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
제1장 튜닝
“나 세이아칸을 농락한 대가다, 벌레!”
세이아칸은 차갑게 말하며 김필도를 낭떠러지 아래로 휙 집어던졌다.
“천좌, 여기 포션입니다.”
뒤편에서 지켜보던 세라핌이 급히 다가와 포션을 내밀었다. 포션을 받아든 세이아칸은 유리 파편이 박힌 눈에 절반을 붓고 나머지는 마셨다.
“크윽!”
세이아칸의 입에서 비명이 흘러나왔다.
포션은 상처를 금세 낫게 해 주지만 극심한 고통을 대가로 요구한다. 특히 유리처럼 날카로운 물체는 갈라진 부분이 아물면서 조금씩 밖으로 밀어내기 때문에 고통은 더 심하다.
세이아칸은 고통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윽고 유리 파편이 천천히 밀려나왔다.
바로 그때였다.
그아아아우우우!
살기 가득한 울음소리와 함께, 검은 물체 하나가 튀어나와 낭떠러지를 향해 폭사돼 갔다.
“헉!”
세이아칸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울음소리에 어린 살기는 신족 제2계급인 그의 솜털마저도 곤두서게 했던 것이다.
“뭐냐?”
그는 세라핌을 보았다.
“제가 있는 곳에서 올라온 게 아닙니다, 천좌!”
세라핌은 검을 뽑아들고 검은 생명체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러나 그가 따라붙기도 전에 생명체는 낭떠러지로 뛰어들었다.
세이아칸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검은 생명체는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서쪽 동굴 쪽에서 올라온 것 같습니다.”
자리로 돌아온 세라핌이 말했다.
“뭐처럼 보였느냐?”
“자세히 보진 못했지만 표범 종류였습니다.”
세라핌은 검은 물체의 정체가 하이 오드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게 표범이란 말이냐?”
세이아칸은 세라핌을 쏘아보았다.
검은 생명체가 흘린 살기. 신족 제2계급에게 소름을 돋게 한 생명체가 한낱 표범일 리가 없다고 세이아칸은 생각했다.
“생김새가 그렇단 말입니다.”
“찾을 수 있겠느냐?”
“방금 움직임으로 볼 때 찾아내는 건 쉽지 않을 겁니다.”
“찾아라!”
세이아칸은 차갑게 말했다.
천좌인 자신의 솜털을 곤두서게 한 존재를 그냥 두고 갈 수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천좌.”
세라핌은 고개를 숙였다.
천좌의 명령은 절대 명령. 아무리 급한 일이 있다고 해도 거부할 수는 없다.
“생포가 불가능하면 머리라도 가지고 와라.”
“다녀오겠습니다.”
세라핌은 곧바로 낭떠러지로 가서는 아래로 뛰어내렸다. 조금 전 김필도가 숨어 있던 선반처럼 튀어나온 곳이었다.
세라핌은 주위를 살피며 천천히 내려갔다.
세라핌을 지켜보던 세이아칸은 몸을 돌려 동쪽으로 향했다.
한편.
낭떠러지로 뛰어든 하이 오드는 엄청난 속도로 떨어지고 있었다.
사실 하이 오드는 리모스로 들어왔을 때부터 계속해서 김필도의 흔적을 더듬고 다녔다. 계단이 아닌 동굴 쪽에서 올라왔던 것도 김필도가 이카렌과 함께 들어갔던 동굴에서 냄새를 확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굴 안에서 김필도의 흔적을 더듬다가 목소리를 듣고 바로 뛰어올라 왔다. 그리고 김필도가 내던져지는 광경을 목격했다.
아마도 김필도가 걱정되지 않았다면 세이아칸을 공격했을지도 모른다.
풍덩!
그아아우우!
아래쪽에서 물소리가 들려오자 하이 오드는 다급해졌다. 하이 오드는 최대한 몸을 폈다.
공기의 저항이 줄어들자 하이 오드의 동체는 무서운 속도로 쏘아져 갔다. 전투기갑을 믿고 감행한 모험이었다.
이윽고 거대한 압력과 고통이 하이 오드를 덮쳤다.
다행히 모험은 성공이었다. 몽롱하긴 했지만 정신을 잃진 않았다.
하이 오드는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김필도를 찾았다. 그리고 잠시 후 물속에 가라앉은 김필도를 발견했다.
얼른 김필도를 잡아채 밖으로 나왔다.
그아아아우우우!
심장이 파괴된 걸 발견한 하이 오드는 살기 가득한 울음을 토했다.
하이 오드는 김필도의 로브를 벗겨냈다. 그러고는 네발짐승의 모습이 아닌 두 다리로 서서는 김필도를 업고 로브 자락을 둘둘 말아 질끈 묶었다.
그아아우우!
낮게 울음을 토해 낸 하이 오드는 어둠을 뚫고 내달렸다. 쉬지 않고 내달린 하이 오드는 입구 높이가 3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동굴 앞에 당도했다.
하이 오드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잘 아는 곳을 향해 가는 것처럼 구불구불 이어진 동굴을 거침없이 내달렸다.
동굴은 상당히 깊었다. 거의 10여 킬로미터는 되는 듯했다.
어둠을 뚫고 쉬지 않고 달리던 하이 오드가 널따란 광장에서 멈췄다.
광장의 형태는 원형이었다.
천장의 높이는 20여 미터에 달했는데 한가운데 마법등 하나가 달려 있었다. 불빛은 희미했지만 사물을 구분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광장의 바닥은 온통 호박색 광채가 일렁였다.
호박색 광채를 흩뿌리는 것은 광장에 놓인 가재도구들이었다. 식탁, 책상, 의자, 책장, 옷장, 서랍장 등 일반 가정에서 사용하는 가구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것들을 만든 재료는 전부 마정석인 하만티움이었다.
그리고 그 가구들로 둘러싸인 중앙에 커다란 침대 하나가 놓여 있었다. 네 귀퉁이에 커다란 기둥을 세운 침대는 상당히 컸다.
침대 위에는 남녀가 누워 있었다.
사내의 키는 2미터 30센티미터 정도고, 여자는 2미터쯤 되어 보였다. 그런데 남자만 인간일 뿐 여자는 아니었다.
여자의 엉덩이 부분에는 꼬리가 길게 뻗어 나와 있었고 귀는 고양이 귀를 닮았다.
놀랍게도 여자는 인간이 아니라 오드였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생김새는 알아볼 수 없었다.
인간 사내와 오드는 60센티미터가량 떨어져 서로를 바라보는 모습으로 누워 있었는데, 그 사이에는 관처럼 생긴 물체가 놓여 있었다. 그것은 누군가 열어본 것처럼 뚜껑이 비스듬히 어긋난 채였다.
김필도를 내려놓은 하이 오드는 침대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가슴을 가볍게 쓸었다.
하이 오드의 전신을 감싸고 있던 갑옷이 검은 안개처럼 변하더니 가슴 쪽으로 모여들었다.
우두득!
뼈마디 부딪치는 소리가 하이 오드의 몸에서 흘러나왔다. 네발짐승에서 직립보행 체형으로 돌아온 하이 오드는 침대 옆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사내와 여자의 가면에 입을 맞췄다.
그아아우!
하이 오드의 눈이 아득해졌다. 마치 옛 기억을 떠올리는 것처럼.
한동안 두 시체를 바라보던 하이 오드는 사내 머리맡에 놓인 거무튀튀한 물체를 집어 들었다.
오각형으로 된 그것은 표면에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그아우!
마치 허락을 구하는 듯 낮게 울음을 터뜨린 하이 오드는 검은 물체를 들고 김필도 옆으로 갔다.
김필도는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너무 많은 피를 흘려 얼굴은 백짓장처럼 창백했다.
김필도 앞에 쪼그려 앉은 하이 오드는 옷을 벗겨냈다. 곧 온몸이 문신으로 도배된 알몸이 드러났다.
김필도의 심장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하이 오드는 뻥 뚫린 그곳에 검은 물체를 내려놓았다.
그아아아우우우!
나직한 울음을 흘린 하이 오드는 거무튀튀한 물체 중앙을 지그시 누르며 마나를 주입했다.
철컥!
아주 작은 소리가 거무튀튀한 물체에서 흘러나왔다.
스스스!
그리고 촉수동물처럼 가느다란 실을 뿜어냈다. 그것은 머리카락보다 더 가늘고 검었다.
새카만 실들은 김필도의 심장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김필도의 전신에서 검은 선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문신들 때문에 자세히 보지 않으면 놓치기 십상이지만 검은 선들은 혈관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몸 안쪽을 전부 채운 검은 촉수는 이번엔 몸 외부를 채우기 시작했다.
김필도는 이집트 미라 같았다.
그아우!
하이 오드는 만족스럽게 웃고는 다시 침대로 걸어가 두 사람 사이에 놓인 관처럼 생긴 상자 안으로 들어갔다.
원래 그녀의 자리였던 듯 하이 오드의 동작은 자연스러웠다. 그 상태에서 하이 오드는 양쪽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고는 빙그레 미소를 짓더니 양손을 가슴에 올리고 눈을 감았다. 하이 오드는 곧 잠이 들었다.
김필도가 눈을 뜬 건 꼬박 하루가 지난 후였다.
그의 몸을 감싸고 있던 촉수는 사라지고, 구멍 뚫린 심장 위에 올려 두었던 오각형 물체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던 심장은 말짱하게 복원돼 있었다.
“내가 꿈을 꾸거나 죽어 천당에 온 건 아닐 테고…….”
김필도는 시선을 내렸다.
“아무래도 죽어 천국으로 온 모양이네.”
김필도는 피식 웃었다.
그의 몸에서 문신이 없는 부분은 얼굴과 손과 발뿐이다. 그런데 지금 눈에 들어오는 몸은 문신을 하기 전 모습 그대로다. 게다가 수많은 흉터도 보이지 않을뿐더러, 문 대륙으로 와서 익혔던 실전 마법의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맞아, 심장이 뚫렸지…….”
그 상황에서 살아남는다면 인간이 아닐 터였다.
“그런데 여긴 어딘데…….”
몸을 일으켜 세운 김필도는 멍해졌다.
1미터 앞에 오드가 서 있었다. 오드는 전에 구해 주었을 때처럼 알몸이었다.
“너도 죽었냐?”
김필도는 물었다.
그아우!
“안 죽었다고?”
그아아아우우!
“나도 죽은 게 아니라고?”
캬아!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심장이 뚫렸는데…….”
김필도는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어딘가 달랐다. 염라대왕이 치매에 걸렸으면 모를까 자신은 죽는다고 해도 천국 같은 곳과는 거리가 한참 먼 사람이다.
“이건?”
또다시 김필도는 멍해졌다.
바로 옆에 방탄조끼, 로브, 드레스셔츠, 속옷 신발 등이 나뒹굴고 있었다. 드레스셔츠는 검붉은색으로 염색을 한 것 같았다. 심장에서 쏟아진 피가 말라붙은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가 누워 있던 자리 옆에는 뱀의 허물 같은 것이 떨어져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김필도는 오드를 보았다.
그아아아우! 그아아아! 아우우!
“헤를리온이 나를 살렸다고?”
김필도의 말에 하이 오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심장을 튜닝한 상태라고?”
튜닝이란 말의 의미를 모르는 하이 오드는 고개를 갸웃했다.
“완전 아이언 맨이네.”
믿어지지가 않았다.
세이아칸의 검이 심장으로 파고들어 오는 걸 눈으로 목격했다. 놈은 손목을 좌우로 돌려 구멍을 넓히기까지 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아난 것이다.
아니 온몸에 새겼던 문신이 사라지고, 실전 마법을 익히고 난 후 생겨났던 마법진도 모습을 감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속에는 활화산이 잠들어 있는 듯하다.
“그러니까 여기에 헤를리온이 들었다는 거야?”
그아우우!
“가만!”
김필도는 아공간을 열어 하만티움 판을 꺼냈다.
그리고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이거였어.”
김필도는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물론 그 보고서에는 철족의 족장이었던 헬칸(Hell kan)의 심장에 검을 찔러 넣었다는 보고도 포함돼 있었다.
그런데 보고뿐이었다.
5만 명에 달했던 별동대는 단 한 명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철족은 역사 속에서 떠나갔다.
그리고 누구도 그 일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채 우리는 전쟁을 계속했다.
그리고 1천 년 후.
그들이 나타났다.
심장이 찔려 죽었다고 하였던 철족의 족장 헬칸과 헬이라고 불렸던 5천 명의 결사대가.
분명 헬칸은 심장을 찔려 죽임을 당했다고 하였다. 그랬던 그가 1천 년 후 멀쩡한 모습으로 다시 나타났다?
“그 역시 헤를리온을 새로운 엔진으로 사용했던 거야.”
김필도는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어떤 상황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자신의 목숨을 구한 이는 오드고, 심장 대신 헤를리온을 엔진으로 사용하는 인간이 됐다는 사실이다. 더불어 누워 있던 자리에 떨어진 검은 허물.
“저 허물은 무협 소설에서나 볼 수 있는 환골탈태한 흔적이고.”
모든 것이 추론이지만 대충 아귀가 맞아떨어진다.
“이제 변한 내 모습을 확인해 봐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