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 김필도-57화 (57/225)

# 57

슈아악!

김필도의 신형은 가공할 속도로 공간을 갈랐다.

그의 손에 들린 헬칸이 허공을 가르자 대기가 갈가리 찢겨 나갔다.

“임자를 제대로 만났군.”

히데우스는 그 기운이 혼돈의 힘임을 알아보았다.

그는 시선을 내렸다. 상자 안에 남아 있는 다섯 개의 포션.

이 포션과 품속에 있는 마법 스크롤이면 성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가는 도중에 죽을 수도 있다.

‘단 한 번의 짧은 만남을 끝으로, 1천 년 동안 그리움을 안고 살아야 한다고 해도, 나는 한순간의 짧은 만남을 선택하겠습니다.’

조금 전 들었던 그 말이 귓전에 맴돈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수면 위로 엄청난 물기둥이 솟구치고 있었다.

조금 전 물가에 있던 김필도가 어느새 물속으로 뛰어든 모양이었다.

“가겠네.”

히데우스는 포션 하나를 집어 들었다. 잠시 포션을 노려보던 히데우스는 마개를 따고 입 안으로 쏟아 부었다. 그리고 나머지 네 개의 포션을 챙겼다.

“나도 1천 년의 그리움을 선택하겠네.”

히데우스는 품속에서 마법 스크롤 하나를 꺼냈다. 그것엔 다르곤 산에 있는 그의 거처로 돌아가는 워프 마법이 걸려 있었다.

찌익!

“워프!”

김필도를 가만히 바라보던 히데우스는 마법 스크롤을 찢었다.

파앗!

마법 스크롤에서 푸른 광채가 솟아 나왔다. 그리고 히데우스의 신형이 씻은 듯 사라졌다.

그 광경을 김필도는 물속에서 지켜보았다.

“난 이제 뭐하… 이왕 들어왔는데 목욕이나 하지 뭐!”

그는 헤를리온을 해제하고 물속으로 주저앉았다.

그가 물 밖으로 나온 건 20분 후였다.

“머리도 잘라야 하는데.”

어느새 머리는 단발로 변해 있었다.

다른 건 혼자서 가능하지만 머리를 자르는 것만큼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돌아가면 머리부터 잘라야겠네.”

김필도는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술병과 술잔만이 빈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히데우스가 따라놓은 듯 술잔은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이놈은?”

김필도는 옆에 놓아둔 헬칸을 보았다.

길이 2미터, 무게 20킬로그램.

헤를리온을 착용한 상태에서는 휘두르는 데 문제가 없다. 하지만 헤를리온을 착용하지 않은 상태에서 헬칸은 검이 아니라 무거운 짐이 되고 만다.

물론 헤를리온을 착용하지 않은 채 헬칸을 사용할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건 생각대로 흘러갈 때보다는 그렇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헤를리온을 착용하지 못할 때를 대비하지 않을 수가 없다.

김필도는 헬칸의 검은 표면에 새겨진 마신 문양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가능할지 모르겠네.”

김필도가 떠올린 방법은 모래주머니였다.

하지만 모래주머니의 용도는 근력 강화용이 아니었다. 물론 모래주머니를 양팔에 차고 다니면 부수적으로 근력이 강화되긴 할 것이다.

그가 모래주머니를 통해 얻고자 하는 건 영구 마법이었다. 영구 마법의 매개체는 ‘영속적인 마법 주문’과 ‘지속적인 마나 공급’, 두 가지다. 보통 영속적인 마법 주문은 마법진을 통해 해결하고 지속적인 마나 공급은 하만티움 같은 마정석으로 해결한다.

“내게는 첫 번째 조건은 갖춰져 있지.”

헤를리온이 마법진과 문신을 전부 흡수했지만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구현 가능하다. 문제는 두 번째 조건인 지속적인 마나 공급이었다.

-실전 마법에서 영구 마법이란 어떤 걸 말합니까?

-숲에 길이 생겨나는 원리를 아느냐?

-계속 같은 곳을 밟으며 걸어가면 길이 생겨납니다.

-물방울이 바위에 구멍을 뚫는 원리를 아느냐?

-쉬지 않고 같은 지점으로 떨어지면, 결국엔 커다란 구멍이 생겨나게 됩니다.

-실전 마법에서 영구 마법이란 그런 것이다.

요른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헤를리온이 흡수해 간 수많은 마법진들 중에는 근력을 강화시켜 주는 마법진이 존재한다. 그 마법진을 원하는 순간에 활성화시킬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영구 마법이 되는 것이다.

“끊임없는 자극은 곧 지속적인 마나 공급을 가져올 수 있지.”

자주 가는 숲에는 길이 생겨나는 것처럼 모래주머니는 근력을 강화시키는 마법진을 쉬지 않고 자극하게 될 테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게 되면 근력 강화 마법진은 자동으로 구현될 수밖에 없다. 박수를 치는 것만으로 마법등을 켜는 것처럼.

김필도는 아공간을 열고 바느질 도구와 옷을 꺼내 모래주머니를 만들었다. 잠시 뒤 각각 10킬로그램에 달하는 모래주머니 6개가 완성됐다.

그는 먼저 오른팔과 왼팔에 하나씩 찼다.

팔을 들어올리기 힘들 정도로 무거웠다. 하지만 강한 자극을 주기 위해서는 약간의 무리를 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나저나 어떻게 건너간다냐.”

김필도는 술잔을 들고 호수를 바라보았다.

호수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절로 한숨이 비어져 나왔다.

“원시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는 수밖에 없겠네.”

김필도는 침엽수로 시선을 던졌다. 나무 밑동의 지름은 최소 70센티미터고 높이는 1백 미터 정도다.

조금 전 이곳으로 올 때 부러진 나뭇가지를 보았는데 속이 비어 있었다.

김필도는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오픈(Open)!”

그리고 아공간을 열어 장비를 놓아두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거긴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도끼, 괭이 낫, 호미 등 농사에 필요한 장비를 모아둔 칸과, 밧줄, 낚싯대, 그물, 돛대에 거는 돛 등 어부에게 필요한 물건을 넣어놓은 칸, 그리고 잡동사니들을 모아놓은 칸이 있다. 전부 요른이 모아놓은 것들이었다.

김필도는 그것들 중 도끼를 꺼냈다.

퉤!

나무 앞으로 다가가 손바닥에 침을 뱉었다.

“나는야 빌어먹을 힘 좋은 마법사!”

번쩍 들어 올린 도끼가 나무 밑동을 강타했다.

퍼억!

둔탁한 소성과 함께 나무가 깊게 파였다.

“진짜 힘 좋은 노가다 마법사!”

퍼억!

또다시 깊은 자국이 생겨났다.

“강철의 바람 노콴 라콰(Noqan laqwa)!”

퍼억!

원래의 도끼질에 마법의 힘이 더해지자 벌목 작업은 점점 빨라졌다.

“나는야, 진짜 힘 좋은 노가다 마법사. 도끼질도 잘하고요, 특히 회칼을 다루는 덴 일가견이 있어요. 나는야, 노가다 실전 마법사!”

흥얼거림이 김필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벌목 작업은 서른 그루를 베었을 때 끝이 났다. 하지만 작업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두 번째 작업은 가지치기.

가지치기는 손이 많이 가서 그렇지 밑동을 자르는 것 보다는 훨씬 쉽고 편했다.

가지치기를 끝낸 다음 20미터 길이로 잘랐다. 그리고 백사장으로 날랐다.

물론 펼칠 수 있는 모든 마법이 동원됐다. 60개의 통나무를 옮기고 나자 어느새 어두워졌다.

“마법이 아직 다 풀리지 않은 건가?”

마법이 완전하게 풀렸다면 이곳 또한 문 대륙의 다른 지역처럼 냉동 창고 수준으로 변해야 한다. 그런데 주위 기온은 생각보다 포근하다. 이 정도면 거의 영상의 기온이라고 해도 될 듯하다.

“여기가 아주 죽이는 곳이긴 한데…….”

김필도는 입맛을 다셨다.

휴도니아 대륙으로 돌아가고, 황제가 영지를 준다고 해도 여기보다 나을 것 같지는 않다. 문제는 문 대륙에 들어와 있는 천족과 마족이다.

부서진 입구가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몰라 리모스에서 나오기는 했지만, 이곳이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그 인간도 관심을 갖겠지.”

김필도는 히죽 웃었다.

발탄 제국의 황제. 그 또한 문 대륙의 상황을 안다면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게 분명하다.

“아무튼 재미있게 돼 가겠네.”

그는 마른 나무를 주워와 수북하게 쌓았다.

“토치!”

쌓아 놓은 나무 앞에 집게손가락을 대고 낮게 소리쳤다.

슈우욱!

손가락 끝에서 불꽃이 튀어나왔다. 매일 밤 모닥불을 피우다 보니 이제 불은 자유자재로 조절이 가능하다.

화르륵!

금세 불꽃이 올라왔다.

“밥 먹자!”

김필도는 삼각대를 꺼내 모닥불 위로 걸며 말했다.

시아나를 부르는 소리였다.

제4장 수다왕

다음날부터 본격적으로 뗏목 제작에 들어갔다.

그가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뗏목의 크기는 폭 9미터 60센티미터 길이 20미터 크기였다.

몇 백 미터 안 되는 짧은 거리라면 헤엄을 쳐서 가든지, 작은 뗏목을 대충 만들어 건너겠지만 눈앞 호수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다.

저 정도면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칠 수도 있다. 악천후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더 크게 만들고 싶지만, 단단하게 만들 자신이 없어 포기했다. 사실 폭 9미터 60센티미터도 제대로 만들어질지 미지수였다.

그가 폭을 9미터 60센티미터로 잡은 것은 통나무 두께 때문이다. 통나무의 두꺼운 쪽은 70센티미터고 반대편 가는 쪽은 50센티미터였다. 오차가 조금씩은 있지만 대부분 비슷비슷했다.

두 개의 통나무를 두꺼운 쪽과 가는 쪽을 맞붙이면 120센티미터가 나오고, 여덟 쌍을 이어붙이면 9미터 60센티미터가 된다.

즉 길이 20미터 폭 9미터 60센티미터에 달하는 뗏목을 만들기 위해서는 통나무 열여섯 개가 필요했다.

두께가 비슷비슷한 통나무 열여섯 개를 골라 따로 뺀 다음 나무못 제작 작업을 했다. 나무못의 길이는 통나무 두 개를 붙인 길이보다 10센티미터가 긴 1미터30센티미터였다.

그리고 통나무 아래와 위쪽의 구멍을 메우는 작업으로 넘어갔다. 나무 안쪽에 나 있는 구멍의 크기는 20센티미터가량이었다. 나무를 코르크마개 형태로 깎아 박아 넣고 물을 부었다. 물을 먹은 나무는 팽창하면서 작은 틈새까지도 완벽하게 막아 주었다.

기본적인 작업을 끝낸 뒤 통나무에 구멍 뚫는 작업을 했다. 이때 사용하는 도구는 이야크 창이고 기술은 실전 마법이었다.

아니 김필도가 하는 모든 작업에는 마법이 가미돼 있다. 그 옛날 대장장이 종족인 철족이 각 종족에서 주문한 무기를 만들면서 실전 마법을 창안하고 익혔던 것처럼 김필도 또한 육체적 노동을 통해 실전 마법을 익혀 가는 중이다.

나무못을 만드는 사소한 작업조차도 열과 성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통나무에 구멍을 뚫고 나무못을 박아 연결한 다음 맨 위쪽과 아래쪽은 동아줄로 묶었다. 그런 다음 나무못을 박았던 부분에 물을 부었다.

나무못을 박아 넣은 부분이 팽창하기를 기다리면서 널빤지를 만들었다.

1미터 30센티미터 길이의 널빤지를 만들 때 사용한 도구는 마계 신검 헬칸이었다. 원 주인인 히데우스가 보면 기겁할 노릇이지만 단 한 번 칼질로 통나무를 1자로 잘라낼 만한 도구는 헬칸밖에 없었다.

헬칸을 휘두를 때마다 통나무는 쩍쩍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만들어진 널빤지는 뗏목 위쪽에 대고 나무못을 박아 고정시켰다.

널빤지는 위쪽을 평평하게 해 주는 역할도 하지만 연결한 통나무를 더 단단하게 고정시켜 주는 역할도 한다.

역시 작업의 마감재는 물이다. 나무못을 박은 부분에 물을 부어 작업을 마무리했다.

“우선은 띄워 봐야겠지.”

김필도는 뗏목 선수에 박아 넣은 기둥에 동아줄을 걸었다. 뗏목 아래쪽과 앞에는 통나무를 가로로 깔아 임시 바퀴를 만들었다. 그리고 물을 부어 모래 바닥을 단단하게 한 다음 줄을 당겼다.

줄을 당기는 힘 또한 마법이다.

“노가다에 더 유용한 마법이네.”

폭 9미터 60센티미터 길이 20미터의 거대한 뗏목이 슬슬 끌려오는 걸 보고 있자니 고개가 절로 저어진다.

뗏목은 통나무를 바퀴 삼아 앞으로 나아가더니 무사히 물속에 안착했다.

김필도는 긴장한 얼굴로 뗏목을 보았다.

통나무 안쪽에 공기층이 있어 걱정하진 않지만 가급적 흘수가 낮았으면 했다.

“와우!”

놀랍게도 뗏목의 흘수는 30센티미터밖에 되지 않았다. 즉 물 위로 드러난 부분이 40센티미터가량 된 것이다.

저 정도면 뗏목이 아니라 배라고 해도 될 것 같았다.

“이제 잠잘 곳만 만들면 되겠네.”

김필도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작업을 시작했다.

이윽고 보름 후, 가로 3미터 세로 3미터의 통나무집이 완공되었다. 통나무집 뒤편엔 간이 주방을 만들었다.

“출발할 거니까 타!”

김필도는 숲을 향해 소리를 지르며 통나무집 앞으로 갔다. 통나무집과 선수 중간에는 3미터 높이의 기둥이 서 있는데, 돛을 거는 돛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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