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
김필도는 아공간을 열었다. 그러고는 한편 구석에 처박아 둔 거울을 꺼내, 하이 오드에게 건넸다.
거울은 가로 30센티미터 세로 20센티미터 크기였다.
캬아!
“이렇게 들고 있으면 돼.”
김필도는 거울의 위치를 잡아주었다. 그러고는 전에 이카렌이 그랬던 것처럼 심장 부분에 오른손을 얹었다.
둥둥둥! 둥둥둥!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신갑이라고 불렸던 헤를리온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궁금했다. 아니 정말로 헤를리온을 착용했는지 그것도 의심스러웠다.
“믿는다. 죽었던 내가 다시 살아날 수 있었던 이유는 헤를리온을 착용했기 때문이다. 난 믿는다.”
김필도는 심호흡을 했다.
그러고는 낮게 외쳤다.
“오픈(Open)!”
슈우욱!
오픈이란 명령어가 떨어지자마자 김필도의 심장에서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검은 운무가 뭉클뭉클 흘러나와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스르르! 철컥! 스르르! 철컥!
그리고 쇠가 미끄러지는 소리와 걸쇠가 걸릴 때 나는 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김필도에겐 하염없이 길게 느껴졌다.
철컥!
마지막을 알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김필도는 시선을 내렸다. 어느새 검은 운무는 사라지고, 단단한 철갑이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그런데 다리 모습이 눈에 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떠올린 대상은 아이언 맨이었다.
“아니겠지.”
김필도는 피식 웃으며 하이 오드가 들고 있는 거울을 보았다.
“……?”
김필도는 할 말을 잃었다.
거울 안에 있는 얼굴은 정말 그 얼굴이었다.
동양인처럼 위로 조금 찢어진 눈은 푸른 광채를 뿌리고, 볼은 약간 홀쭉해 보이고, 코는 없다. 해골보다 조금 나아 보이는, 영락없는 아이언 맨의 얼굴이었다.
김필도는 거울 너머로 하이 오드를 보았다.
캬아!
하이 오드는 마음에 드는 듯 활짝 웃었다.
“혹시 바꿀 수 없는 거냐?”
김필도는 물었다.
척!
그러자 하이 오드는 그에게 거울을 건네고는 자신의 가슴을 더듬었다. 곧 가슴에서 검은 운무가 나오고 표범 모습이 됐다.
“그러니까 너도 처음에 그 모습이었으니까 바꿀 수 없다는 거야?”
캬아!
“끙!”
그는 검은 운무가 온몸을 감쌌을 때 아이언 맨을 떠올렸다. 그건 갑옷 때문이 아니고 심장이 그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전투기갑 헤를리온이 아이언 맨 슈트 형태가 돼 버린 것이었다.
카아!
“멋있는데 왜 그러냐고?”
크!
“아이언 맨은 붉은색에 황금색 가면을 썼단 말이야. 내가 입고 있는 것처럼 검은색이 아니라고. 그것도 유광도 아니고 무광이잖아.”
김필도의 불만은 다름 아닌 무광의 기갑이었다.
그의 삶의 철학은 폼생폼사.
칙칙한 무광의 전투기갑의 모습이 기분 좋을 리가 없다. 그나마 좀 위로가 된다면 기갑 표면에 생겨나 있는 문양이랄까.
단순하게 색만 칠해져 있는 아이언 맨에 비해 그의 갑옷에는 갖가지 문양이 상감을 뜬 것처럼 새겨져 있다. 그 문양은 다름 아닌 김필도 몸에 새겼던 문신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는 없지만 전에 새겼던 문신은 물론이고 이곳에 와서 얻었던 마법진마저 전부 전투기갑 표면으로 옮겨가 있었다.
“문신은 역시 몸에 있어야 가오가 잡히는데. 뭐야 이거!”
카아아아!
“위로할 필요 없어. 살아난 것만 해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아무튼 고마워.”
김필도는 가슴에 손을 대고 헤를리온을 해제했다. 그러고는 옆에 뒹굴고 있는 옷을 입었다.
하이 오드는 옷을 입는 김필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김필도가 로브를 걸치고 나자 침대가 있는 곳으로 끌고 갔다.
침대에는 남녀로 보이는 시체가 누워 있었다.
“누구지?”
김필도는 시체를 살피며 물었다.
캬아아!
“아빠와 엄마… 응?”
김필도는 깜짝 놀랐다. 문득 하이 오드의 말을 알아듣고 있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물론 하이 오드는 말을 한 적이 없다. 하지만 김필도는 지금껏 하이 오드와 대화를 나누었다. 아니 생각을 교환했다고 해야 했다.
“지금 우리 둘이 말이 통하는 거냐?”
카아아아아!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인사나 하라고?”
김필도는 시체를 바라보았다.
사내는 2미터 30센티미터쯤 되어 보이고, 여자는 오드였다. 눈을 감은 채라 알 수는 없지만 하이 오드가 엄마라고 한 걸 보면 여자 시체 또한 하이 오드임이 분명하다. 문제는 이들이 누구냐 하는 것이었다.
헤를리온의 주인이라면 리모스를 멸망시켰다는 헬칸과 카라가 분명할 터인데 하이 오드가 이들을 엄마와 아빠라고 부른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까마득한 세월 전에 존재했던 자들이 아닌가.
“…혹시 여기에 적혀 있으려나?”
사내의 머리맡에서 하만티움으로 된 판을 발견했다.
김필도는 하만티움 판을 집어 들고 테이블이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테이블 앞에 선 그는 아공간을 열었다.
“옷 없어?”
바로 옆에서 빤히 바라보는 하이 오드에게 물었다.
크!
“알았어.”
김필도는 차원을 넘기 전에 입고 있었던 드레스 셔츠를 꺼내 내밀었다.
하이 오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마도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것 같았다.
김필도는 직접 셔츠를 입혀 주었다. 여자의 체구라고 하지만 2미터에 달하는 키 때문인 듯 셔츠는 꽉 끼었다.
하지만 입지 않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김필도는 아공간에서 주전자와 카판 가루 그리고 카판 내리는 도구를 꺼냈다.
“불티나!”
그는 오른손 손바닥을 펴며 낮게 소리쳤다. 그러자 전과 다름없는 불꽃이 손바닥 가운데에 생겨났다.
문득 그의 얼굴에 실망의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전설의 신갑이라는 헤를리온을 얻었으니까 마법에도 변화가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를 했다. 물론 변화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불티나 불꽃은 헤를리온을 얻기 전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광폭의 바람 라콰(Laqwa)!”
슈욱!
“헉!”
손바닥 위에 솟아 있던 불티나 불꽃은 토치가 아닌 용접기 수준으로 변해 있었다. 지금 상태로 주전자를 가져다 대면 바로 구멍이 나 버릴 것만 같았다.
만일 이 불꽃에 불의 속성인 세딕(Sedic)까지 끌어올린다면 그야말로 가공할 무기가 탄생할 듯했다.
“그건 나중에. 지금은 카판이 더 급해.”
김필도는 불꽃을 조절하여 토치로 만들었다.
처음이라 불꽃을 조절하는 게 익숙하지 않지만 그 또한 시간이 흐르면 해결될 것이다.
물이 끓자 또호야 잎으로 만든 깔때기 안으로 조금씩 부었다. 처음엔 빙글빙글 돌려가며 붓고 나중엔 높이를 높여가면서 부었다.
내려진 카판은 두 잔 분량이었다.
그는 두 잔에 나눠 따른 후 설탕을 넣고 스푼으로 저었다. 그리고 한 잔은 하이 오드 앞에 놓았다.
캬!
하이 오드는 카판과 김필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김필도는 시범을 보이듯 천천히 카판을 마셨다.
잠시 후 하이 오드는 김필도처럼 카판을 마셨다.
“머리는 좋네.”
김필도는 빙그레 웃으며 하만티움 판을 보았다.
-철족 족장 헬칸이 남긴다.
역시 예상대로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은 리모스를 멸망시켰던 헬칸과 카라였다. 전반부의 내용은 전에 얻은 판에서 보았던 것과 같다. 다만 철족의 입장에서 기술된 내용이라 다섯 종족이 좀 더 야만스럽고 잔인하게 묘사가 돼 있었다.
-나는 미련도 후회도 없다.
이제 머잖아 찾아올 어둠의 손님만 맞이하면 된다.
그런데,
오! 신이시여.
단 한 번도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는데 카라가 임신을 했다.
임신.
다른 이들에겐 축복일지 모르지만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내겐 형벌과 같았다. 어쩌면 수십만을 죽인 내게 신이 내린 형벌인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카라와 나의 분신을 죽일 수도 없었다.
그날부터 카라와 난 시아나를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가장 먼저 한 일은 그 아이의 시간을 늦추는 것이었다. 헬(Hell)을 훈련시킨 훈련장을 만들 때와는 반대의 과정이었다. 이곳의 1개월은 외부의 1년에 해당하도록 마법을 펼쳤다.
“아!”
김필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실전 마법을 익혔던 비밀의 방. 요른은 훈련장일 가능성이 높다고만 했을 뿐 정확하게 누가 훈련을 했는지는 알아내지 못했다.
그런데 이곳에서 그 비밀이 밝혀졌다.
그곳에서 훈련을 했던 자들은 다름 아닌 리모스를 초토화시킨 헬이었던 것이다. 여긴 훈련장과 반대로 만들어진 장소였다.
-그리고 시아나에게 헤를리온을 착용시키고 영원의 잠을 자는 마법을 걸었다.
영원의 잠이란 드래곤들이 잠자는 방식을 말한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다 했다.
시아나가 언제 깨어날지 그건 오직 신만이 아실 것이다.
신이시여!
부디 우리 시아나를 돌봐주소서.
“그랬구나.”
판을 내려놓은 김필도는 하이 오드를 보았다.
그녀의 이름은 시아나였다. 시간이 없어 말을 가르치지 못했는지, 아니면 영원의 잠을 자면서 모두 잊었는지 모르지만 시아나는 말을 전혀 하지 못한다.
다만 머릿속으로 의사 전달만 가능하다.
“네 이름은 시아나야.”
캬!
“시아나!”
캬!
“천천히 배우도록 하자.”
김필도는 빙그레 웃으며 남아 있는 카판을 마셨다. 시아나 앞의 카판 잔 또한 비어 있었다.
김필도는 카판을 내릴 때 사용한 도구들을 챙겨 아공간 안으로 집어넣었다.
“가지고 나갈 거 있으면 챙겨. 당분간 이곳에 오기 힘들지도 모르니까.”
캬!
시아나는 침대가 있는 곳으로 갔다. 그리고 잠시 후 시아나는 작은 주머니 하나를 가지고 와 내밀었다.
“열어 봐도 돼?”
김필도는 물었다.
캬!
시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김필도는 주머니를 열어보았다. 안에는 많은 것들이 들어 있었다. 아마도 시아나가 어른이 됐을 때 사용하라고 헬칸이 준비해 놓은 것들인 모양이었다.
김필도는 안에 있는 것들 중 옷 한 벌을 꺼내 시아나에게 내밀었다.
그 옷은 스판덱스 소재로 만든 것처럼 신축성이 뛰어났다.
네발짐승의 체형과 직립 보행할 때의 체형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신축성 있는 소재로 만든 옷을 입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캬아!
시아나는 낮게 울음을 터뜨렸다.
“일단 그것부터 벗어.”
김필도는 고개를 흔들고는 시아나가 입고 있는 드레스 셔츠를 가리켰다.
그아아우우!
시아나는 인상을 쓰며 김필도를 노려보았다. 옷을 벗기 싫다는 뜻이었다.
“이걸 입고 나서 그걸 위에 입으면 돼. 무슨 말인지 알겠지?”
그제야 시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아나는 단추를 풀고 드레스 셔츠를 벗었다.
김필도는 드레스 셔츠를 입혀 주었을 때처럼 이번에도 옷을 입혀 주었다. 옷은 상의와 하의가 하나로 붙은 일체형이었다.
김필도는 설명을 곁들이면서 옷을 입혔다.
옷을 다 입히고 나서는 드레스 셔츠를 카디건처럼 걸쳐 주었다.
“거울 볼래?”
김필도는 아공간을 열어 거울을 꺼내 비춰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