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
“헉!”
“엇!”
“헉!”
다리 근처에 있던 마족들은 깜짝 놀랐다.
“무슨 일이냐?”
히데우스가 물었다.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퀼은 급하게 뒤로 달려갔다.
잠시 후 마족들이 서 있던 곳이 물결처럼 좌우로 갈렸다. 그리고 문제의 생명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문제의 생명체는 오드였다. 오드는 발을 떼려는 듯 상체를 조금 앞으로 내민 채다. 하지만 마족들 때문에 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아아아우우우!
“오듭니다, 군단장님. 그런데…….”
다리 입구 쪽으로 갔던 퀼이 돌아와 보고했다.
“뭐냐?”
“전투기갑을 착용한 듯합니다.”
“전투기갑?”
“네.”
“길을 터라.”
“알겠습니다. 길을 터라!”
히데우스의 명령을 받은 퀼이 소리치자 마계10군단 대원들은 좌우로 10미터를 더 물러났다.
그 사이로 오드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다리로 들어섰음에도 불구하고 오드는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빠르게 걸어 히데우스 앞까지 왔다.
“죽기 전에 전설을 뵙는군요.”
히데우스는 한눈에 하이 오드임을 알아보았다.
그아아우우우!
하이 오드는 히데우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니, 하이 오드의 시선은 히데우스가 지팡이처럼 짚고 있는 헬칸에 가 있었다.
“헬칸이란 녀석입니다. 혼돈의 힘을 지녔는데… 전 아쉽게도 한 번도 본래의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히데우스는 하이 오드를 향해 헬칸을 내밀었다.
그아우우우우!
하이 오드는 낮게 울음을 토하더니 곧장 골든 브리지 끝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미련 없이 아래로 몸을 날렸다. 곧 하이 오드의 모습은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퀼!”
“하명하십시오, 군단장님!”
“내가 헬칸과 이 오테르의 인장을 가지고 가는 이유는 혼란을 막기 위함이다. 이것들이 부군단장에게 전해지게 되면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설사 부군단장에게 전해진다고 해도 헬칸을 노리는 자가 많을 것이다.”
히데우스는 왼손 손가락을 지그시 보았다.
그의 왼손 새끼손가락에는 오테르라 불리는 검은색 보석이 박힌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그 반지는 히데우스의 가문을 나타내는 상징물이었다.
“이해합니다, 군단장님!”
퀼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부군단장에게는 미안하다고 전해 달라. 마음은 알았지만 차마 받아 줄 수가 없었다고.”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군단장님!”
“시행하라!”
“추웅!”
퀼과 솔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몸을 돌렸다.
그들이 일어나자 마계10군단 대원들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계10군단은 정렬하라!”
퀼의 외침에 마계10군단 대원들은 오와 열을 맞춰 정렬했다.
“준비하라!”
또다시 퀼의 외침이 떨어지자 마계10군단 대원들은 일제히 검을 들어 올렸다.
퀼은 다시 몸을 돌려 히데우스를 보았다.
“제군들을 만나서 난 행복했다.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난 제군들과 함께할 것이다.”
히데우스의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마계10군단 대원들 전부에게 들렸다.
“제 삶 중 가장 행복했던 1천 년이었습니다, 군단장님! 안녕히 가십시오!”
“안녕히 가십시오.”
마계10군단 대원들은 들어 올렸던 검을 가슴 앞으로 가져오며 일제히 소리쳤다.
“타앗!”
“차앗!”
퀼과 솔트의 검이 강력한 기운을 뿜어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들의 검이 골든 브리지를 후려쳤다.
콰앙! 콰앙!
둔탁한 소성과 함께 검이 후려친 자리가 쩍쩍 금이 갔다.
퀼과 솔트는 히데우스를 바라보았다.
쩍!
곧이어 다리가 갈라지며 아래로 떨어졌다.
“안녕히 가십시오, 군단장님!”
퀼과 솔트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허허허!”
저 아래쪽에서 히데우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웃음에는 결코 아쉬움이나 원망은 들어 있지 않았다. 퀼과 솔트는 그걸 느낄 수 있었다.
엄청나게 깊은 듯 다리가 바닥으로 추락하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퀼과 솔트는 몸을 돌려 벌판으로 갔다.
“새로운 군단장님이 나오실 때까지 벌판에서 대기한다!”
* * *
“몸은 어때?”
김필도를 바라보는 이카렌의 얼굴엔 걱정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그녀는 몸이 많이 좋아져 혼자 걸을 정도는 되었다. 문제는 김필도였다. 포션을 복용했지만 크게 나아진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입가로 흘러내리던 피가 멈춘 것은 다행이었다.
“지금은 내가 아니라 네 몸을 먼저 챙겨야 해.”
“이동 마법을 펼칠 수 없는 거구나.”
“이동 마법은 혼돈의 힘과 바람의 힘 두 가지를 이용해서 펼치는데, 지금 혼돈의 힘이 거의 바닥이야.”
당면한 가장 큰 걱정거리였다.
사실 5년 동안 요른으로부터 배우긴 했지만 이론적인 토대가 많이 부족했다. 비밀의 방 기둥에는 그림만 잔뜩 새겨져 있을 뿐 설명은 단 한 마디도 없었다.
지금까지 사용했던 마법들도 오로지 머릿속에 떠오르는 느낌으로 펼친 것들이다. 얼마나 더 다양한 마법을 펼칠 수 있는지 그것도 알 수 없다.
그런데 이곳에 와서 마법을 펼치다가 문득 한 가지를 깨달았다. 그동안 마나가 텅 비었다는 느낌이 뭔지 몰랐다. 그런데 느닷없이 혼돈의 기운은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어떤 특별한 징후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이카렌 몰래 슬쩍 이동 마법을 펼쳐 보았다. 역시 느낌대로 이동 마법은 펼쳐지지 않았다.
“이동 마법의 주가 되는 기운이 혼돈의 힘인 모양이지?”
“응!”
김필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무슨 마법이야?”
“실전 마법이라고 들어 본 적 있어?”
“그런 마법도 있어?”
이카렌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아주 오래 전에 창안된 마법인데 중노동과 비슷한 형태의 마법이라 별로 환영받지 못했대.”
“그래서 사장됐다는 말?”
“아마도.”
김필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변은 온통 커다란 바위로 들어차 있었다.
“내 몸이 빨리 회복돼야 하는데.”
이카렌은 중얼거렸다.
“하룻밤 자고 나면 풀릴 거야.”
“하룻밤을 자?”
“여긴 숨을 곳 천지잖아.”
김필도는 주위 바위들을 가리켰다.
“마족이 개코라는 걸 잊었어?”
“진짜 개코야?”
“코뿐만 아니라 모든 감각이 인간보다 뛰어나.”
“그러면 대충 숨으면 금세 들키겠네?”
“그럴 거야.”
“그럼 저 바위산 꼭대기는 어때?”
김필도는 전면에 보이는 절벽 꼭대기를 가리켰다.
“그런데 여긴 어디지?”
“광산.”
“무슨 광산인데?”
“중앙 지역에 지어진 건물 못 봤어?”
“여기가 하만티움 광산이라는 거야?”
“응.”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는데?”
“폐광산도 내 전문이거든.”
김필도는 싱긋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길은 오르막이었다. 약 20분 가까이 올라가자 둘 앞에 절벽이 나타났다.
그 절벽엔 수많은 동굴이 뚫려 있었다.
김필도가 이카렌을 데리고 간 곳은 중간 부분에 위치한 동굴이었다.
“광산이 아니라 집이네?”
동굴 안으로 들어간 이카렌이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안쪽에는 돌 침대와 돌 식탁 그리고 돌 의자 등이 놓여 있었다.
김필도는 곧바로 가부좌를 하고 명상에 들어갔다. 포션조차 듣지 않는 지금 상태에서 몸을 회복시키는 최고의 방법은 그가 아는 한 명상뿐이었다.
슈아악! 슈아악!
“젠장! 역시 고사를 지냈어야 해. 오드를 구해 준 것만으로는 부족했어. 역시 돼지 머리에 시루떡 놓고, 제대로 된 고사를 지내야 했어.”
김필도는 인상을 그으며 구시렁거렸다.
바람이 부는 듯한 저 소리는 마족들이 몸을 날릴 때 흘러나오는 소리였다.
“놈들에게 추적술의 전문가가 있어서 그래.”
“특제 개코라도 있는 거야?”
“다른 이들보다 몇 배 예민한 코를 가진 녀석이 있어.”
이카렌은 가슴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내심 클로스라 외쳤다.
“오픈(Open)! 그거 어떻게 착용하는 거지?”
김필도는 아공간을 열며 물었다.
“전투기갑을 맨살에 대고 작동을 시키면 거미발처럼 생긴 발이 튀어나와서 몸속으로 파고들어 가.”
“그 쇳덩어리가 몸속으로 들어간다는 거야?”
“응!”
“가슴에 그게 들어가도 괜찮아?”
“활동하는 덴 전혀 지장 없어. 오히려 전투기갑이 심장을 보호하는 방패 역할을 해서 더 안전해.”
“그렇구나.”
김필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공간에서 롱소드 한 자루를 꺼냈다. 검집이 없는 검. 그것은 레드 드래곤 이나함이 쓰던 검이었다. 그리고 작은 검 손잡이 중 세딕(Sedic)이란 글이 적힌 걸 꺼내 이카렌에게 건넸다.
“끼워 달라고?”
“응!”
“간단해. 검 손잡이에 마나를 가하면서 오른편으로… 헉!”
이카렌은 깜짝 놀랐다. 검 손잡이를 뽑아내기 위해 마나를 주입하자마자 얼마 전 삼켰던 마나단이 녹으며 온몸에 마나를 뿌려 놓는 것이었다.
그 양은 아주 작았지만 마나단이 반응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녀는 다시 검 손잡이에 마나를 주입했다. 그러자 또다시 마나단이 반응을 보였다.
이카렌은 부르르 떨었다.
“왜 그래?”
“마, 마나단이 녹고 있어.”
이카렌의 얼굴이 한껏 상기됐다.
원래 마나단은 복용을 했다고 해서 무조건 녹는 게 아니다. 몸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가 어떤 특별한 조건이 맞아떨어졌을 때 비로소 녹기 시작한다. 게다가 한번 녹기 시작하면 완전하게 녹는 특징을 가진다.
“그냥 녹는 게 아니었어?”
이카렌은 마치 커다란 기연을 만난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나단은 수천 년 또는 수만 년의 세월을 통해 형성된 거야. 그런 것들이 복용하자마자 눈처럼 녹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거야.”
“어떤 조건이 맞아떨어져야 녹는다는 말?”
“응! 그런데 내게 준 마나단과 이 검은 무슨 연관이 있는 거지?”
“그 검이 마나단을 녹이는 매개체였어?”
“그런 것 같아.”
이카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게 준 건 맹약의 구슬이야.”
“드래곤이 만든 거라고?”
“레드 드래곤 이나함이 만든 거고, 그 검은 이나함이 쓰던 거야.”
“그러니까 내가 복용한 것이 이나함의 하트라는 거야?”
“젊었을 때 만든 맹약의 구슬에 10클래스 마법을 쏟아 부어 강화시켰어.”
“그럼 난 엄청난 걸 복용한 거네?”
이카렌은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김필도로부터 얻은 그것이 설마 드래곤 하트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사실 마나단 중에서 가장 좋은 건 드래곤 하트다.
하지만 드래곤 하트는 얻는 게 더 힘들고 설령 얻어서 복용했다고 하더라도 드래곤들은 그 기운을 알아차리기 때문에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게 아니라면 보복당할 각오를 해야 한다. 본체 상태로 용언 마법을 난사하는 드래곤은 전투기갑을 착용하고 암흑 마법을 극한으로 펼친다고 해도 막아 내는 건 쉽지 않다.
그런데 그 얻기 어렵다는 드래곤 하트를 복용했다고 하니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부지런히 녹이는 게 날 도와주는 거야. 그거 조립해 줘.”
김필도는 이카렌이 들고 있는 롱소드를 턱으로 가리켰다.
“아, 알았어.”
이카렌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검 손잡이를 뽑아냈다.
그러고는 세딕이란 글이 새겨진 고대의 검 손잡이를 꽂아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