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
캬아아아아!
문득 시아나의 눈빛이 아득해졌다.
“엄마 옷이구나.”
김필도는 시아나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온통 그리움으로 가득 들어차 있다. 시아나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에서 기억조차 희미해져 버린 엄마의 모습을 찾아낸 것이다.
“공연히 보여 줬네. 그만 나가자.”
김필도는 거울을 도로 집어넣고 몸을 돌렸다.
캬아!
“아직 꺼내지 않은 게 있다고?”
캬!
“자!”
김필도는 주머니를 건네주었다.
주머니를 받아든 시아나는 안에서 뭔가를 꺼내 김필도에게 내밀었다. 그것은 50센티미터 길이의 검 손잡이였다.
김필도는 검 손잡이를 살폈다.
손잡이 한가운데에는 카이(Kai)라는 고대어가 새겨져 있었다. 잊힌 전설의 신검 중의 가장 강하다는 카이가 분명할 텐데, 마족과 천족이 가지고 다니는 보통 검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고마워.”
김필도는 마법 주머니를 시아나 배꼽 부분에 달린 주머니 안에 넣어 주었다. 그러고는 좌식 테이블을 그의 아공간으로 집어넣었다. 야영을 할 때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겠다 싶어서.
그리고는 시아나를 데리고 동굴을 나섰다.
캬아!
“나도 오래 머물고 싶지만 여기 하루는 바깥의 10일이 넘어.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고 놀다가는 밖으로 나갔을 때 폭삭 늙어 버릴 수도 있어.”
키!
“정말이야, 시아나.”
크!
휙!
시아나의 동체가 전방으로 빠르게 쏘아져 나갔다.
“나도 이젠 시아나 너 못지않게 달릴 수 있어.”
김필도는 빙그레 웃으며 몸을 날렸다. 그의 말마따나 그가 달려가는 속도 또한 시아나와 비슷했다.
물론 그는 마음속으로 바람의 속성 마법인 라콰(Laqwa)를 펼치고 있었다.
“드디어 이뤘다.”
김필도 얼굴에 환한 미소가 맺혔다.
제2장 김필도에게 익숙해진다는 것은
세라핌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낭떠러지를 내려온 지 어느덧 10일이 지났다.
하지만 표범 비슷한 검은 생명체의 정체는 고사하고 흔적조차도 찾지 못했다.
진작 돌아갔어야 했는데 ‘하루만 더’ 하다가 10일이 훌쩍 지나 버렸고, 이젠 빈손으로 돌아갈 수도 없게 되고 말았다.
천좌인 세이아칸에게 보고를 할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아무런 소득도 없이 10여 일을 허비한 상황이라 차마 연락을 할 수가 없었다.
“욕을 먹더라도 돌아갔어야 했는데…….”
공을 세우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다만 상관인 세이아칸이 완벽을 추구하는 성격이라, 검은 생명체를 잡아가지 못하면 정체라도 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주변을 살피다 보니 시간이 지났을 뿐이다.
그런데 이젠 정말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응?”
뭔가 깜빡이는 것을 본 것 같았다. 그는 눈을 가늘게 모았다.
“불빛?”
파앗!
그의 신형이 전방으로 폭사돼 갔다.
10여 일 이상이 지났고, 광산 북쪽의 황량한 벌판에서 불을 피우는 저들이 어쩌면 검은 생명체의 정체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라핌의 예상대로 불빛의 정체는 모닥불이었다.
모닥불 위에는 삼각대가 걸쳐져 있고, 삼각대 중간에는 무쇠 판이 달려 있는데, 한쪽엔 주전자가 놓였고, 그 옆에는 고기가 지글지글 익어가고 있다.
그리고 로브를 걸친 인간 한 명이 모닥불에 손을 쬐고 앉아 있다. 로브 후드를 눌러써 얼굴을 알아볼 수는 없지만 덩치로 보건대 인간임이 틀림없었다.
모닥불 근처로 다가가자 고기 냄새와 카판 냄새가 뒤섞여 풍겨왔다.
문득 그동안 제대로 된 식사를 한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험!”
세라핌은 헛기침을 했다.
그러자 로브 사내는 고개를 들었다.
“억!”
세라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귀신을 본 것처럼 주춤 물러났다.
놀랍게도 로브 후드 안 얼굴은 천좌 세이아칸에게 죽임을 당했던 그 인간이었다.
“덩치 큰 놈들은 놀라지 않는 줄 알았는데?”
김필도는 피식 웃었다.
“명이 길구나.”
세라핌은 감각을 끌어올려 주위를 살폈다.
그는 많은 실전을 거친 탓에 노련했다. 무쇠 판 위에서 구워지는 고기의 양으로 김필도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지글지글 기름을 흘리는 고기는 혼자 먹기엔 양이 너무 많았다. 당연 주위에 누군가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걔 찾을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
김필도는 그렇게 말하고는 작은 칼로 고기를 찍더니 접시에 담아 옆에 놓았다.
함께 왔던 시아나는 김필도 옆에 없었다. 그 이유는 야생성 때문이었다. 오랜 세월을 숲에서 살아왔던 그녀는 모닥불 가에 앉아 카판을 마시고 고기를 구워먹는 정적인 생활을 견디지 못했다.
결국 따분함에 안절부절못하던 시아나는 어둠 속으로 떠났다.
“내가 누굴 찾는지 아느냐?”
세라핌은 김필도를 가만히 바라보며 물었다.
“오드를 찾아온 거 아니었어?”
“오드? 그 검은 생명체가 오드였느냐?”
“정확하게는 하이 오드야.”
“하이 오드?”
“이곳을 멸망시켰던 헬칸과 카라의 딸이고, 두 개의 헤를리온 중 하나의 주인이기도 해.”
“……!”
세라핌은 일순 말을 잃었다.
헬칸, 카라 그리고 그들의 딸, 헤를리온.
너무 까마득하고 엄청난 말들이라 헤아리는데 한참 시간이 걸렸다. 더불어 그런 말들을 인간으로부터 듣는 지금 상황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놀란 모양이지?”
김필도는 카판을 내리는 도구에 뜨거운 물을 붓고는 세라핌을 보았다.
“저, 정말 하이 오드가 헤를리온을 착용하고 있단 말이냐?”
세라핌은 확인하듯 물었다.
“자식 생각하는 부모 마음은 원래 그렇잖아.”
“그런데…….”
“내가 어떻게 하이 오드를 아냐고?”
김필도의 말에 세라핌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세라핌은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심장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던 인간이 어떻게 해서 다시 살아날 수 있었는지. 그 검은 생명체가 하이 오드라는 건 어떻게 알았는지. 하이 오드가 헬칸과 카라의 딸이라는 사실은 누구에게 들었는지. 우선순위를 가릴 수 없이 모든 게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다.
“내 목숨을 구해 줬거든.”
김필도는 내려진 카판을 잔에 따랐다.
“널 구해 줘?”
“전에 내가 작은 도움을 준 적이 있었어.”
“그에 대한 보답으로 널 구해 주었단 말이냐?”
“아마도!”
김필도는 카판 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넌 심장이 찔렸다. 단순히 찔린 것도 아니고 검날을 좌우로 돌렸기 때문에 설사 포션을 들이붓는다고 해도 나을 수 없다.”
“그러니까 그 치사한 새끼가 내 심장에 크게 구멍을 낸 이유가 포션으로도 살릴 수 없게 하려고 그런 거였어?”
“아주 빠른 시간에 최상급 포션을 들이부으면 살아날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비록 그림자 대공이라고 하지만 발탄 제국 황족이면 최상급 포션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지.”
“그러니까 나름 치밀하게 처리했다는 말이네?”
“하찮은 인간을 상대로 치밀하게 일을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럼?”
“천좌께서는 스스로에게 엄격하신 분이다.”
“스스로 오점을 남기기 싫어서 확실하게 처리했다는 말이지?”
“그렇다.”
“이젠 어떻게 할 거지?”
“난 루시안 네가 살아났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보고를 하지 않을 생각이다.”
스르릉!
세라핌은 등에 차고 있던 검을 빼들었다.
“하지만 하이 오드에 대해서는 궁금하겠지.”
김필도는 왼편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그의 손에는 설풍이 들려 있었다.
“널 잡아 위협을 하면 하이 오드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데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냐?”
“굽고 있던 고기의 양을 보고 하이 오드가 이 근처에 있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군.”
“맞다.”
“세이아칸 그놈은 참 안됐어.”
김필도는 안쓰럽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무슨 말이냐?”
“머리 좋은 부하가 한 명 정도 있으면 편할 때가 아주 많거든.”
김필도는 차갑게 웃으며 설풍을 내려놓고 심장 부근을 가볍게 쓸었다.
스스스!
검은 안개가 흘러나와 김필도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곧이어 김필도는 헤를리온을 착용한 모습으로 변했다. 그는 허리춤에 있는 고리에 설풍을 걸었다.
헤를리온에는 곳곳에 무기를 착용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돼 있다. 등에는 마족이나 천족이 사용하는 2미터 길이의 대검을 고정할 수 있는 장치가 있고, 허리 또는 허벅지 등에도 다양한 크기의 무기를 장착할 수 있도록 크고 작은 장치가 마련돼 있다.
설풍을 건 것도 그 장치들 중 하나였다.
“으음!”
김필도를 지켜보던 세라핌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전사의 강약은 몸 주위에 형성되는 마나 역장의 세기로 판단한다. 일반적으로 전투기갑을 걸친 전사들은 아주 강하고 안정된 마나 역장을 지니게 되는데, 전투기갑을 착용하기 전과 후가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런데 김필도는 하늘과 땅만큼의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전투기갑을 착용하기 전 모습을 검술을 전혀 모르는 평민으로 간주한다면, 전투기갑을 착용한 지금은 천족 제1계급들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강함이 감지된다.
“그건?”
세라핌은 김필도 위아래를 훑듯이 살폈다.
문득 저런 엄청난 변화의 원인이 전투기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 튜닝한 심장이야.”
“튜닝한 심장?”
“헤를리온이라는 심장이라고.”
파앗!
김필도의 신형이 세라핌을 향해 폭사돼 갔다.
가공할 속도로 쏘아져 가는 헤를리온 표면에 검은 마법진이 나타나 섬뜩한 광채를 뿜어냈다.
“난 세라핌이다!”
천좌10군의 수장이라는 자신감이었다.
세라핌은 틀어쥔 검을 강하게 휘둘렀다.
그의 대검에서 강렬한 빛을 내는 광채 덩어리가 쏘아져 나갔다. 새하얀 광채 덩어리인 그것은 빛의 마법의 집대성이라고 부르는 광자 벌컨이었다.
‘땅의 속성 노콴(Noqan)!’
“부상!”
김필도는 짧게 소리쳤다.
스아악!
그가 달려가고 있는 아래쪽 땅이 파도처럼 일어나더니 세라핌을 향해 나아갔다.
퍼억!
세라핌이 쏘아낸 광자 벌컨은 김필도를 떠받친 흙더미를 강타했다.
광자 벌컨을 맞은 흙은 순식간에 원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천족 마법의 집대성인 광자 벌컨에는 다른 마법을 무력화시키는 안티 매직 마법이 걸려 있었다.
하지만 김필도의 신형은 이미 흙더미를 떠나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광속의 라콰를 펼친 상태에서 노콴의 힘이 더해지자 그의 움직임은 빛살을 방불케 하였다.
“차앗!”
세라핌은 강하게 기합을 내지르며 왼편 아래를 향하고 있던 검을 강하게 쳐 올렸다. 또다시 세라핌의 검에서 광자 벌컨이 쏘아졌다. 광자 벌컨이 향한 곳은 5미터 앞까지 치고 들어온 김필도의 몸통이었다.
“강철의 굴강 노콴(Noqan)!”
우렁찬 외침이 김필도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그리고 굳게 틀어쥔 오른손 주먹을 힘껏 내밀었다.
콰앙!
광포한 폭음과 함께 김필도와 세라핌은 뒤로 물러났다. 물러난 거리는 김필도가 20여 미터고 세라핌은 5미터가량이었다.
첫 번째 충돌은 세라핌의 우세였다.
척!
거꾸로 공중제비를 돈 김필도는 바닥으로 내려섰다.
왼팔은 앞으로 뻗어 땅을 짚고, 잔뜩 구부린 왼다리는 왼손 바로 뒤쪽에 댔고, 오른 다리는 쭉 뻗은 채였다.
그가 이런 식으로 떨어지는 건 몸이 받는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였다.
투구 속 김필도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맺혔다.
이곳 리모스로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저자들 앞에서는 눈에 힘조차 주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은 눈에 힘을 주는 걸 넘어서 거의 대등하게 싸우고 있다.
‘8기통 V8 트윈터보의 심장은 나야. 내 심장이 그렇게 튜닝됐다고. 가 보는 거야. 가속 페달을 끝까지 밟고, 튜닝한 심장이 얼마나 버티는지 몸으로 확인하는 거야!’
다시 머릿속으로 에미넴의 노래 ‘Kill you’가 들려온다.
“광속의 바람 라콰(Laqwa)!”
김필도는 광포하게 고함을 지르며 왼손과 왼발을 동시에 튕겼다.
슈아악!
그의 신형이 가공할 속도로 쏘아져 갔다.
휙!
세라핌은 김필도를 노려보며 오른편으로 몸을 날렸다. 그는 엄청난 속도로 쏘아져 들어오는 자를 향해 달려들 정도로 무모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