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 김필도-58화 (58/225)

# 58

그아우우우!

나직한 울음과 함께 숲속에서 시아나가 뛰어왔다.

김필도는 뗏목에 오른 시아나를 흘끔 바라보고는 돛을 펼쳤다.

바람은 섬에서 호수로 불고 있었다.

돛이 팽팽하게 당겨지자 뗏목은 서서히 앞으로 나아갔다. 김필도는 얼른 뒤로 가서 키 조정 막대를 잡았다.

키 옆에는 커다란 노 다섯 개가 놓여 있었다. 만일에 대비해서 노도 충분하게 만들어 두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호수에서 방향을 잡는다는 건 무의미했다. 우선은 순풍을 타고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키 조정 막대를 고정시켜 놓고, 카판 끓일 준비를 했다. 카판 가루가 든 밀폐 용기를 꺼내 내려놓자 지켜보던 시아나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녀는 또호야 나뭇잎을 깔때기 형태로 말더니 카판을 내리는 용기 위에 끼웠다. 그러고는 김필도를 보았다.

“카판은 네 스푼을 넣으면 돼.”

김필도는 빙그레 웃으며 주전자 바닥에 토치를 쏘았다. 5분쯤 지나자 주전자 주둥이에서 김이 피어올랐다.

“끓는 물을 바로 부으면 카판에서 탄 냄새가 나고 쓴 맛이 강해져. 쓴맛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김이 한소끔 빠져나간 후에 부어야 해. 가장 좋은 온도는 섭씨 85도에서 95도 사이야. 그걸 정확하게 측정하기 힘드니까 김을 한소끔 빼는 거야. 그런 다음 처음엔 조금씩 부어야 해.”

김필도는 카판 가루 위로 물을 한 방울씩 떨어뜨렸다.

“깔때기 아래쪽에 카판이 한 방울씩 나오면 추출 준비가 끝났다고 보면 돼. 보이지?”

김필도는 고개를 꺾어 또호야 잎 아래를 가리켰다. 진한 갈색 액체가 한 방울씩 떨어지고 있었다.

캬!

“이 상태에서 천천히 물을 부으면 돼. 급하게 부어서도 안 되고, 너무 적게 흘려도 안 돼. 아래쪽으로 흘러나오는 카판의 양에 맞춰 적당하게 부어. 물을 붓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카판이 부풀어 올라. 그럼 추출이 거의 끝났다고 보고 그때부터는 물 양을 조절하면 돼.”

김필도는 주전자를 내려놓았다.

잠시 후 카판을 잔에 따르고 설탕을 넣어 시아나에게 건넸다.

그아아아아!

“우리 조폭의 가장 큰 단점은 상식이 부족하다는 거야. 어디를 어떻게 패면 병신을 만들지 않고 고통을 줄 수 있다든가, 좋은 칼을 파는 곳은 어디인지, 진짜 양주와 가짜 양주를 구분해 내는 건 기가 막히게 잘하는데 나머지는 젬병이거든. 조폭끼리 만나면 칼 이야기만으로도 몇 시간을 보내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을 만나면 다르잖아. 그래서 대화라도 하려면 뭐라도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수박 겉핥기식으로 조금씩 배운 거야.”

김필도는 카판 잔을 들고 선수로 나갔다.

바람을 탄 뗏목은 제법 빠른 속도로 나아가는 중이다. 아직 육지는 보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는 고개를 돌려 멀어지는 리모스를 보았다.

첫 번째 전환점이 운석에 맞아 이곳으로 소환돼 온 거라면, 두 번째 전환점은 리모스가 될 것이다.

신갑 헤를리온과 헬칸의 주인이 됐던 곳.

이젠 더 이상 힘이 약해 위축되는 경우는 없지 싶었다.

그아우우우!

파삭!

나직한 울음이 들려오더니 시아나의 손에서 카판 잔이 떨어져 박살났다.

“끙!”

김필도는 얼굴을 찌푸렸다.

뗏목 주위로 섬뜩한 기운이 다가들고 있다는 건 그도 느꼈다. 문제는 기운에 대처하는 시아나의 태도였다.

그녀는 기운을 감지하자마자 카판 잔을 내동댕이치고 투기를 뿜어내고 있다.

또호야 나뭇잎으로 깔때기를 만들고 카판 내릴 준비를 할 때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문명에 발끝을 밀어 넣었다가 갑작스런 변화에 깜짝 놀라 바로 물러나 버리는 원시인을 보는 듯하다.

우두둑!

어느새 엎드린 듯 시아나의 몸에서 뼈마디가 변형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곧 네발짐승으로 변한 시아나는 수면을 노려보며 오른손으로 가슴을 쓸었다.

스스스!

검은 운무가 흘러나오고 그녀는 곧 헤를리온을 착용한 모습으로 변했다.

“진정해. 아직 무슨 일인지 모르잖아.”

김필도는 엎드려 있는 시아나의 등을 쓰다듬었다.

츄악!

오른편 1백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물줄기가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뭔가가 뗏목이 있는 곳으로 다급히 헤엄쳐 왔다.

“뭐지?”

김필도는 시아나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시아나는 여전히 긴장한 채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을 뿐 대답이 없었다.

끼익!

나직한 울음을 토하며 특이하게 생긴 동물이 뗏목 위로 뛰어올라 왔다.

“나 참!”

김필도는 황당한 얼굴로 뗏목으로 올라온 동물을 보았다. 목이 1미터가량으로 길고, 머리는 상어를 닮았다. 등은 거북이와 비슷했는데, 뾰족한 가시가 달려 있다.

이건 영락없는 이순신 장군이 만든 거북선이다.

“그 양반이 여길 다녀가셨나?”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녀석은 거북선과 판박이다.

키이!

화르르!

“하하하!”

김필도는 웃음을 터뜨렸다.

녀석은 이순신 장군이 만든 거북선이 맞았다. 녀석이 입을 쩍 벌리자 작은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

목이 약간 더 길고, 얼굴이 용이 아닌 상어를 닮았다는 것만 다를 뿐이었다.

쿠엑!

느닷없이 오른편에서 나직한 울음이 들려왔다.

김필도는 고개를 돌렸다. 물고기처럼 생긴 녀석들이 수면 위로 머리만 내놓은 채 이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갈갈!

이번에는 왼편에서 특이한 울음이 들려왔다.

그쪽 역시 다르지 않았다. 악어가 수면 위로 눈 주위만 드러내놓고 먹이를 찾는 것처럼 이편을 주시하고 있었다.

“뭐냐, 넌?”

김필도는 상어 머리 거북을 보며 물었다.

캬아아아! 캬아아!

김필도의 질문에 대답한 이는 시아나였다.

“하이나 새끼라고?”

캬!

“하이나가 뭔데?”

캬아아!

“너와 비슷한 존재라는 건 무슨 소리야?”

캬아!

“그러니까 얘도 매운탕을 해 먹거나 푹 고아먹으면 불로장생한다고?”

캬!

“흠! 그러고 보니 이 녀석 자라처럼 생기긴 했네.”

김필도는 하이나라는 몬스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시아나의 말에 의하면 녀석은 해양 몬스터의 왕이란 소리다. 아니 정확하게는 해양 몬스터 왕의 새끼다.

새끼 하이나는 온몸이 마나 덩어리라 어떤 식으로든 복용하면, 일반 몬스터는 상급 몬스터가 되고, 상급 몬스터는 초특급 몬스터가 될 수 있는 마나를 얻을 수 있다. 한마디로 불사 영약인 것이다.

뗏목을 포위한 채 쫓아오는 해양 몬스터들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아마 시아나가 없었다면 진작 공격을 시작했을 것이다.

캬아!

“녀석들이 오래 기다리지 않을 거라는 거야?”

크!

“어떤 녀석들이지?”

김필도는 가슴을 가볍게 치며 물었다.

스스스!

그의 가슴에서 검은 운무가 흘러나와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이어 나직한 쇳소리와 함께 갑옷을 걸친 모습이 됐다.

“오픈(Open)!”

김필도는 아공을 열고 설풍과 단도를 꺼냈다.

어쩌면 물속으로 들어가야 할지도 모르는데 널빤지 같은 헬칸을 들고 싸울 수는 없었다. 그는 두 자루의 도를 엉덩이 위에 걸쳤는데, 설풍은 손잡이가 오른편 허리 쪽으로 나오도록 걸치고, 단도는 왼편 허리 쪽으로 손잡이가 나오도록 걸었다. 손잡이를 잡고 앞으로 잡아당기면 바로 뽑을 수 있는 위치였다.

캬아아아! 크아아아! 그아아아!

“헐!”

김필도는 어이없는 얼굴로 시아나를 보았다.

그녀는 단순히 괴성을 지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은 뚜렷하게 머릿속으로 전해져 온다.

시아나의 말을 종합하면 오른편에 있는 몬스터는 사람처럼 손이 달린 물고기로 다 자란 녀석이 10미터쯤 되는데 이름은 켈시다. 그리고 왼편에 있는 녀석은 네이라고 부르는 해양 몬스터로 사람처럼 다리가 달려 있다. 크기는 켈시와 마찬가지로 10미터 정도다.

켈시와 네이의 특징은 수백 마리가 무리를 지어 생활하는데, 한 마리 수컷이 2백에서 3백 마리 정도의 암컷을 거느린다. 사냥은 주로 암컷이 담당하고 쇠를 뚫을 정도로 강한 이를 가졌다.

캬아아!

“시오크란 녀석들도 있는데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고?”

크!

“완전 몬스터 천국이네?”

캬!

“바보가 아니면 영원의 호수에서 낚시할 생각을 않는다는 거지?”

크!

“알았어, 인마. 그런데 저 녀석들 맛은 어때?”

김필도는 턱으로 켈시를 가리켰다.

카아아아!

“질기고 맛없다고?”

그아아!

“가죽을 씹는 기분이라고? 알았어, 먹는 거 포기하자.”

쿠에엑!

그때 오른편에서 나직한 울음소리가 들려오더니 켈시들이 이편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네이 또한 다르지 않았다.

켈시에 질세라 빠르게 헤엄쳐 다가왔다.

그아아아우우우우!

몬스터의 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리낌 없이 다가오는 켈시와 네이의 행동에 기분이 잔뜩 상한 듯 시아나는 진득한 살기를 토해 냈다.

하지만 네이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다가오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크아아아우우우!

휙!

시아나는 잔뜩 독기 어린 눈으로 네이를 쏘아보더니 몸을 날렸다.

“쟤도 한 성깔 하네.”

김필도는 피식 웃으며 시아나의 움직임을 좇았다.

물속에서는 자신 있다는 듯 네이들은 시아나를 향해 쏘아져 갔다.

“가장 먼저 가는 녀석이 제일 빨리 죽을 텐데.”

김필도의 말대로였다. 곧 시아나가 있는 근처 물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끼이!

옆에서 나직한 소리가 들려오자 김필도는 고개를 돌렸다. 하이나 새끼가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재밌냐?”

끼이!

“웃긴 녀석이네.”

하이나 새끼는 전혀 겁먹은 얼굴이 아니었다. 오히려 흥미로운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여긴 위험하니까 저 안에 들어가 있어.”

김필도는 선실을 가리켰다.

키이!

새끼 하이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김필도가 가리킨 선실로 들어갔다.

“교육은 제대로 된 녀석… 젠장!”

문득 김필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말귀를 알아듣는 건 시아나뿐만이 아니었다. 완전하진 않지만 새끼 하이나의 감정도 읽어 낼 수 있었다.

헤를리온만 착용하면 평소에 비해 몬스터의 감정을 읽어 내는 능력이 더 좋아지는 모양이었다.

“이러다 나도 몬스터가 되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김필도는 켈시를 바라보았다.

사실 지금 켈시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 중이었다.

시아나를 통해 헤를리온은 물속에서도 무리 없이 움직일 수 있는 전투기갑이란 사실이 확인됐다. 문제는 뗏목을 버리고 물로 뛰어드느냐 아니면 이곳에서 녀석들을 방어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

휙!

김필도는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그가 물속으로 뛰어들자마자 켈시들이 우뚝 멈췄다.

쿠엑!

한가운데 있던 켈시 한 마리가 괴성을 내질렀다. 켈시 무리를 이끌고 있는 수컷이었다.

철벅!

켈시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여 김필도를 보았다.

스아악! 스아악!

수십 마리의 켈시가 빠른 속도로 김필도를 향해 헤엄쳐 갔다.

‘헉?’

김필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죠, 죠스!’

아무리 신갑 헤를리온을 걸쳤다고 해도 무서운 건 어쩔 수가 없었다.

10미터 크기의 거대한 물고기가 빠르게 다가오는 것만 해도 질겁할 노릇인데, 놈들은 2미터는 돼 보이는 두 팔을 늘어뜨리고 있다.

김필도가 가장 무서워하는 물고기는 죠스였다.

그런데 켈시에 비하면 죠스는 장난감에 불과했다. 엄청난 크기와 가공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속도는, 왜 물고기가 아닌 몬스터로 불리는지를 말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난 별명이 사시미야. 회칼!’

놀람도 잠시 김필도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맺혔다.

‘유연한 흐름 쿠라(Kura)!’

김필도는 내심 소리치며 몸을 날렸다. 그의 신형은 물살을 타고 빠르게 이동했다.

슈아악!

김필도가 떠난 자리로 켈시의 입이 휩쓸고 지나갔다.

‘엄청나네.’

쩍 벌어진 입에는 이가 세 겹으로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이 하나 크기가 거의 손가락 길이는 될 듯했다.

슈아악!

켈시들은 계속해서 쏘아져 왔다.

수중 몬스터답게 움직임은 엄청나게 빨랐다. 하지만 김필도의 몸에 이를 박아 넣은 켈시는 한 마리도 없었다.

대부분 간발의 차로 김필도를 스쳐 지나갔으며, 쩍 벌린 입은 김필도가 아니라 호수물만 씹어 삼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