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
키이이이!
언뜻 둔해 보이는 김필도를 잡지 못하자 잔뜩 약이 올랐는지도 몰랐다. 날카로운 소리가 퍼져 나가며 지금껏 구경만 하고 있던 켈시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럼 나도 피하고 있을 수많은 없지.’
김필도는 양팔을 펴 도 손잡이를 잡았다.
‘흐름의 폭풍 쿠라 라콰(Kura Laqwa)!’
푸아악!
김필도의 신형이 켈시 두 마리 사이로 쏘아져 갔다.
켈시 두 마리는 양팔을 들어 올린 채 김필도를 향해 빠르게 나아가는 중이었다.
켈시와 2미터 거리를 벌린 김필도는 양손을 힘차게 앞으로 내밀며 소리쳤다.
‘강철의 굴강 노콴(Noqan)!’
스악!
설풍의 검면에서 흘러나온 푸른 광채는 먼저 켈시의 두 팔을 자르고 이어 턱 아래로 파고들어 갔다. 그리고 머리 뒤쪽으로 튀어나왔다.
파앗!
빠르게 나아가던 켈시의 머리 부근에서 검붉은 피가 쏟아져 나왔다. 비스듬히 잘려 나간 켈시의 머리가 눈 위를 구르는 덩어리처럼 빙글빙글 돌면서 아래로 떨어졌다.
스악! 스악!
어느새 자리를 옮긴 김필도의 두 개의 도가 물속을 갈랐다.
또다시 켈시 두 마리의 머리가 잘려나갔다.
푸아악!
두 마리의 켈시를 없애고 주위를 둘러보는데 섬뜩한 느낌이 위에서 감지됐다.
김필도는 고개를 들었다. 켈시 한 마리가 입을 쩍 벌린 채 수직 하강해 오고 있었다.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무릎을 끌어올리고 상체를 한껏 오므려 몸을 뒤집었다. 그리고 다시 몸이 1자로 펴지는 순간 켈시의 머리가 다가왔다. 켈시와 김필도의 몸이 나란하게 선 모습이 되었다.
그 상태에서 김필도는 왼손을 강하게 찍었다.
푸욱!
단도가 켈시의 목 부분으로 파고들어 갔다.
고통스러운 듯 켈시는 도를 붙잡아보려고 팔을 뒤로 돌렸다.
스악!
그 순간 설풍이 움직이고 켈시의 팔이 잘려나갔다.
끼이이이!
켈시는 고통스럽게 울부짖으며 물속을 휘젓고 다녔다. 고통 때문에 방향 감각조차도 잃은 듯 동료들이 있는 곳을 향해 쏘아져 갔다.
‘그럼 난 좋고. 강철의 굴강 노콴(Noqan)!’
김필도는 차가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의 손에 들린 설풍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물속에서 추는 칼춤이었다. 시퍼런 광채가 물살을 가르면 붉은 피가 확 퍼지고, 잘려 나간 켈시의 머리가 아래로 떨어진다.
고통을 견디지 못한 켈시가 무섭게 솟구쳤다.
츄아악!
그리고 물을 박차고 튀어나갔다.
“후아!”
김필도는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 시아나가 있는 건너편 호수 물은 온통 핏빛이었다. 붉은 물 사이로 네이의 시체가 둥둥 떠다녔다. 그러다가 스르르 가라앉는다.
철벅!
김필도가 지켜보는 사이에도 네이의 시체는 계속 떠올랐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김필도는 뗏목을 보았다. 좌우측에서 피 튀기는 싸움이 벌어지는 것은 남의 일인 듯 뗏목은 바람을 타고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키이이!
나직한 소리가 선실에서 들려왔다.
철벅! 철벅! 철벅! 철벅!
“저건?”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거대한 덩치의 해양 몬스터 무리가 뗏목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쏘아져 오고 있었다. 그런데 물을 박차는 녀석의 겨드랑이에는 날개처럼 보이는 것이 달려 있었다.
“시아나! 저 앞에 이상한 놈들이 몰려오고 있어!”
풍덩!
시아나를 향해 소리친 후 곧바로 물속으로 빠졌다.
‘이런?’
도를 찔러 넣었던 켈시가 숨이 끊어진 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럼 혼자 하는 수밖에. 흐름의 폭풍 쿠라 라콰(Kura laqwa)! 강철의 굴강 노콴(Noqan)!’
어느덧 물의 속성 마법에 익숙해진 듯 김필도의 신형이 빠르게 물속을 헤집고 다녔다.
그의 움직임은 평지와 다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자유로웠다.
빙글 돌고, 비스듬히 나아가고, 위로 솟구치고, 아래로 하강한다.
흐르는 물은 무리하지 않는다.
평소의 물은 가로막은 바위를 강제로 밀어내지도 않고,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다. 다만 자연스럽게 지나쳐 갈 뿐이다.
하지만 화를 내면 달라진다. 강력한 힘으로 모든 것을 휩쓴다. 가로막은 바위를 옮기고, 보를 부수며,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린다.
절망과 탄식 말고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존재다.
흐름은 느낌이다. 느낌은 글로 배우는 게 아니라 몸으로 익히는 것이다.
그림자 숲에서 익혔던 육감이 빛을 발한다.
모든 동작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걸려들면 베고, 그렇지 않으면 그냥 둔다.
흐른다는 건 언젠가는 만난다는 걸 뜻한다. 그때 없애면 된다.
양손에 들린 두 자루의 도는 새파란 광채를 뿜어냈다.
스악! 스악! 스악!
도가 물살을 가를 때마다 켈시의 몸통과 머리가 잘려 나갔다. 순식간에 김필도 주위는 피로 물들었다.
켈시의 수는 빠르게 줄어들었다.
김필도는 뗏목을 향해 헤엄쳐 갔다.
선실에 있는 새끼 하이나 때문이 아니었다. 사실 김필도는 하이나가 죽든 살든 상관하지 않는다. 그가 바라는 건 물의 속성 마법 쿠라에 익숙해지는 거고, 육지로 데려다 줄 뗏목의 안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끼 하이나를 뗏목에 둔 것은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부모의 보살핌을 받아야 할 새끼. 단지 그뿐이었다.
츄아악! 츄아악!
뗏목을 향해 빠르게 나아가고 있는데 갑자기 켈시들이 멀어졌다. 아니 멀어지는 게 아니라 방향을 바꿔 도망치고 있었다.
‘날개 달린 녀석들 때문인가?’
김필도는 고개를 갸웃하며 뗏목으로 향했다.
잠시 후 뗏목으로 다가간 그는 물을 박차고 솟아올랐다.
츄악!
물줄기를 흩뿌리며 김필도는 뗏목 위로 내려섰다. 뗏목에는 시아나도 이미 돌아와 있었다.
그런데 시아나의 표정이 조금 전과 완전히 달랐다. 그녀는 자세를 한껏 낮춘 채 전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부르르!
김필도 또한 다르지 않았다.
날개 달린 해양 몬스터들이 사라졌다는 의구심을 갖기도 전에 온몸에 소름이 돋는 지독한 살기를 감지했다. 살기는 뗏목 주위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이건 장난이 아닌데?”
김필도는 아공간을 열어 설풍과 단도를 던져 넣고 헬칸을 꺼내들었다. 그러고는 시아나 옆으로 가 섰다.
푸아악!
그가 전면으로 시선을 주는 순간 수면이 쩍 벌어지는 듯하더니 거대한 물체가 솟구쳐 올랐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집채만 한 머리였다.
상어를 닮은 거대한 머리가 솟아오르고 뗏목의 통나무 두 개를 합친 두께의 목이 나타났다.
목의 길이 또한 엄청나게 길었다. 20미터 가량을 올라왔음에도 불구하고 몸통이 나오지 않았다.
츄아악!
이윽고 몸통이 드러났다.
“허!”
김필도는 멍해졌다.
잠수함이 부상한 것처럼 물살을 가르며 나타난 동체는 엄청났다.
“골대만 세우면 축구장이네.”
김필도는 어이없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거북이 등처럼 생긴 등판은 길이만 해도 1백여 미터에 달했다.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 등에는 따개비 천지고, 해초가 울창하게 자라 있다. 등에 나 있는 뿔의 길이는 10미터나 됐다. 녀석은 어미 하이나였다.
쿠워워워워!
하이나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괴성을 내질렀다.
그아아아우우우!
시아나 또한 지지 않았다. 그녀는 진득한 살기를 뿜어내며 하이나를 노려보았다.
육상 몬스터 왕과 해양 몬스터 왕의 첫 만남이었다.
쿠워워!
하이나 역시 시아나를 바라보며 입을 쩍 벌렸다. 열풍기를 튼 것처럼 뜨거운 열기가 하이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물러나라는 위협이었다.
하지만 시아나는 물러나지 않았다. 아니 물러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공격 준비를 했다.
앞으로 내밀고 있던 손에서는 20센티미터 길이의 은빛 손톱이 튀어나왔다. 누군가 시작하면 곧바로 싸움으로 이어질 수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키이이!
바로 그때였다.
선실에서 나직한 울음과 함께 새끼 하이나가 기어 나왔다.
쿠어!
손바닥 위로 떨어진 눈이 녹듯 주변을 장악하고 있던 살기가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하이나가 살기를 거두자 시아나 또한 살기를 거두고 손톱을 집어넣었다.
하이나는 울음을 토하며 고개를 숙여 새끼 하이나의 얼굴을 핥았다.
키이이이!
새끼 하이나는 간지러운 듯 몸을 비비꼬았다.
“엄마군.”
김필도는 빙그레 웃었다.
쿠워!
새끼 하이나를 핥던 하이나가 고개를 들어 김필도를 보았다. 하이나의 눈에는 감사의 빛이 역력했다.
“나 학사 사시미 김필도야.”
김필도는 자신을 소개했다. 머릿속으로 하이나의 생각이 흘러들어 왔다.
쿠어어!
“네 새끼를 구한 건 내가 아니라 시아나야.”
김필도는 시아나를 가리켰다.
쿠어!
하이나는 시아나를 보며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아마도 감사의 표시인 듯했다.
캬아우우!
시아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자기는 한 일이 없다는 듯이.
쿠어어어!
캬아아!
쿼어! 쿠어! 쿠어! 쿠어!
그아! 크아! 그아아아! 크아우우우!
“헐!”
김필도는 멍한 얼굴로 두 몬스터 왕을 바라보았다.
수다는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육상과 해상의 몬스터 왕은 끊임없이 수다를 떨었다. 하이나와 시아나의 수다는 30여 분 가까이 이어졌다.
크아아아!
시아나가 김필도를 돌아보았다.
“육지까지 데려다 준다고?”
캬아!
“밧줄을 저 가시에 걸면 되는 거야?”
김필도는 하이나 옆에 나 있는 가시를 가리켰다.
크!
“알았어.”
김필도는 헤를리온을 해제한 다음 하이나 목 옆에 나 있는 가시에 밧줄을 걸었다. 원래 꼬리 쪽에 나 있는 가시에 걸 생각이었는데 시아나가 하이나와 할 말이 있다고 해서 머리 바로 아래쪽에 건 것이었다.
쿠워워!
크아아아!
쿠어!
크으으!
쿠억억억억!
그아아아아!
“아무튼!”
쉬지 않고 조잘대는 두 몬스터를 바라보며 김필도는 고개를 흔들었다.
시아나는 하이나의 미간 사이 움푹 들어간 곳에 앉아 있었다. 그냥 보기엔 약간 들어간 듯한데, 머리가 워낙 커서인지 시아나의 몸이 묻힐 정도로 깊었다.
시아나가 편안하게 수다를 떨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제5장 살해 용의자
김필도를 태운 뗏목은 3일 후 육지에 도착했다.
김필도와 시아나는 하이나에게 인사를 하고 뗏목을 숨겨 놓은 다음 길을 나섰다.
예상대로 김필도와 시아나가 건너온 곳은 영원의 호수였다. 영원의 호수는 칼만지 고원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데, 해발 2천 미터로 문 대륙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호수를 벗어나자 김필도와 시아나 앞에 벌판이 나타났다. 벌판 역시 영원의 호수처럼 끝이 보이지 않았다.
크아아!
벌판이 보이자 시아나는 낮게 울었다.
“또 갑갑증이 도진 모양이구나?”
김필도는 시아나를 돌아보았다. 하이나와 수다를 떨긴 했지만 3일 동안 꼼짝달싹도 못했으니 갑갑증이 날 만도 했다.
크!
“난 걱정 말고 가 봐.”
김필도는 손을 저었다.
캬아아아!
휙!
시아나는 금세 벌판으로 모습을 감췄다.
“자식.”
김필도는 빙그레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