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 김필도-48화 (48/225)

# 48

철컥!

뭔가가 걸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검면에 석양과 같은 불그스레한 광채가 어렸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이카렌의 발콘이 그랬던 것처럼 부르르 떨었다.

“자!”

검 손잡이를 조립한 이카렌은 김필도에게 내밀었다.

“얼마나 걸릴 것 같아?”

김필도는 검면에 제 얼굴을 비춰 보며 물었다.

“그건 나도 몰라. 하지만 몸을 움직일 정도만 되면 곧바로 널 도울게.”

“굳이 그럴 필요 없어. 이곳에 숨어 있다가 마나단이 완전하게 녹으면 그때 나와. 그리고…….”

김필도는 오른손을 내밀었다.

“무슨 뜻이지?”

“내가 이곳에 들어온 이유는 네가 가진 그런 걸 하나 얻어 볼까 해서였어.”

“크레디온?”

“그런데 여기엔 아무것도 없더라. 헬칸이란 자에게 당해서 남아 있는 거라고는 하만티움과 검 손잡이 10개가 전부야. 내가 강해지는 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들이지.”

“네가 헬칸을 어떻게 아는데?”

“우연한 기회에 고대어를 배웠고, 검 손잡이를 주운 장소에서 헬칸에 대해 기록된 하만티움 판을 주웠어. 리모스를 지옥으로 만든 자가 바로 헬칸이야. 아무튼 그동안 즐거웠어. 좋은 경험이었고. 아마 휴도니아 대륙으로 돌아가도 한동안 널 잊지 못할 거야.”

“너 지금 데메우스 일행을 유인해 가려는 거지?”

“시도는 해 보겠지만 장담은 못 해.”

휙!

김필도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카렌은 손을 잡아당겼다. 김필도는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이카렌은 김필도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김필도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이카렌을 뿌리치지 않았다.

잠시 후 이카렌은 입술을 뗐다.

“너 남자 다룰 줄 아는구나?”

김필도는 빙그레 웃었다.

“무슨 소리야?”

이카렌은 뜬금없는 말에 의아해했다.

단지 고마운 마음에 얼결에 키스를 한 것뿐인데.

“난 지금부터 내려가서 진짜 열심히 싸울 거거든. 그리고 당분간 입술을 씻는 일도 없을 테고.”

“풋!”

그제야 이카렌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행복해.”

김필도는 이카렌의 볼을 토닥여 주고는 몸을 돌렸다.

“왜?”

동굴 끝에 선 김필도가 돌아보자 이카렌이 몇 걸음 앞으로 나왔다.

“혹시 이런 말 들어 본 적 있어?”

“뭘?”

“키스를 세 번 하면 연인이 된다는 말.”

“그런 말도 있어?”

“아주 유명한 말이야.”

“그런데 우리가 키스를 세 번 했나?”

“그림자 숲에서 한 번, 두 번짼 구슬 키스, 그리고 오늘 한 것까지 세 번이잖아.”

“듣고 보니 그렇네? 그런데…….”

이카렌은 김필도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런데 뭐?”

“정말 그래?”

“뭐가?”

“키스를 세 번 하면 연인이 된다는 거 말이야.”

“그런데 조건이 있어.”

“어떤 조건?”

“무조건 딥키스를 해야 해.”

“그럼 우린?”

“오늘은 딥키스를 하지 않았으니까 연인이 될 수 없는 거지. 아무튼 이카렌 네 마음속에 있는 남자가 누군지 모르지만 꼭 잡아. 도망치려고 하면 다리를 분질러서라도 반드시 잡아. 그래야 후회가 없어.”

“루시안!”

이카렌은 김필도를 불렀다.

왠지 모르게 이별의 아픔을 겪어 본 사람의 절심함이 느껴졌다.

“죽고 나면 아무리 후회해도 소용없어. 무슨 말인지 알지?”

“응, 응!”

이카렌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누군지 모르지만 아주 운이 좋은 사람인 것만은 확실해. 축하한다는 내 말 전해 줘.”

“그, 그럴게.”

이카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행복하게 살아!”

김필도는 손을 흔들고는 아래로 뛰어내렸다.

제11장 젠장!

“나온 게 있느냐?”

세이아칸은 앞으로 다가오는 사내를 향해 물었다. 그 사내는 천좌10군 수장 세라핌이었다.

세이아칸 일행은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곧바로 리모스를 조사했다. 천계에는 리모스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이곳으로 오면 좀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줄 알았다. 그런데 너무 오랜 세월이 흐른 모양이었다.

리모스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까지 얻은 건 피루스 한 장입니다.”

세라핌은 직사각형으로 된 판을 내밀었다.

피루스는 신의 시대에 사용된 기록 매체로, 하만티움이 재료로 쓰였다.

세이아칸은 피루스를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리모스를 아주 단순화시킨 지도였다.

“관광지도 같습니다.”

세라핌이 말했다.

“그런 것 같군.”

지도는 네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서쪽은 리모스로 들어오는 입구, 중앙은 빛의 동산, 남쪽은 휴양지, 북쪽과 동쪽은 광산 지대였다. 각 지역을 따라가며 길이 그려져 있는 걸 보면 세라핌의 말처럼 관광지도인 듯했다.

“상황은 어떠냐?”

세이아칸은 지도에서 눈을 떼며 물었다.

“석재와 하만티움으로 지은 건물과 가재도구만 남았고, 나머지는 전부 가루로 변했습니다.”

“유물 같은 건… 없겠지?”

“지금까지 나온 건 그 피루스가 유일합니다.”

“헬칸에 대한 기록도 없겠구나.”

세이아칸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그런데 그 전설이 사실이라고 보십니까?”

신마 전쟁을 종식시켰다는 전설의 존재.

그가 쳐들어오지 않았다면 다섯 종족은 리모스를 떠나지 않았을 거라고 하였다.

“헬(Hell)이 왜 지옥이란 의미가 됐는지 아느냐?”

“헬칸을 따랐던 결사대를 헬이라 불렀다고 알고 있습니다.”

“잘 알고 있구나. 그들에게 유린당한 광경이 너무 참혹해서 헬이라 부르게 됐고, 나중엔 지옥이란 말로 변했다.”

“그렇다면 마족이 이곳으로 들어온 이유도?”

“헬칸의 전설은 우리만 알고 있으란 법은 없지 않느냐. 그들 역시 헬칸의 유물을 찾으러 왔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마족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난 이곳을 점령할 생각이다.”

“그 말씀은?”

“신좌들께서는 이곳으로 돌아오고 싶어하신다.”

“정말이십니까?”

“이 안에서 마족 놈들을 몰아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랬군요.”

“여기 발자국이 있습니다!”

바로 전방에서 주변을 수색하던 천좌10군 헬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발자국?”

세이아칸은 헬만이 있는 곳으로 갔다.

“여깁니다.”

세이아칸이 다가서자 헬만은 바닥을 가리켰다.

세이아칸은 바닥을 보았다. 아래쪽에는 먼지가 눈처럼 쌓여 있다. 그런데 그곳에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발자국의 크기는 아주 작았다.

이곳에서 발이 작은 종족은 인간뿐이었다.

“놈이군.”

세이아칸의 눈에 차가운 광채가 어렸다.

그가 알기론 이곳으로 들어온 인간은 네 명이었다. 세 명은 한 조가 돼 움직이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곳에 찍힌 발자국은 한 명의 것.

그렇다면 바로 그자밖에 없다.

가드 맵을 가졌던 놈.

“난 네가 God Map을 정말로 없앴을 거라고 믿지 않는다.”

세이아칸은 차갑게 중얼거렸다.

“발자국을 찾아라!”

그는 세라핌을 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천좌!”

세라핌은 고개를 숙이고는 천좌10군에게 눈짓으로 지시를 내렸다.

천좌10군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천족의 특징 중의 하나는 유달리 시력이 좋다는 것이었다. 그 사실을 증명이라고 하듯, 잠시 후 발자국을 찾아냈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 번째 발자국을 발견한 장소는 첫 번째 발자국이 있던 위치에서 1백 미터 떨어진 바위 옆이었다.

“계속 찾아라!”

발자국을 확인한 세이아칸은 다시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세 번째, 네 번째 발자국을 찾았을 땐 세이아칸 일행은 2백 미터를 더 전진해 있었다.

“한 번에 1백 미터씩 전진했습니다, 천좌.”

세라핌이 말했다.

“나도 알고 있다. 지금부터는 1백 미터 떨어진 곳을 찾아라.”

세이아칸 일행은 발자국을 찾아 헤맸다.

그렇게 찾아다니길 30분. 그들 눈앞에 놀라운 광경이 나타났다.

“마족의 시쳅니다, 천좌.”

주위를 둘러보고 온 세라핌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마족의 시체는 아홉 구였다. 기갑은 산산이 부서져 있고, 시체들 또한 형체를 찾아볼 수가 없다.

문제는 누가 마족을 공격했느냐 하는 것이었다.

“누구냐?”

세이아칸은 시체를 살피며 물었다.

“데메우스를 따르는 자들 같습니다.”

“데메우스?”

“프리메우스의 아들로 차기 군단장 자리를 노리고 있는 잡니다.”

“차기 군단장을 노리는 자라면 이카렌이 눈엣가시였겠구나.”

“이들을 없앤 자가 이카렌이라고 보십니까?”

“그녀의 검인 발콘은 폭풍의 힘이 내포돼 있고, 그 검에 당하면 몸이 불탄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아홉 명입니다. 게다가 그녀의 발자국은 전혀 없고 인간의 발자국만 있습니다.”

“설마 마족을 없앤 자가 인간이란 말을 하고 싶은 거냐?”

“그건…….”

세라핌은 할 말이 없었다.

시체들 주위에 남아 있는 정황들은 마족을 없앤 자가 인간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마족이 인간에 당했다는 건 꿈에서도, 아니 상상 속에서도 일어나서는 안 된다.

그건 마족이 대단한 종족이라서가 아니다.

마족이 인간에게 당했다는 걸 인정하는 순간 천족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걸 시인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저들을 없앤 자는 이카렌이다.”

세이아칸은 단언하듯 말했다.

“천좌 말씀이 옳습니다.”

세라핌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찾아라!”

“알겠습니다.”

천좌10군은 다시 주변을 수색했다.

그리고 북쪽으로 향하고 있는 발자국을 발견했다. 그런데 이번엔 1백 미터 간격이 아니었다.

“마법이었어.”

세이아칸은 그제야 발자국이 1백 미터 간격으로 나 있었던 이유를 알아차렸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동 마법이었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이곳에서 마족과 싸우고 나자 마나가 급격하게 줄어들어 이동 마법을 펼칠 여력이 없었던 겁니다.”

세라핌이 부연 설명을 했다.

“마법이라 이거지.”

세이아칸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안티 매직 파워.

그거 하나만 있으면 웬만한 마법은 무력화시킬 수가 있다.

‘넌 네가 가진 비밀을 털어놓아야 할 거다, 인간. 그렇지 않으면…….’

“출발해.”

세이아칸의 명령이 떨어지고 세라핌을 비롯한 천좌10군은 발자국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