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
김필도는 고개를 돌렸다.
“추접스러운 새끼!”
김필도도 지지 않고 맞섰다.
꿈틀!
데메우스의 눈초리가 사정없이 치켜 올라갔다. 그리고 그의 몸 주위로 진득한 살기가 넘실댔다.
“난 말이야, 밑바닥 생활을 하긴 했지만 너처럼 비열하게 놀진 않았어. 아무리 죽여 없애야 할 적이라고 해도 최소한의 예의는 지켰어. 50명이나 되는 사내새끼들이 한 명을 다구리 놓냐? 그것도 여자를. 에라, 새꺄. 아래쪽 그걸 떼서 래딕커 먹이로나 줘라.”
“죽일 놈!”
하지만 김필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너처럼 비열한 놈이 두목이 되면 그 조직은 금세 망해, 인마. 니 애비 빽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만 세상 그렇게 사는 거 아냐. 그리고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건데 너 한 번이라도 직접 나서서 싸워 본 적 있냐?”
“죽여!”
데메우스는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죽여라!”
그러자 마족들이 검을 앞세우고 우르르 몰려갔다.
“물러서, 루시안.”
이카렌은 검을 고쳐 잡고 앞으로 나섰다.
“날 잡아!”
김필도는 이카렌의 팔을 잡았다.
“왜?”
“이게 성공하면 우린 싸울 필요가 없을 거야.”
“어떤 건데?”
이카렌은 고개를 돌려 마족들을 보았다. 이미 20미터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차앗!”
“타앗!”
“죽인다!”
마족들은 살기 어린 외침을 토해 내며 몸을 날렸다. 크레디온을 걸친 상태에서 10미터 정도는 우습게 날아갈 수 있는 거리였다. 그들은 빛살처럼 김필도와 이카렌을 향해 몸을 날렸다.
“루, 루시안!”
“바로 이거야. 혼돈의 바람! 카이 라콰(Kai Laqwa)!”
벽에 손을 대고 낮게 소리쳤다.
파앗!
김필도의 손바닥과 벽면에서 광채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김필도와 이카렌의 동체가 그 자리에서 모습을 감췄다.
콰앙! 콰앙! 콰앙! 콰앙!
마족들의 검이 조금 전 김필도와 이카렌이 있던 자리를 후려쳤다.
쿠웅! 쿠웅!
마족들의 힘은 엄청났다. 무려 1미터에 달하는 건물 벽이 한 번에 무너져 내렸다.
“저기 있다!”
건물 안쪽에서 김필도와 이카렌을 발견한 마족이 소리쳤다.
“혼돈의 바람! 카이 라콰(Kai Laqwa)!”
바로 그 순간 김필도의 입에서 외침이 흘러나왔다. 이어 둘의 신형이 자취를 감췄다.
“쫓아라!”
마족들은 뚫린 벽을 통해 안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잠시 후 반대편 벽도 커다란 굉음과 함께 터져 나갔다.
하지만 김필도와 이카렌의 모습은 그곳에 없었다.
“쥐새끼 같은 놈!”
건물 안으로 들어왔던 데메우스는 욕설을 내뱉었다.
“마스터!”
마족들은 데메우스 곁으로 모여들었다.
데메우스는 아공간을 열어 폭이 30센티미터가량 되는 정사각형 판을 꺼냈다. 그것은 서치 파우더를 뿌려 놓은 이카렌의 검을 찾는 서치 보드였다.
서치 보드 양편에는 엄지손가락을 가져다 대도록 표시가 돼 있었다. 데메우스는 그곳에 엄지손가락을 대고 마나를 주입했다.
그의 손가락에서 흘러나온 마나가 서치 보드 표면으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붉은색 점 하나가 서치 보드 표면에 나타났다.
방향은 서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너희들은 저쪽으로 가고, 너희들은 저쪽, 그리고 너희들은 이쪽으로 가라.”
데메우스는 대원들을 세 팀으로 나눠 방향을 정해 주었다.
“가자!”
“가자!”
세 팀으로 나뉜 마족들은 데메우스가 가리킨 방향으로 내달렸다. 원래부터 발이 빠른 종족인데다가 전투마갑인 크레디온의 힘까지 더해지자, 허공에 검은 줄이 생겨났다. 그 줄은 가공할 속도로 서쪽으로 쏘아져 갔다.
한편.
건물을 빠져나간 김필도는 연속해서 마법을 펼치며 장소를 이동했다. 하지만 그가 이동하는 거리는 그다지 길지 않았다. 한 번 마법을 펼칠 때마다 1백여 미터가 한 계였다. 하지만 김필도는 자신이 한 번에 1백 미터 정도를 이동한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다만 쉬지 않고 이동하고 있을 뿐이었다.
“괜찮아?”
건물 벽을 통과하여 새로운 장소로 나온 김필도는 이동 마법 펼칠 준비를 하며 물었다.
“내가 인간의 도움을 받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
이카렌의 입에서 힘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서 자존심 상한 거야?”
“아니?”
“그럼?”
“나쁘지 않아.”
“아무래도 너 업혀야겠다.”
“업을 수 있겠어?”
“여자 하나 못 업으면 사내가 아니지.”
김필도는 이카렌의 팔을 목으로 두르며 들쳐 업었다.
“전투기갑 불편하지, 걷을까?”
“아냐, 그대로 두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리고 네 검 손잡이 제거 가능해?”
“그게 무슨 말이지?”
“빼내고 다른 걸 끼워 넣을 수 있느냐고.”
김필도가 그걸 물은 이유는 얼마 전 습득한 검 손잡이 때문이었다.
“우리가 사용하는 검들은 원래 그런 식으로 만들어지는데 몰랐어?”
“손잡이 탈착이 가능하도록 돼 있다고?”
“대부분 검은 그렇게 만들어지지만 우리 마족은 모든 검을 그렇게 만들어.”
“왜?”
“우리의 검술은 강한 힘을 바탕으로 펼치기 때문이야.”
“가장 많이 망가지는 부분이 손잡이라는 말이구나.”
“맞아. 그래서 손잡이는 고장 나면 바로 교체할 수 있도록 끼워 넣을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
“그런데 너희들이 펼치는 것도 검술이라고 해?”
“그럼 뭐로 보이는데?”
“도끼질.”
“풋!”
“오픈!”
김필도는 아공간을 열었다. 그러고는 헬에 대한 기록이 있던 방에서 주운 것들 중 세딕(Sedic)이라는 글이 새겨진 검 손잡이를 꺼내 내밀었다.
콰앙! 콰앙! 콰앙!
그리 멀지 않는 곳에서 건물 벽을 부수는 듯한 폭음이 들려왔다.
“개코네.”
이카렌의 발콘 때문이란 사실을 알 리 없는 김필도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쉬지 않고 마법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거리를 1킬로미터 정도밖에 벌리지 못한 듯했다.
“서둘러야겠네.”
그는 이카렌의 허벅지를 잡았다.
“이, 이거 어디서 난 거지?”
검 손잡이를 바라보는 이카렌의 얼굴이 격동으로 요동쳤다.
“왜?”
이카렌의 떨림은 김필도에게도 전해졌다.
“혹시 이곳에서 주은 거야?”
“그러니까 왜?”
“잊힌 전설의 신검의 이름 중의 하나가 바로 세딕(Sedic)이야.”
“잊힌 전설의 신검은 뭔데?”
“바람의 검 라콰(Laqwa), 불의 검 세딕(Sedic), 물의 검 쿠라(Kura), 대지의 검 노콴(Noqan), 혼돈의 검 카이(Kai). 그 다섯 자루를 말해. 아니, 정확하게는 다섯 개의 검 손잡이를 일컫는 말이야.”
“그건 4원소의 명칭이잖아.”
“4원소의 힘을 보유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야. 그런데 이거 어디서 난 거야?”
“여기.”
“정말 이곳에서 주웠다고?”
“일단 피하고 보자.”
김필도는 이동 마법을 펼쳤다. 그가 나아가는 쪽은 어둠이 펼쳐져 있는 북쪽이었다.
김필도는 연거푸 다섯 번의 이동 마법을 펼쳤다.
“그걸 끼워 넣으면 크레디온을 부술 수 있어?”
“전에 사용하던 힘의 5분의 1만 사용해도 크레디온을 부술 수 있을 거야.”
“만일 세딕(Sedic)의 힘을 사용할 수 있다면?”
“세딕의 힘이 사용 가능해?”
“일단 대답부터 해.”
“그건 나도 몰라. 하지만 세딕의 힘을 이용할 수 있다면 완전한 발콘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거야.”
“조립해.”
김필도는 남쪽을 살피며 말했다.
“알았어, 오픈(Open)!”
이카렌은 발콘에 마나를 주입하면서 오픈 마법을 펼쳤다. 그러자 검 손잡이 안에서 딸깍 소리가 나며 희미한 광채가 일렁였다.
그녀는 검 손잡이를 뽑아내고 김필도로부터 받은 검 손잡이를 집어넣었다. 그런 다음 검 손잡이를 쥐고 마나를 주입했다.
지이잉!
마나를 주입하자 나직한 검명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휴대전화의 진동 벨이 울리는 것처럼 부르르 떨었다.
“클로스(Closed)!”
이카렌의 입에서 나직한 외침이 흘러나왔다.
철컥!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검면에서 눈이 부실 정도로 강렬한 빛이 쏟아져 나왔다. 그 빛은 한참 동안 계속됐다.
그리고 발콘은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거 몇 킬로그램 나가는 거지?”
“들어 볼래?”
이카렌은 발콘을 내밀었다.
“엥?”
발콘을 받아 든 김필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2미터 길이에 20센티미터의 폭을 가진 육중한 검은 놀랍게도 그다지 무겁지 않았다.
“마법?”
김필도는 발콘을 이리저리 휘둘러 보았다.
“응!”
이카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발콘의 모습이 완전해지면 크레디온을 부술 수 있다 이거지?”
“아마도!”
파앗! 파앗! 파앗! 파앗!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강한 파공성이 들려왔다.
김필도와 이카렌은 고개를 돌렸다. 거대한 덩치들이 이편을 향해 가공할 속도로 쏘아져 오고 있었다.
“들킨 모양이다.”
김필도는 아공간을 열고 검 손잡이를 던져 넣었다. 그러고는 기다란 천을 꺼냈다.
“이젠 이동 마법을 펼칠 수 없는 거지?”
이카렌은 김필도의 상태를 바로 알아보았다.
단순한 것 같지만 이동 마법은 상당히 높은 수준의 마법이다. 수백 미터 또는 수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순간 이동을 해야 하는데 쉽다면 그게 더 이상한 노릇일 것이다.
“몇 번 더 사용할 수 있을 거야.”
김필도는 이카렌 앞으로 등을 대고 손을 내밀었다.
“정작 중요할 때를 대비해서 남겨 둬야 한다는 말?”
이카렌은 김필도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5년 동안 고생해서 마법을 익혔는데 정말로 필요할 때 써먹지 못하면 얼마나 슬프겠어?”
“정말로 필요할 때라는 건 목숨이 달렸을 때를 말하겠지?”
“아마도.”
“그럼 전투기갑을 제거하는 게 낫겠지?”
“그럼 위험하지 않을까?”
“포션이 있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카렌은 가슴에 손을 대고 낮게 오픈이라고 외쳤다. 그러자 그녀의 전신을 감쌌던 전투기갑이 쇳소리와 함께 검은 운무로 변하더니 천천히 모습을 감췄다.
“어떻게 한 거지?”
김필도는 이카렌을 업고 천으로 엉덩이부터 시작해서 촘촘히 묶었다.
“크레디온?”
“응!”
“크레디온을 비롯한 모든 전투기갑은 생체 갑옷이라고 보면 돼.”
“생체 갑옷?”
“평상시엔 몸속에 있다가 불러내면 온몸을 감싸는 갑옷으로 변해.”
“그게 가능해?”
“해르마나움이란 기체 금속을 이용해서 만든다고 하는데 자세한 건 나도 몰라.”
“그런 것도 있어?”
“내 기갑도 그래. 온몸을 감쌀 땐 기체 상태인데 어느 순간 보면 고체로 변해 있어.”
“물의 속성인 쿠라(Kura)와 바람의 속성 라콰(Laqwa), 혼돈의 속성 카이(Kai)를 이용한 마법이구나.”
“그것까진 모르겠고.”
“그럼 해르마나움을 만드는 재료는 하만티움이야?”
“아마도.”
휙! 휙! 휙!
“광속의 바람 라콰(Laqwa)!”
마족들이 내려서자마자 김필도는 라콰를 펼쳐 자리를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