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 김필도-56화 (56/225)

# 56

“쉽게 말하면 명품이란 말이군요.”

김필도는 히데우스의 잔에 술을 채웠다.

“헤를리온만은 못하지만 목숨을 10여 일 이상 지탱해 주고 있으니까 괜찮은 물건인 건 맞네.”

히데우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들었다.

“가족은 있습니까?”

김필도는 술잔을 비우며 물었다.

“내 유품을 전해 줄 생각인가?”

“목숨을 구해드릴 순 없지만 유언을 들어줄 정도는 됩니다.”

“그렇게 하려면 마계로 가야 하는데 그래도 상관없는가?”

“마족들은 강하겠죠?”

“날 이렇게 만든 칼베리언은 최상급 마족이네.”

“헤를리온을 착용했다고 해도 쉬운 상대가 아니라는 말이군요.”

“그럴 가능성이 높네.”

“그럼 못 가겠군요.”

김필도는 고개를 흔들었다.

“허허허! 너무 솔직한 거 아닌가?”

“아무리 죽는 사람 소원은 들어 준다고 하지만 아닌 건 아니라고 해야지요.”

“허허허! 맞네. 아닌 건 아니네. 그리고 자넨 내 유언을 전하기 위해 마계로 갈 필요가 없네. 왜냐면 난 가족이 없으니까.”

히데우스는 웃으며 동굴에 두었던 헬칸을 꺼내 김필도 앞에 놓았다.

“누구에게 전해 드리면 됩니까?”

김필도는 히데우스와 헬칸을 번갈아 보았다.

“자네에게 주는 거네.”

“……?”

김필도는 멍한 얼굴로 히데우스를 보았다.

헬칸은 마계3대 신검 중의 하나고, 전사라면 누구나 탐낼 만한 보물이다. 그런 보물을 이제 두 번 만난 자에게, 그것도 마족도 아닌 인간에게 주겠다니.

“혹시 판단력이 흐려진 겁니까?”

“뒈질 때가 되니까 빡 돌아버렸냐는 말인가?”

“같은 말이라도 어휘 하나에 천박과 고상이 갈리기도 하지요.”

“맞는다는 말도 어렵게 하는구먼. 미안하지만 난 지극히 정상이네. 오히려 최근 몇십 년 동안 가장 맑은 정신 상태를 유지하고 있네.”

“그런데 헬칸을 왜 내게 넘겨주겠다는 겁니까?”

“처음엔 부군단장에게 넘겨줄 생각도 했네.”

“원래 그렇게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부군단장에게는 3대 신검의 하나인 발콘이 있잖은가.”

“헬칸이 더 있다고 해서 나쁠 건 없죠.”

“그렇긴 하네만 굳이 필요도 없는 걸 더 가지고 있다는 건 낭비 아닌가. 그리고 불필요한 보물은 때론 화를 부르기도 한다네.”

“그건 그럴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군단장께는 이카렌을 빼고도 9백 명 이상의 부하가 있습니다.”

“그들 중 한 명을 선택해서 넘겨주란 말인가?”

“넘겨주면서 신임 군단장을 따르라는 명령을 내리는 게 최선 아닌가요?”

“이 헬칸은 곧 히데우스 팔콘 세이디오 오테르네. 내가 부하들 중 누군가에게 헬칸을 넘겨주는 순간 마계10군단은 두 명의 군단장이 생겨나게 되네.”

“하지만 인간에게 넘겨주면 상관없다?”

“인간이 아니라 헤를리온의 계승자에게 돌려주는 거네.”

“돌려줘요?”

“헬칸을 누가 만들었는지 그건 알 수 없네. 다만 과거 철족 수장의 이름이 헬칸이었고, 그가 철족을 멸망시킨 다섯 종족을 향해 뽑아든 검의 이름이 헬칸이란 사실만 알 뿐이네.”

“헬칸 그분의 검일 가능성이 높다는 말입니까?”

“내 생각일 뿐이네.”

“나도 리모스에서 검 손잡이 몇 개를 얻었습니다. 원래는 검이 달렸던 것들인데 세월 속에 삭아서 가루로 변했더군요.”

“물론 방치를 하면 가루로 변할 거네. 하지만 아공간 같은 장소에 보관을 한다면 우리 생각보다 훨씬 오랜 기간 멀쩡한 상태로 보관할 수 있다네.”

“만일 이 녀석을 내가 가지고 있게 되면 마계10군단 군단장 자리를 원하는 자들은 찾아오겠군요.”

“거기에 이것까지 차면 더 확실해질 거네.”

히데우스는 오른손 새끼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를 뽑아 헬칸 옆에 놓았다.

“뭡니까?”

“오테르의 인장이라고 부르네. 헬칸과 더불어 히데우스의 상징이네.”

“오테르 가문의 가주란 뜻이군요.”

“한때 최상급 마족이었고, 마신 파라온을 배출했던 가문이기도 하네.”

“파라온이라고요?”

김필도는 오른손을 내려 보았다.

바람의 가문의 가주인 아무탄 코니엘 헤라칸은 이것을 마신의 팔찌 파라온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히데우스가 말한 마신 파라온과 팔찌가 관련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들어 봤는가?”

“이름만 들어 봤습니다. 파라온이란 마족은 어떤 분이었습니까?”

“우리 오테르 가문 사상 가장 강자였고, 이 헬칸을 가문으로 가져온 분이라는 것 정도만 알고 있을 뿐 자세한 건 나도 모르네.”

“그랬군요.”

김필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차 보게.”

히데우스는 오테르 반지에 눈을 맞추며 말했다.

“후회하실 겁니다.”

김필도는 오테르 반지를 들었다.

찌르르!

반지를 집어든 순간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오른손 손목이 찌릿찌릿했다.

“어느 손에 차는 겁니까?”

김필도는 히데우스를 보며 물었다.

“오테르 가문의 가주는 오른손에 찼네.”

“그럼 당분간은 왼손에 차야겠군요.”

김필도는 오테르의 인장을 왼손 중지에 끼웠다.

히데우스의 새끼손가락 두께와 김필도 중지의 두께가 같았다.

김필도가 오테르의 반지를 오른손이 아닌 왼손에 찬 것은 아직은 오테르 가문의 가주 자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간접적인 표현이기도 했다.

“빠른 시간 내에 오른손에 차기를 바라네.”

“꼭 오른손에 차야 할 이유라도 있습니까?”

“전통이네.”

“아무튼 당분간은 내가 보관하고 있겠습니다. 그런데…….”

“왜 그러는가?”

“이젠 밤낮으로 조심해야겠군요.”

“아마 그럴 거네. 자네에게 헬칸과 오테르의 인장이 있다는 걸 알면 야망을 가진 녀석들이 떼거리로 몰려올 테니까. 하지만 자넨 전설의 신기인 헤를리온의 계승자 아닌가. 그들을 전부 없애 줄 거라고 믿네.”

“그러니까 이카렌에게 도전할 녀석들이 전부 내게로… 군단장이었군요.”

“그게 무슨 말인가?”

히데우스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이카렌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사내 말입니다.”

“표가 났던가?”

히데우스는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한 번이라도 표현했습니까?”

“이카렌은 523살이고 난 5,500살이네.”

“거의 5,000살 차이네요.”

“자네 같으면 표현하겠는가?”

“평생 아쉬움을 안고 사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요?”

김필도는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히데우스의 말을 듣다 보니 갑자기 필녀가 떠올랐다.

윤치성에게 시집가면 밥은 먹고 살 거라는 생각에 필녀의 의견도 묻지 않고 양보를 했다. 일부러 매몰차게 대했고, 윤치성과 함께 있을 때면 자리를 피하기도 했다.

차라리 잘해 줄걸.

목숨보다 더 사랑한다고 말해 줄걸.

그랬더라면…….

불현듯 술이 고팠다.

김필도는 갈증에 물을 찾듯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때로는 말이네, 사랑하기 때문에 놓아 줘야 하는 경우도 있다네.”

“군단장 님 편하자고 그런 건 아닙니까?”

히데우스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었다. 필녀를 윤치성에게 넘긴 게 어쩌면 스스로 편하자고 그랬는지도 모른다. 부담스러운 짐을 떠넘기듯 윤치성에게 줘 버렸는지도.

“씨팔!”

공연히 욕설이 비어져 나온다.

급기야 김필도는 병째 들고 입 안으로 들이부었다.

“내 욕심을 채우고자 했다면 함께 살았겠지. 하지만 난 내가 죽고 난 다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네.”

히데우스는 김필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술을 미친 듯이 들이붓는 김필도의 모습에서 반쪽 영혼을 잃은 슬픔이 감지됐다.

탁!

“인간도 그렇고 마족도 망각의 동물입니다.”

김필도는 벌게진 얼굴로 말했다.

“자넨 잊어지던가?”

히데우스는 답을 찾는 심정으로 물었다.

“그게 문젭니다. 조금만 더 잘해 줬더라면, 조금만 더 따뜻하게 대해 줬더라면, 사랑한다고, 너는 내 모든 것이라고 말해 줬더라면, 어쩌면 이미 잊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 남은 건 온통 후회뿐입니다.”

“그 아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를 잊고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게 될 거네.”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어떤 상황인지 가르쳐 주지도 않고, 선택의 여지도 주지 않으면서 상대방을 이별 앞으로 내동댕이쳐 버리는 건 너무 잔인한 짓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아무튼 이 반지와 검을 찾아오는 놈들은 몽땅 머리와 몸통을 분리시켜 놓겠습니다.”

김필도는 아공간을 열었다. 그러고는 신의 눈물 한 병과 검 손잡이를 꺼내 내려놓았다.

히데우스는 김필도가 내려놓은 검 손잡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의 얼굴에 격동의 빛이 떠올랐다. 놀랍게도 김필도가 꺼내놓은 검 손잡이에서 혼돈의 힘이 감지된 것이었다.

“혹시?”

“잊힌 5대 신검 중 하나인 카이(Kai)입니다. 헬칸이 사용했던 검 손잡이고요.”

“저, 정말 카이란 말인가?”

“헬칸이 가지고 있던 거니까 맞을 겁니다.”

“큭!”

히데우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천족과 마족은 헬칸의 유물을 얻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했다. 심지어 가드 맵의 비밀을 풀기 위해 외부로 내 보내는 위험을 무릅쓰기도 했다. 그런데 마족과 천족이 쏟은 5백 년 노력의 결실이 한 인간에게 고스란히 돌아가고 만 것이다.

‘어쩌면 운명의 안배인지도…….’

히데우스는 김필도를 가만히 보았다.

“이건 어떻게 빼는 겁니까?”

김필도는 헬칸을 들며 물었다.

“마나를 가하면서 돌리면 되네.”

“검 손잡이를 바꾸는 방법은 비슷하군요.”

김필도는 마나를 주입하면서 힘을 가했다.

딸깍!

자물쇠가 풀리는 듯한 소리가 손잡이에서 흘러나왔다.

김필도는 손잡이를 아래로 당겼다. 약간 뻑뻑한 느낌이 들었지만 검 손잡이는 무리 없이 빠져나왔다.

“넣어 보시겠습니까?”

김필도는 헬칸을 내밀었다.

“내게 양보하겠단 말인가?”

히데우스의 얼굴에 흥분이 너울처럼 일렁였다.

“나는 지겹도록 들고 다닐 텐데요, 뭘.”

“사양하지 않겠네.”

1만 년 신마 전쟁을 종식시켰던 전설의 신검.

비록 손잡이에 불과했지만 그걸 쥐어 본다는 건 검사로서 무한한 영광이다.

히데우스는 떨리는 손길로 검 손잡이를 밀어 넣었다.

철컥!

조금 전과는 반대로 걸쇠가 걸리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파앗!

우웅! 우웅! 우웅! 우웅!

헬칸에서 거무튀튀한 광채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칭얼대는 어린아이처럼 낮게 검명을 토해 냈다.

“허허허!”

히데우스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투구 때문에 드러나진 않았지만 그는 감격의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혼돈의 힘을 간직한 검이라고 하지만 헬칸은 단 한 번도 본래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마나도 주입하지 않았는데, 녀석은 검명을 흘리며 칭얼댄다. 만약 마나를 주입한다면 녀석의 본래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여 주게.”

히데우스는 헬칸을 내밀었다.

“먼저 이것부터 복용하십시오.”

김필도는 아공간에서 구급상자를 꺼내 히데우스 앞에 놓고 뚜껑을 열었다.

“포션이구먼.”

히데우스는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안에는 5센티미터가량 되는 작은 병 다섯 개가 들어 있었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엔 가득 채워져 있었습니다.”

“최상급 포션인 것 같은데 너무 많이 낭비한 거 아닌가?”

“마나가 바닥을 보일 때마다 피로 회복제로 하나씩 마셨습니다.”

“최상급 포션을 피로회복제로 사용했단 말인가?”

“그게 없었으면 지금 이 자리에 있지도 못했을 겁니다.”

“이걸 내놓는 이유가 뭔가?”

“가십시오.”

“누구에게 가란 말인가?”

“단 한 번의 짧은 만남을 끝으로, 1천 년 동안 그리움을 안고 살아야 한다고 해도, 나는 한순간의 짧은 만남을 선택하겠습니다.”

“난 이카렌 곁에 가기도 전에 죽을 거네.”

“나는 시도조차 해 볼 수 없는 곳으로 가 버렸습니다. 내가 군단장이라면 죽음을 발로 차서 쫓아 버렸을 겁니다.”

김필도는 헬칸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오른손으로 심장을 가볍게 쓸었다.

스스스!

그의 가슴에서 검은 운무가 흘러나오고 곧 헤를리온을 걸친 모습으로 변했다.

“만일 헤를리온을 완벽하게 자네 것으로 만들지 못한 상태에서 붉은 갑옷을 걸치고 뿔이 눈처럼 흰 최상급 마족을 만나면 무조건 피하게.”

“그가 칼베리언입니까?”

“그렇네. 3대 신검의 하나인 헤힐의 주인이고.”

“광속의 바람 라콰(Laqwa)!”

김필도의 입에서 우렁찬 외침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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