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 김필도-49화 (49/225)

# 49

진득한 살기가 안개처럼 떠다녔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살기는 왜곡된 마나처럼 이리저리 뒤틀렸다.

데메우스는 전면을 노려보았다.

극한으로 열린 육감은 저 바위 벌판 어딘가에 부하들을 없앤 인간이 숨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정확한 위치는 알 수가 없다.

“찾아서 없애는 수밖에.”

데메우스는 고개를 돌려 부하들을 보았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라는 수신호를 보냈다.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마족들은 암흑 마법을 펼쳐 어둠 속으로 녹아들어 갔다. 어둠과 동화된 마족들은 넓게 포진하면서 나아갔다.

“나도 내가 점점 무서워.”

김필도는 떠는 시늉을 했다.

마족들이 어둠 속으로 녹아들어 가는 광경이 선명하게 보일 뿐 아니라, 녹아든 모습조차 보인다.

물론 완전한 형태는 아니고 약간 흐릿하다. 하지만 머리와 팔과 다리 등 신체는 식별이 가능하다. 전 같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마도 쉬지 않고 이어진 실전과 얼마 전 깨운 육감이 상호 작용을 하여 실전 마법의 새로운 능력이 개발된 듯했다. 점점 육체가 눈을 뜨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어쨌거나 나쁜 건 아니니까.”

김필도는 조용히 움직였다. 그가 앉아 있던 곳은 이곳에서 가장 큰 바위 위였다.

그는 바위 아래로 뛰어내렸다.

5미터 높이에서 뛰어내렸지만 작은 소리조차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 또한 이곳까지 오면서 배양된 능력 중의 하나였다.

‘문제는 이놈으로 마족을 죽일 수 있느냐 하는 건데.’

김필도는 손에 든 검을 바라보았다.

레드 드래곤 이나함의 검.

드래곤은 만 살이 넘어가면 라그나뢰크르, 즉 신들의 황혼이라고 부른다. 비록 인간의 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고 하지만 라그나뢰크르에 이른 드래곤이 만든 검이다. 마족들이 신검이라고 부르는 발콘보다 나았으면 나았지 부족하진 않을 것이다. 문제는 시험을 전혀 해 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스윽!

문득 20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아주 미약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대기가 밀려나는 소리였다.

“시험해 보면 알겠지.”

김필도는 빠르게 몸을 날렸다. 지금도 작은 소리조차 흘러나오지 않는다. 마치 사일런스 마법을 펼친 채 움직이는 것 같다.

짐시 후 내려선 곳은 4미터 높이의 바위 위였다. 그는 납작 엎드린 채 전면을 바라보았다.

마족 한 명이 이편을 향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김필도는 손으로 시선을 미끄러뜨렸다. 왼손 바로 옆에 나뒹굴고 있는 자잘한 돌멩이가 보였다. 그것들 중 손톱 크기의 돌멩이 하나를 주워 바위 뒤편으로 던졌다.

툭!

슈아악!

돌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오자마자 마족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마족은 순식간에 김필도가 엎드려 있는 바위 옆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마족은 조용히 동정을 살폈다. 잠시 후 바위 뒤쪽으로 돌아갔다.

김필도는 엎드린 채 마족을 따라 움직였다.

바위 뒤편에는 한 사람 정도 들어갈 수 있는 작은 공간이 있다. 이 바위를 택한 것은 바로 그 공간 때문이었다.

양손을 바닥에 짚은 채 하체부터 천천히 일으켰다.

그의 모습은 마치 애벌레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몸을 구부리는 것처럼 보인다. 바위 가장자리로 간 그는 고개를 내밀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바위 뒤로 온 마족은 허리를 숙인 채 바위 아래쪽 파인 부분을 살피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고 1미터가량 떨어져 있다.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기습에 대비하는 거겠지. 그게 바로 내가 바랐던 상황이야.’

스윽!

김필도는 아래로 몸을 날렸다.

그는 양손으로 검을 쥔 채 번쩍 들어 올렸다. 물론 검 끝은 땅을, 아니 마족의 뒷목을 향한 채다.

‘광염의 불꽃 세딕(Sedic)!’

마족 바로 위에 도달한 그는 내심 외치며 뒷목을 향해 힘껏 찔러 넣었다.

푸아악!

“컥!”

아주 작은 신음이 마족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 신음마저도 금세 끊겼다. 가공할 열기가 목으로 파고들어 가면서 한순간 성대를 태워 버린 것이었다.

김필도는 천천히 검을 뽑았다.

푸스스!

검이 뽑혀 나오자 마족의 동체가 숯으로 변했다.

‘굳뜨(Good)!’

쉬지 않고 이어져 왔던 실전이 비로소 결실을 보는 듯하다. 어쩌면 이곳 리모스에서 나간 후에는 더 이상 천족과 마족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남은 놈은 대장 데메우스를 포함한 20명.’

스윽!

김필도는 다시 몸을 날렸다.

1백 미터를 쉬지 않고 날아간 그는 두 번째 마족을 발견했다. 그 마족은 두 개의 바위가 맞붙어 있는 곳 안쪽을 살피는 중이었다. 틈새가 너무 비좁아 마족의 덩치로는 들어가는 게 불가능했다.

김필도는 마족을 향해 몸을 날렸다.

이번에도 역시 검은 역수로 틀어쥐었다. 양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고 마족의 뒷목을 향해 푹 찔러 넣었다.

“컥!”

나직한 비명과 함께 마족은 석상처럼 굳었다. 가공할 열기가 순식간에 몸을 태워 버린 것이었다.

“놈이다!”

슈아악!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쳇!”

파앗!

김필도의 신형이 허공을 갈랐다.

“차앗!”

바로 그때 50여 미터 전방에서 짧은 기합이 들려왔다.

김필도는 시선을 들었다. 마족은 엄청난 속도로 이편을 향해 쏘아져 오고 있었다.

김필도는 자신의 검을 보았다.

이카렌의 검 발콘이라면 모를까 롱소드로 마족의 검을 막아 낸다는 건 무리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이카렌을 업고 싸웠을 때처럼 정면 공격은 철저하게 피하면서 싸우는 수밖에 없다.

“광속의 바람 라콰(Laqwa)!”

파앗!

김필도의 신형이 전방으로 쏘아져 갔다.

그가 나아가는 속도 또한 마족이 이동하는 속도와 다르지 않았다.

퍼억!

십여 미터를 나아간 그의 신형이 바위를 박차고 오른편으로 이동했다.

앞에 있던 김필도가 갑자기 사라지자 마족은 당황했다. 그는 김필도를 찾으려고 시선을 돌렸다.

퍼억!

바로 그때 오른편으로 향했던 김필도가 왼편에서 나타났다.

슈캉!

김필도의 검은 마족의 허리를 가르고 지나갔다.

일검에 마족의 동체를 잘라 내지 못한 건 전에 설풍을 휘둘러 천족의 몸통을 잘라 내지 못한 것과 비슷했지만 결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푸아악!

잘려 나간 부위에서 푸른색 불꽃이 피어오르며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크아악!”

마족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콰아앙!

마족의 동체는 앞을 가로막은 거대한 바위를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파고들었다.

“으아아악!”

바위로 파고든 마족은 계속해서 비명을 내지르며 버둥거렸다. 하지만 그는 바위 속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리고 잠시 후 기갑이 사라지고 새카맣게 탄 시체만 남았다.

“남은 놈 열여덟.”

김필도의 신형이 빠르게 자리를 떴다. 그의 신형은 금세 바위 뒤로 돌아갔다.

“쫓아라!”

슈아악! 슈아악!

어둠 속에 숨어 몸을 날리기 때문에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대기를 가르는 소리만 요란하게 들려왔다.

파앗!

마족 한 명이 바위를 타고 넘는 순간 아래쪽에서 검은 동체가 가공할 속도로 솟아올랐다. 검은 동체는 검을 머리 위로 뻗고 있는 김필도였다.

푸욱!

그의 검은 그대로 마족의 가랑이 사이를 뚫고 들어갔다. 마족의 상체가 푹 꺾였다.

“차앗!”

바로 그 순간이었다.

찔린 동료를 뒤따라가던 마족 한 명이 김필도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김필도는 왼손으로 구부린 마족의 상체를 사정없이 치며 아래로 쏘아져 갔다.

퍼억!

김필도를 향해 휘두른 마족의 검은 동료의 다리를 일거에 잘랐다.

“아아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마족의 신형이 아래로 추락했다.

“죽인다!”

또 다른 마족 세 명이 김필도가 내려간 곳을 향해 쏘아져 갔다.

쾅콰쾅! 쾅쾅! 쾅!

곧이어 김필도가 내려섰던 곳에서 커다란 폭음이 터져 나왔다. 부서진 바위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하지만 그곳에 김필도는 없었다.

“쥐새끼 같은 놈!”

바닥으로 내려선 마족들은 살기 어린 눈빛으로 주위를 살폈다. 마족들이 극도로 분노했다는 사실은 눈을 보면 알 수 있다. 김필도를 찾고 있는 마족의 눈은 눈동자와 흰자 구분 없이 전부가 핏빛이었다.

“차앗!”

오른편 50미터 떨어진 곳에서 우렁찬 외침과 함께 김필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검은 마족의 뒷목 깊숙이 파고들어 가 있었다.

또 한 명의 마족을 없앤 그의 입 주위는 피로 범벅이었다. 또다시 한계를 넘어선 마법이 그의 내부를 갉아먹기 시작한 것이었다.

“썅!”

마족들은 김필도를 향해 쏘아져 갔다.

“광폭의 바람 라콰(Laqwa)!”

김필도의 신형이 가공할 속도로 쏘아져 갔다.

순식간에 50미터를 내달린 그는 주머니에서 푸른색 액체가 든 포션을 꺼냈다.

“젠장 이건 박×스도 아니고. 이럴 땐 진통제가 최곤데.”

그는 검으로 위쪽을 날려 버리고는 입으로 쏟아 넣으며 투덜댔다. 진통제 서너 알이면 웬만한 고통은 아무렇지 않게 견딜 수 있다. 하지만 포션은 치료는 해 주지만 고통까지 경감시켜 주지는 못했다.

슈아악! 슈아악!

“이크!”

김필도는 앞쪽에 커다란 바위가 나타나자 속도를 늦췄다. 그리고 몸을 눕혀 두 발을 바위 표면에 댔다.

이어 스프링이 접히듯 잔뜩 오므렸다.

“광폭의 바람 라콰(Laqwa)!”

강렬한 외침이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오고 바위를 박찬 그의 신형이 가공할 속도로 쏘아져 갔다.

“헛!”

김필도의 표적이 된 마족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김필도가 역으로 치고 나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탓이다.

생명을 건 도박에서 한 번의 실수는 곧 죽음.

김필도의 검은 마족의 목으로 무자비하게 파고들어 갔다.

“커억!”

마족의 비명을 들음과 동시에, 날아오는 몸통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거기 서, 쥐새끼!”

마족 한 명의 검이 벼락처럼 김필도를 향해 떨어졌다. 검이 몸 근처에 오지도 않았는데 강력한 암경이 김필도의 온몸을 후려쳤다.

“차앗!”

김필도는 검을 힘차게 그어 올렸다.

콰앙!

바로 그 순간이었다. 마족의 검과 김필도의 검이 부딪치며 광포한 소성이 터져 나왔다.

“커억!”

역시 아직 정면 대결은 무리였다.

김필도는 처절한 비명과 함께 바닥으로 추락했다. 순식간에 호구가 파열되어 손바닥은 피범벅으로 변했다.

하지만 호구 파열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퍼억!

“크윽! 광폭의 바람 라콰(Laqwa)!”

지면에 부딪치자마자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헉!”

김필도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바람처럼 쏘아져 가야 하는데 몸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김필도는 황급히 몸을 굴렸다.

콰앙! 쾅!

방금 그가 있던 자리로 마족의 검이 떨어졌다.

휙!

김필도는 재빨리 바위 뒤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마족은 두 명이 전부가 아니었다. 김필도가 몸을 피한 곳으로 다른 마족 한 명이 벼락처럼 떨어져 내렸다.

“젠장!”

김필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마족의 검 길이는 2미터. 설령 몸을 굴린다고 해도 피할 수 있을는지 장담할 수가 없다. 어쩌면 팔, 다리 중 하나는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젠장…….”

김필도는 다시 오른편으로 몸을 굴렸다.

콰앙!

바로 그때였다. 머리 바로 위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