

데메우스가 기다리는 건 그때였다.

콰콰쾅!

찌찌찍!

퍼억!

“아악!”

또 한 명의 마족이 폭발했다.

하지만 이번엔 이카렌도 무사하지 못했다.

연속해서 중급 마족 세 명을 없애고 나자 급격하게 피로감이 밀려온 탓일까. 물러나던 그녀가 휘청했다.

“계속 몰아쳐!”

이카렌을 살피고 있던 데메우스가 버럭 소리쳤다.

굳이 데메우스의 외침이 아니더라도 이카렌의 상태는 싸우고 있는 자들이 더 잘 알았다. 그들은 물러나는 이카렌을 향해 달려들었다.

‘역시 무린가?’

이카렌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수백 번의 싸움을 했다.

하지만 모든 싸움이 일대일 대결이었다. 일대일로 싸울 때에는 승자와 패자만 가리면 되기 때문에 폭풍의 힘을 적절하게 사용하면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승패를 가르는 싸움이 아니라 패자는 죽임을 당하는 생사투. 일검 일검에 전력을 다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그녀가 없앨 수 있는 수는 10명 남짓이다.

사실 그 정도만 해도 거의 상급 마족을 넘어서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야겠지!’

휘익!

콰앙!

발콘이 허공을 가르고 굉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또다시 마족 한 명이 전투기갑과 함께 터져 나갔다.

그렇게 20명을 없앴을 때 이카렌은 뒤쪽 건물 벽에 등을 대고 있었다.

이카렌의 입가에 피가 비쳤다. 한계를 넘어선 공격에 몸에 무리가 가고 있음이 여실히 드러났다.

“헉! 헉!”

이카렌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는 지금 서 있을 힘도 없었다. 건물 벽이 아니었다면 진작 쓰러지고 말았을 것이다.

“물러나라!”

바로 그때 데메우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마족들은 일제히 물러났다. 그들이 물러난 거리는 20미터였다.

“이제야 발악이 끝난 모양이구나, 계집.”

데메우스는 이카렌을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네가 사내라면 직접 나서라, 데메우스. 군단장이 되고 싶으면 날 꺾으란 말이다.”

이카렌은 손가락을 까딱이며 도발했다.

지금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데메우스를 도발하여 직접 나오게 하여 없애는 것뿐이었다.

사실 데메우스를 없앨 자신도 없다. 하지만 모험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전에 네가 한 말 기억하는지 모르겠구나.”

데메우스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무슨 말 말이냐?”

“네가 그랬을 거야. 넌 강한 마족보다는 생각이 깊은 전사를 더 선호한다고 말이야.”

데메우스는 비아냥대듯 말했다.

“그러니까…….”

“나도 네 말에 전적으로 동감해. 가만히 두면 제 풀에 쓰러져 뒈질 년에게 기회를 주는 어리석음을 범할 것 같으냐?”

“마계10군단 대원들이 널 인정할 거라고 보느냐?”

“인정하는 자는 마계10군단에 남는 거고, 인정하지 않는 자는 이곳 문 대륙에서 살게 될 거야. 추방자로 말이야. 어쩌면 그놈들 중 네 무덤에 술 한 잔 부어 줄 자가 생길지도 모르겠구나. 그럼 잘 가라, 계집!”

데메우스는 뒤로 물러났다.

“처형식을 집행하라!”

데메우스는 낮게 소리쳤다.

“차앗!”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마족 한 명이 이카렌을 향해 빛살처럼 쏘아져 갔다.

마계10군단의 처형식.

그것은 배신자를 처단할 때 주로 사용한다.

처음엔 한꺼번에 공격을 감행하다가 지금 이카렌처럼 힘이 빠졌을 때 처형식을 시작한다.

처형식은 마계10군단 대원들이 순차적으로 돌아가며 공격하는데 한 명당 일검으로 그친다. 하지만 그 일검엔 공격자의 모든 힘이 담긴다.

처형당하는 자는 이미 힘이 빠진 상태에서 공격자의 전력이 담긴 일격을 받아 내야만 하는 것이다.

30번의 공격을 받아 내면 살려 준다는 규칙이 있긴 하지만 지금까지 그 공격을 받아 낸 자는 아무도 없다.

결국 처형 대상은 검이 먼저 부러지고 그 다음에는 머리가 부서져 죽는다.

쇄애익!

첫 번째 공격이 이카렌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이카렌은 발콘을 들어 올렸다.

콰앙!

검과 검이 부딪치며 굉음이 터져 나왔다.

“크윽!”

이카렌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차앗!”

채 호흡을 가다듬기도 전에 두 번째 공격이 이어졌다. 이카렌은 이를 악물었다. 그러고는 검을 번쩍 들어 올렸다.

콰쾅!

“커억!”

입이 쩍 벌어지고 피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이카렌은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꼈다.

이제 두 번. 아직 28번이 남았다. 그걸 다 받아 낸다고 해도 데메우스가 살려 줄 리는 없겠지만 가능하다면 받아 내고 싶다.

‘그것만 녹일 수 있다면.’

문득 김필도가 넘겨 준 마나단이 떠올랐다.

그걸 녹였더라면 저들을 전부 없애 버렸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쐐애액!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한 기운이 머리 위에서 떨어져 내렸다.

이카렌은 반사적으로 검을 들어 올렸다.

콰아앙!

“크윽!”

다리에서 힘이 풀리며 이카렌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쯧! 숨어서 맹약의 구슬이나 녹일 일이지는.”

아래를 내려다보던 김필도는 혀를 찼다.

지금 상태로 나가면 이카렌은 몇 합 버티기도 전에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

“이걸 믿는 수밖에 없겠네.”

김필도는 설풍을 꺼내 들었다.

전에 이야크 평원에서 헬만에게는 먹히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의 내가 아니지.”

김필도는 차가운 눈으로 전면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많은 실전을 했고, 육감까지 깨웠다.

압도적인 승리를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허망하게 당하진 않을 것이다.

휙!

바로 그때 마족 한 명이 이카렌을 향해 쏘아져 가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검은 뿔을 가진 녀석이 다음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뇌로 보이는 녀석이 다음 순서라는 건 이카렌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뜻이다.

기다릴 상황이 아니었다.

“헤이!”

김필도는 창틀로 올라가며 소리쳤다.

“응?”

데메우스는 깜짝 놀랐다. 창문에 나타난 자는 전에 이야크 평원에서 보았던 그 인간 놈이었다.

“안녕!”

김필도는 설풍을 양손으로 쥐고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바닥까지는 20미터다.

“흐읍!”

그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나 S대 학사 사시미 김필도여, 새끼들아!”

파앗!

김필도는 창틀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제9장 실전의 극한은……

페곤은 깜짝 놀랐다.

처형식을 할 때 맨 처음으로 검을 부러뜨리거나, 머리를 부수는 자는 큰상을 받는다.

그 상은 다름 아닌 일 계급 특진이다. 아니, 굳이 일 계급 특진이 아니더라도 처형되는 자의 검을 부러뜨리거나 목을 치게 되면 무한한 행운이 따른다는 속설이 있다.

그 때문인지 처형식이 거행되면 대원들은 행운의 기회를 잡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하지만 처형되는 자의 머리를 부수는 행운은 쉽게 오지 않는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책임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오늘 이카렌의 머리를 부술 자는 데메우스인 것이다.

데메우스가 바로 뒤에 섰다.

그건 곧 이번에 검이 부서질 거란 말이기도 하다. 아니, 역으로 말하면 반드시 부수라는 명령이기도 하다.

전력을 다해 발콘을 부술 수밖에 없다.

이윽고 모든 힘을 끌어올린 채 몸을 날리고 있는데, 인간 녀석이 위에서 뛰어내린 것이었다.

페곤은 갈등했다.

검의 방향을 바꿔 녀석을 공격하면 얼마든지 처리가 가능하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행운을 얻을 기회가 날아가고 만다. 더구나 차기 군단장이 될 데메우스가 기다리고 있는 상황.

‘무시하고 간다!’

페곤은 결정을 내렸다.

그는 자신의 실력과 전투마갑 크레디온의 방어력을 믿었다. 폭이 10센티미터도 안 돼 보이는 인간의 검을 튕겨내 버릴 거라고.

“저년의 검을 부순 다음에 네놈도 없애…….”

차르릉! 스악!

날아가던 페곤의 신형이 우뚝 멈췄다.

페곤은 양팔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려 검 손잡이를 쥔 상태였다. 그런 그의 왼팔을 향해 설풍이 떨어졌다.

김필도를 지켜보던 모든 마족들은 얇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설풍이 부러질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심지어 흐릿한 눈빛으로 지켜보던 이카렌마저도 그렇게 생각했다.

2미터 길이에 폭이 20센티미터나 되는 대검을 사용하는 그들에게 김필도가 든 설풍은 무기가 아니라 회초리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눈을 의심해야 할 사건이 벌어졌다.

놀랍게도 회초리처럼 보였던 그 무기가 페곤의 왼팔 손목을 가르고 왼편 어깨로 파고들어서는 심장을 잘라 버린 것이었다.

마족들은 자신들이 헛것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척!

그러는 사이에 김필도는 바닥에 내려섰다.

오른발은 앞으로 내밀고 왼발을 뒤로 뻗은 상태였다. 그 상황에서 페곤의 심장을 자르고 박힌 설풍을 사정없이 뽑아냈다.

스릉!

갑옷을 가르며 빠져나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김필도는 설풍을 뽑아낸 여력을 이용해서 빙글 한 바퀴 돌았다. 몸이 먼저 돌고 이어 팔이 따르고 설풍이 그 뒤를 쫓았다.

페곤은 여전히 오른팔을 들어 올린 채였다.

스악!

설풍은 먼저 페곤의 들어 올린 오른팔을 자르고 그 여세를 몰아 목을 통과해 지나갔다. 하지만 페곤의 몸은 그대로였다. 설풍이 워낙 빨라 아직 중력이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툭!

먼저 그의 팔과 대검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털썩!

츄아악!

이어 페곤의 커다란 머리가 떨어지고 피가 분수처럼 솟아올랐다.

“되네?”

김필도는 석상처럼 선 채 피를 뿜어내는 페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잠시 그렇게 있다가 이카렌 곁으로 다가갔다.

누구도 말을 하지 못했다. 마족들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 듯한 얼굴로 피를 뿜어내고 있는 페곤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쿠쿵!

이윽고 페곤이 쓰러졌다.

“너?”

이카렌은 김필도를 바라보았다.

“나도 때론 써먹을 데가 있지?”

“그냥 숨어 있는 게 나을 뻔했어.”

“내게 목숨을 빚진 게 마음에 들지 않나 보지?”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아니라 모처럼 얻은 친구를 잃고 싶지 않아서 그래.”

이카렌은 엷게 웃었다.

문득 마음이 편해진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죽는다는 사실에 공연히 서럽고 겁이 났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다. 아니, 힘을 내서 싸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죽는다고 누가 그러는데?”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네가 죽인 놈은 단 한 명이야. 아직 50명이 더 남았어.”

“맞아, 벌레!”

이카렌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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