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
“커억!”
나직한 비명이 들려오고, 거대한 덩치가 바로 옆으로 떨어졌다. 덩치의 주인은 조금 전 김필도를 공격하던 마족이었다.
김필도는 눈을 떴다.
“응?”
그는 벌떡 일어났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나타나 목숨을 구해 준 이는 이카렌이었다. 이카렌은 두 명의 마족을 향해 쏘아져 가는 중이었다.
김필도는 주머니 안으로 손을 넣어 포션 하나를 꺼냈다. 그러고는 병째 입 안으로 던져 넣고 힘차게 깨물었다. 우두둑 소리와 함께 포션이 흘러나왔다.
김필도는 포션을 꿀꺽 삼켰다.
“퉤!”
생선 가시를 뱉어 내듯 입 안에 남아 있는 병 조각을 뱉었다. 피와 뒤섞인 병 조각이 떨어져 내렸다.
“한번 해 보자 이거지.”
포션의 기운이 온몸을 타고 도는 건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몸이 부르르 떨리고 고통은 극심해진다.
“광폭의 바람 라콰(Laqwa)!”
김필도는 크게 소리치며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이카렌 앞에 선 그는 그녀의 등을 타고 넘었다. 그가 노리는 자는 왼편에서 이카렌을 공격하던 마족이었다.
“차앙!”
우렁찬 외침과 함께 그의 롱소드가 허공을 갈랐다.
슈캉!
“커억!”
“아악!”
두 마디 비명이 연속해서 들려왔다.
전력을 다한 김필도의 검은 마족의 머리를 갈랐고, 그 순간 이카렌의 발콘은 오른편 마족의 심장으로 파고들었다.
“가자!”
발콘을 뽑아 낸 이카렌은 바닥으로 내려선 김필도를 가슴 안으로 끌어들이며 몸을 날렸다. 뒤에서 보면 그녀 혼자 달리는 것 같았다.
“쫓아라!”
이카렌이 모습을 드러내자 데메우스는 고함을 내질렀다. 남아 있던 마족들은 일제히 이카렌을 쫓아 몸을 날렸다.
“다 녹인 거야?”
김필도는 이카렌을 보며 물었다.
“응!”
이카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족도 거짓말을 해?”
김필도는 이카렌의 입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턱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거짓말 아냐, 난 지금 아주 좋아. 너만 아니었다면 놈들을 전부 없애 버렸을 거야.”
“그럼 이렇게 도망가는 게 순전히 나 때문이네?”
“넌 아직 보호자가 필요한 어린애야.”
이카렌이 김필도를 안고 달려가는 곳은 동굴들 사이에 나 있는 계단이었다. 계단은 절벽 꼭대기까지 이어져 있었다. 이카렌은 고개를 돌려 흘끔 뒤를 보았다.
데메우스를 포함한 마족 열두 명이 쫓아오고 있었다.
“마족 열여섯 명이 인간 한 명에게 당했다고 말하면 난 미친년 소리를 들을 거야.”
“마계에서?”
“응!”
“내가 그렇게 대단한 일을 한 건가?”
“대단한 정도가 아니라 엄청난 일을 한 거야.”
“꼼수였을 뿐이야.”
“마계10군단 전사 12명을 꼼수로 없앨 수 있는 인간은 없어.”
“하지만 결국엔 이 꼴이잖아.”
“그래도 엄청난 건 맞아.”
휙!
그녀는 어느새 절벽 꼭대기에 올라와 있었다.
절벽 위쪽은 폭이 1백 미터가량 되는 평지였다. 그녀는 곧바로 반대편 가장자리로 갔다.
그곳은 바닥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였다.
“저기 보여?”
이카렌은 5미터 아래쪽에 선반처럼 튀어나온 곳을 가리켰다.
“나는 저기에 숨고 너는 마족들을 유인해 간다고?”
“사실 내 몸은 완전하지 못해. 나 혼자 도망치기도 버거워.”
“그래서 날 가슴에 품고 온 거야?”
“뒤에서 보면 네가 보이지 않으니까.”
“그렇게 하자.”
김필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게를 조금이라도 줄이면 그녀는 더 빨리 달릴 수 있고, 지금보다 빨리 움직일 수 있다면 살아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녀를 위해서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이카렌의 품에서 빠져나온 김필도는 아래로 내려갔다.
“저기…….”
이카렌은 김필도를 보았다.
“말해.”
“사랑하는 사람 잃어 본 적 있어? 그러니까 내 말은…….”
“왜?”
“왠지 그런 것 같아서.”
“영혼의 일부가 찢겨 나가는 아픔이라는 말 알아?”
“듣기만 했을 뿐이야.”
“늘 그런 시간을 살게 돼. 맛있을 걸 먹어도, 따뜻한 방에서 잠을 자도, 다른 세상으로 와도, 늘 가슴은 뻥 뚫려 있어 겨울바람보다 더 차가운 바람이 드나들어.”
슈아악! 슈악!
그때 계단이 있는 곳에서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잘 살아.”
김필도를 가만히 바라보던 이카렌은 몸을 날렸다.
그녀는 여전히 김필도를 안고 있는 것처럼 잔뜩 웅크린 채였다. 그녀가 몸을 날려 가는 곳은 동쪽이었다.
“저기 간다!”
뒤늦게 올라온 마족들이 고함을 내지르며 이카렌을 쫓아갔다.
“너도!”
김필도는 벽에 몸을 기댄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문득 이곳엔 별이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별뿐만이 아니었다. 세 개의 달이 나란히 떠올라야 하는데 하늘엔 아무것도 없다.
“젠장. 오늘 같은 밤엔 달 속에 떠오르는 필녀 얼굴을 봐야 하는데.”
김필도는 먼 데로 눈을 묻었다.
-필돈으로 할래.
-왜?
-필히 돈을 벌어야 하니까.
-그건 너무 표 나잖아.
-그런가?
-그러지 말고 필도라고 해.
-필도?
-부르기 쉽고 편한 것 같아.
-그럼 그렇게 하지 뭐. 그런데 네 이름은 뭐로 할까?
-필녀라고 할래.
-필녀는 너무 촌스럽잖아. 그러지 말고 전화번호부에서 찾아보자.
-싫어 난 필녀가 좋아.
-왜?
-필도의 여자라는 뜻이니까.
-그런 거야?
-응! 그러니까 필녀로 할래. 그리고 성은 김씨 어때?
-김씨?
-전화번호부를 보니까 김씨가 가장 많더라. 대통령도 두 명이나 김씨였대.
-그래? 그럼 넌 김필녀고.
-오빤 김필도야.
-하하하!
-호호호!
주르르!
문득 뜨거운 물줄기가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김필도는 얼른 눈물을 훔쳤다. 14년. 아니 이젠 필녀의 무덤에도 가지 못하는 신세가 됐다.
하지만…….
“잘살게. 진짜 잘살게. 미친 듯이 돈 벌어서 보란 듯이 살게. 약속할게, 필녀야.”
김필도는 벽에서 등을 떼고는 절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금세 절벽 끝에 다다른 그는 오른손을 힘차게 뻗어 가장자리를 잡았다. 그러고는 힘을 썼다. 어깨가 쑥 올라가며 절벽 너머로 머리가 나왔다.
“씨팔!”
절벽 위로 고개를 내밀었던 김필도의 입에서 욕설이 비어져 나왔다.
황금색 신발 두 개가 눈에 들어왔다.
신발의 앞코는 바이킹들이 타고 다니던 배의 선수처럼 앞쪽이 둥글게 말려 올라가 있다.
김필도는 고개를 들었다.
오연한 자세로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자는 이야크 평원에서 본 적이 있는 세이아칸이었다.
“혼돈의 바람! 카이 라콰(Kai Laqwa)!”
김필도는 낮게 소리치며 이동 마법을 펼쳤다. 하지만 그의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광속의 바람 라콰(Laqwa)!”
이번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의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문득 몸속의 마나가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
김필도는 세이아칸을 보았다.
“올라오겠느냐, 아니면 내가 끌어올릴까?”
“내 사전엔 항복은 없어.”
“그럼 내가 끌어올려야겠구나.”
세이아칸은 김필도를 향해 왼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김필도의 신형이 둥실 떠올라 세이아칸의 눈앞에 섰다.
세이아칸은 왼손을 내밀어 김필도의 목을 그러쥐었다.
“이거 하나만 마시면 안 될까?”
김필도는 목을 잡힌 채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에는 포션 한 병이 들려 있었다.
“그걸 마시면 이 자리를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어쩌면.”
김필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하겠다.”
세이아칸은 비릿한 조소를 베어 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문득 나약한 인간의 발악을 즐기고 싶어졌다.
김필도는 포션을 병째 입 안으로 던져 넣고 우둑우둑 씹었다.
“야만인이라 그런지 포션도 특이하게 마시는구나.”
세이아칸은 김필도를 빤히 바라보았다. 병을 씹자 입 주위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날 잡은 이유는?”
김필도는 포션을 쭉쭉 빨아 삼키며 물었다.
“네 녀석이 가려는 최종 목적지를 알고 싶어. 말을 하면 편하게 죽여주고, 그렇지 않을 경우엔 살점을 조금씩 발라 가면서 죽일 거야.”
세이아칸은 오른손을 어깨높이로 들어 올리더니 뒤로 뻗었다.
철컥!
그러자 그의 손목에서 황금색 물체가 튀어나왔다.
그것은 길이 50센티미터, 폭 10센티미터가량인 검이었다.
“쿡!”
김필도는 피식 웃었다.
“지금 상황이 재미있는 모양이군.”
“너 하는 짓이 귀여워서 그래.”
“귀여워?”
“니들 천족 애들은 검을 들이대고 협박하면 다 부는 모양이지?”
세이아칸은 김필도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보통 이런 경우를 당하면 눈동자가 흔들리게 마련인데 놈의 눈빛은 지극히 차분하다. 마치 꽁꽁 언 겨울 호수를 보는 듯하다.
“내가 생각을 잘못한 모양이다.”
“나도 그래.”
푸우!
김필도는 입 안에 머금고 있던 깨진 병 조각을 세이아칸의 얼굴을 향해 뿜었다.
“컥!”
세이아칸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김필도가 뱉어 낸 병 파편 중 하나가 왼편 눈으로 박혀든 것이었다.
“벌레 같은 놈이!”
세이아칸은 오른손을 사정없이 찔러 넣었다.
푸욱!
그의 손목에서 튀어나온 검은 정확하게 김필도의 심장으로 파고들어 갔다.
“컥!”
김필도의 입이 쩍 벌어졌다.
세이아칸은 그 상태에서 천천히 손목을 돌렸다.
오른편으로 돌리고 다시 왼편으로 돌렸다. 그가 손목을 돌릴 때마다 김필도의 심장에서는 피가 벌컥벌컥 쏟아져 나왔다.
그아아아우우우!
동굴이 있는 곳에서 귀에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지만 김필도는 듣지 못했다.
“씨팔! 역시 조선 놈은 고사를 지내야 해. 활짝 웃는 돼지머리에, 팥시루떡 놓고 고사를 지내야 마가 끼지 않는 건데…….”
김필도의 고개가 푹 꺾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