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
김필도는 헬칸의 무덤에서 가져온 좌식 테이블을 꺼내 놓았다.
그런 다음 채소를 건져 물기를 뺐다.
접시를 꺼내 채소를 담고, 절반가량 익힌 아스파라거스와 부로콜리를 잘라 얹었다. 그리고 겨자 가루와 꿀을 섞어 만든 소스를 끼얹어 테이블 위에 놓았다.
포크와 나이프를 꺼내 세팅하고, 술도 한 병 꺼냈다. 물론 그가 꺼낸 술은 전에 마시다 남겨 놓은 신의 눈물이었다. 술잔을 꺼내 술을 채우고 널따란 접시에 고기를 담아 두 사람 앞에 놓았다.
크!
기다렸다는 듯 시아나는 손으로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김필도는 그런 시아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고기를 잘랐다. 그러고는 자른 고기를 포크로 찍어 입에 넣었다.
게걸스럽게 고기를 뜯어먹던 시아나가 우뚝 손을 멈췄다. 그녀는 뜨악한 얼굴로 김필도를 보았다.
맛있는 음식을 왜 저렇게 깨작대는지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이다.
시아나가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거나 말거나 김필도는 우아하게 식사를 했다. 샐러드를 먹고, 술도 조금씩 곁들였다.
캬!
시아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고기를 입 안으로 쑤셔 넣었다. 눈 깜짝할 새 한 덩어리를 해치운 그녀는 김필도 앞으로 접시를 내밀었다.
김필도는 남은 고기를 담아 주었다.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시아나는 고기를 덥석 그러쥐어 입으로 가져갔다.
고기를 먹는 속도도 빨랐다. 날고기를 먹던 습관 때문인 듯했다. 커다란 덩어리가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김필도는 물을 따라 시아나 앞에 놓았다.
시아나는 물을 마시며 신기한 표정으로 김필도를 바라보았다. 아니 살폈다.
김필도는 느긋하게 술을 마시며 식사를 마치고 아공간에서 물을 꺼내 설거지를 했다.
“아무래도 여긴 마법과 현실이 공존하는 장소인 것 같아.”
김필도는 물기를 닦아낸 접시를 아공간으로 집어넣으며 말했다.
문 대륙의 밤은 영하 20도는 기본이다. 그런데 이곳은 초가을 밤처럼 약간 서늘한 느낌만 들 뿐이다. 마법을 이용해서 기후를 바꿔 놓은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괜찮은 곳이야.”
캬아!
휙!
정리가 끝나자 시아나는 다시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자식!”
김필도는 빙그레 웃으며 모닥불에 나무를 던져 넣었다. 불길은 금세 커졌다.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을 바라보며 자리를 잡고 누웠다. 하지만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카판 때문인가?”
카판이 아니라 천족 때문일 테다.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던 자를 잡았다는 기쁨의 여파가 카판에 들어 있는 카페인보다 더 강하게 온몸을 잠식하고 있다. 어쩌면 앞으로 며칠간 잠을 자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점 익숙해질 거야.”
그에게 익숙해진다는 것은 곧 강해진다는 의미였다.
제3장 나는야 노가다 마법사
뒤척거리다가 늦게 잠들었지만 눈은 일찍 떠졌다.
명상을 하고 운동으로 몸을 푼 다음 빵과 주스로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길을 나섰다. 물론 시아나에게도 먹였다.
광산지대를 지나 빛의 땅으로 들어섰지만 주위는 조용했다.
“다 떠났나?”
김필도는 감각을 최대한 개방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걸려들지 않았다. 인적이 전혀 없는 완전한 공백뿐이었다.
“아 맞다, 750.”
문득 블랙칸을 두고 왔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건물들 사이를 빠르게 내달린 김필도는 맨 처음 들어갔던 건물로 가 보았다. 하지만 블랙칸은 자리에 없었다. 대신 블랙칸의 안장에 걸어 두었던 이야크 창만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김필도는 이야크 창을 집어 들었다.
“이게 뭐지?”
무릎을 굽혀 보니 이야크 창 아래쪽에 글이 적혀 있었다.
-살아나올 거라고 믿어. 블랙칸은 벌판에 두고 갈게. 그리고 이글을 보는 즉시 나와. 들어오는 입구가 파괴 돼 리모스에 문제가 생길지도 몰라.
“이카렌이네.”
김필도는 방긋 웃었다.
그에게 반말을 할 수 있는 이는 이카렌 말고는 없었다.
“그나저나…….”
몸을 일으킨 김필도는 빠르게 걸었다.
리모스로 들어오는 입구는 마법으로 만든 통로였고, 리모스 안쪽 또한 곳곳에 마법이 펼쳐져 있다.
만일 들어오는 입구와 리모스 안쪽에 펼쳐진 마법이 연동돼 있다면, 커다란 변화를 초래할지도 모른다. 안으로 들어왔던 자들이 서둘러 나간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인 듯했다.
김필도가 처음 들어왔던 곳에 발을 디딘 건 두 시간 후였다.
리모스로 들어가는 입구는 직사각형 건물로 마치 여객선 대합실을 연상시킨다. 리모스를 빠져나가는 출구는 입구에서 5백 미터 북쪽에 위치해 있는데 건물 형태는 비슷하다. 두 건물의 동쪽엔 50미터 높이의 절벽이 자리하고 있다. 그 절벽 아래쪽으로 출구로 향해 가는 길이 나 있었다.
김필도는 입구를 지나쳐 북쪽으로 길을 잡았다.
“조금 이상한 것 같기도 하고…….”
김필도는 고개를 갸웃했다.
마치 좁고 답답한 장소에서 널따란 벌판으로 나갔을 때처럼 해방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들어올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사라진 입구 때문인가?”
김필도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출구 또한 구조는 입구와 비슷했다.
관리가 근무하는 공간, 방문자들이 대기하는 공간, 그리고 마법진이 새겨진 공간. 그렇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김필도는 곧바로 마법진이 있는 공간으로 들어갔다.
“으응?”
공간 바닥에 있어야 할 마법진이 보이지 않았다. 건물 구조는 입구와 쌍둥이처럼 닮아있으니까, 마법진도 같은 장소에 만들었을 것이다.
“끙!”
김필도는 얼굴을 찌푸리며 밖으로 나왔다. 혹시 다른 곳에 마법진이 있나 싶어서. 하지만 마법진은 어디에도 없었다.
“젠장 갇힌 거 아닌가 모르겠네.”
철썩!
문득 귀에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김필도는 잘못 들었나 싶어 잠시 죽은 듯 서 있었다.
철썩!
그건 분명 파도 소리였다.
김필도는 창가로 다가갔다.
“와우!”
바로 앞에는 엄청난 키를 자랑하는 침엽수가 우뚝우뚝 솟아 있고, 침엽수림 너머에는 백사장이 펼쳐져 있다. 그리고 백사장 끝은 물이 넘실대고 있었다.
휙!
김필도는 창을 훌쩍 뛰어넘어 밖으로 나갔다.
그가 있던 건물에서 백사장까지는 1백 미터가량이었다.
물가로 가자마자 먼저 맛을 보았다. 소금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호수네.”
바다일 리는 없을 테니까 호수가 분명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서 있는 곳에서 호수 건너편이 보이지 않았다.
호수가 그만큼 크다는 의미다.
“문 대륙에서 이 정도로 큰 호수는 영원의 호수밖에 없는 걸로 아는데…….”
“맞네. 자네가 보고 있는 호수는 영원의 호수네.”
뒤쪽에서 들려온 낯선 목소리에 김필도는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백사장과 침엽수림의 경계선상에 있는 커다란 바위 아래쪽 동굴 안에 있었다.
김필도는 바위를 향해 걸어갔다.
그사이 동굴 속에 있던 자가 밖으로 나왔다.
“어?”
김필도는 깜짝 놀랐다.
놀랍게도 바위 아래쪽에서 기어 나온 자는 이야크 평원에서 한 번 본 적이 있는 히데우스였다.
그런데 히데우스의 상태가 몹시 나빠 보였다.
전투기갑을 착용하고 있어 얼굴은 확인할 수 없지만 몸 주위의 마나 흐름이 아주 약했다.
“묘한 곳에서 다시 만나는구먼.”
히데우스는 바위에 기대앉으며 말했다.
“그러게요. 오픈(Open)!”
김필도는 아공간을 열어 좌식 테이블 그리고 신의 눈물과 술잔을 꺼냈다.
“내가 술을 마시고 싶어 한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가?”
“만일 내게 주어진 시간이 30분 혹은 1시간밖에 없다면 멋진 경치를 바라보며 술 한잔할 것 같거든요.”
김필도는 술잔에 술을 채우며 대답했다.
“좋은 친구와 함께라면 더 좋겠지.”
“거기에 최고의 술이 있으면 금상첨화지요.”
“진짠가?”
히데우스는 술병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번에 얻은 건 아니고, 전에 내게 지도를 주었던 분이 물려주신 술입니다. 난 모르겠는데, 오는 길에 만났던 어떤 사람이 진짜라고 하더군요.”
“설사 가짜라고 해도 저 정도로 정교하게 만드는 자라면 술맛은 믿어도 되겠구먼.”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조금 전에 한 말 말이네.”
“무슨 말 말입니까?”
“멋진 경치를 바라보며 술 한잔할 것 같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랬지요.”
“그런 경우엔 보통 가족을 찾아가야 하는 거 아닌가?”
“찾아갈 가족이 없으니까 술을 마신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군.”
히데우스는 김필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술잔을 비웠다.
“진짜군.”
히데우스는 맛을 음미하듯 눈을 감고 있었다. 그렇게 잠시 있다가 김필도의 술잔에 술을 채워 주었다.
“죽기 전에 반드시 마셔 봐야 할 술이죠.”
“그럼 난 운이 좋은 셈이구먼.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가?”
곧 죽을 거라는 걸 어찌 알았느냐는 질문이었다.
“죽음을 한 번 경험하고 나니까 전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더군요.”
“죽음을 경험했단 말인가?”
“여기를 찔렸습니다.”
김필도는 자신의 심장을 가리켰다.
“심장이 반대편에 있는 모양이군.”
김필도가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하는 말이었다.
“아닙니다. 심장에 구멍이 났고, 보링작업까지 당했습니다.”
“보링작업?”
“구멍을 넓히는 작업 말입니다.”
“검으로 심장을 찌른 다음 위 아래로 돌려 구멍을 넓혔다는 말이구먼.”
“잘 아는군요.”
“포션을 사용해도 살아날 수 없게 하려고 간혹 사용하는 방법이네. 하지만 상대에게 고통을 가중시킬 뿐 아니라, 자칫 잘못하면 피가 본인에게로 튈 수 있기 때문에, 대부분은 목을 치는 걸 선호한다네.”
“쉽게 말하면 독한 놈이 아니면 사용하지 않는다는 말이군요.”
“그런데 누군가?”
“세이아칸입니다.”
“원래 천족들이 좀 잔인한 구석이 있다네. 그런데…….”
히데우스는 김필도의 심장을 뚫어지게 보았다.
검에 찔리고 구멍을 넓히는 작업까지 당했다면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새로운 심장을 달았거든요.”
“새로운 심장이라면… 혹시 헤를리온?”
히데우스는 깜짝 놀라며 물었다.
“헤를리온에 대해 많이 아는 모양이군요.”
“정말 헤를리온을 얻었는가?”
히데우스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가 이곳으로 들어온 가장 큰 이유는 생명의 나무와 헬칸의 유물을 얻기 위해서다. 천족 또한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마족이나 천족이 아닌 인간이 헬칸의 유물을 얻었다니.
“헤를리온이 아니었다면 시체가 돼 물속에 가라앉아 있을 겁니다. 그런데 헤를리온이 심장을 대신할 수 있다는 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내가 착용한 전투기갑은 헤를리온을 모방해서 만든 거라네. 더불어 아직 내 목숨이 붙어 있는 이유가 이 전투기갑 때문이기도 하고.”
그랬다.
칼베리언의 헤힐이 겨드랑이로 파고들었고, 파괴의 힘이 온몸을 헤집어 놓았지만 히데우스가 여전히 살아 있는 이유는 바로 그가 걸친 전투기갑 때문이었다.
히데우스가 전투기갑을 얻은 곳은 신성의 장소였다.
태어난 곳이 신성의 장소였던 탓에, 마나를 축적하기 전까지는 신성의 장소를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었다. 고스트 크레디온들 또한 해를 끼칠 자가 아니라고 판단한 듯 가만히 두었다.
다만 고스트 킹이 지키고 있는 무덤에만 들어갈 수 없었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들어갔던 무덤에서 오각형의 물체를 얻었는데 그게 바로 전투기갑 크레디온이었다.
크레디온을 얻을 때만 해도 일반적인 크레디온과 다르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마계10군단으로 들어가고, 싸움 경험이 많아지면서 엄청난 크레디온을 얻었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되었다.
하지만 최강의 크레디온이라고 해도 찢겨나간 심장과 파괴의 힘이 헤집어 버린 육체를 구해 주진 못했다. 다만 죽음을 늦춰 주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