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
벌판은 상당히 넓었다. 거의 이틀을 걷고 나자 비로소 가장자리가 나왔다.
“끙!”
벌판 가장자리에 선 김필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벌판이 끝나자 내리막이 펼쳐져 있다. 내리막 또한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그리고 내리막이 끝나는 곳에 도끼 자국처럼 보이는 깊은 협곡이 자리해 있다. 루루시아와 리모스의 경계인 헤린느 협곡인 모양이었다.
“그래도 아는 곳이네.”
문득 반갑다는 생각이 들었다. 골드 브리지가 있는 곳에서는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정 반대편일 수도 있다. 하지만 헤린느 협곡을 따라가면 언젠가는 골든 브리지에 도달할 거라는 생각이 들자 공연히 마음이 놓였다.
김필도는 느긋한 얼굴로 씩씩하게 걸었다.
내리막을 지나 협곡 근처에 이르자 남쪽으로 길을 잡았다.
그가 골든 브리지로 가려고 하는 이유는 이카렌이 블랙칸을 풀어 둘 장소가 거기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협곡은 해안선처럼 둥글게 이어져 있었다.
김필도는 아공간을 열어 지도를 꺼내 펼쳤다.
신성의 장소에서 샤일록이 헤어지면서 주고 간 문 대륙 지도였다.
영원의 호수는 동서는 길고 남북이 짧은 타원형 형태였다. 헤린느 협곡은 영원의 호수를 둘러싸고 있었다. 호수 가장자리에서 헤린느 협곡까지 거리는 짧은 곳은 40킬로미터, 긴 곳은 60킬로미터에 달했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문 대륙 역시 해는 지구처럼 동쪽에서 뜨고 서쪽으로 진다.
“방향은 제대로 잡았네.”
골든 브리지는 영원의 호수 정 동쪽에 위치해 있었다.
“그런데 여긴?”
정 북쪽과 정 동쪽 사이에 비긴(Begin)이란 글이 쓰여 있었다. 헤린느 협곡 중 폭이 아주 좁은 곳 중의 하나였는데 협곡을 건너는 다리까지 놓여 있다. 마을일 가능성이 높았다.
“오랜만에 방에서 자는 건가?”
김필도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러고 보니 문 대륙으로 온 후 따뜻한 방에서 잔 적이 단 하루도 없었다. 문득 따듯한 방이 그리웠다.
김필도는 지도를 집어넣고 걸음을 재촉했다.
속도를 낸 탓인 듯 저녁 무렵 높은 성벽을 앞에 두었다. 성벽의 높이는 10미터 정도였다.
“누구요?”
누군가가 성벽 위에서 소리쳤다.
김필도는 고개를 들었다.
성벽 위는 요철 형태의 여장이 만들어져 있었다. 건장한 체격의 중년인이 여장 사이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김필도는 얼굴을 찌푸렸다.
이곳에 있는 자들은 대부분 추방자들일 테고, 발탄 제국에서 추방된 자들도 상당히 있을 것이다. 어쩌면 발탄 제국에 반감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차원 수리공을 인솔해 온 지휘관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여행자나 나그네라고 하는 것도 이상하다.
“에라 모르겠다. 내가 언제 그런 거 따지고 살았냐.”
김필도는 가슴을 쫙 폈다. 그러고는 위를 향해 소리쳤다.
“난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요!”
“기다리시오.”
김필도는 오른편 바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굳이 들여보내 주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안쪽에 있는 자들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지도 않고, 궁금해 할 이유도 없다. 다만 들여보내 주지 않으면 빙 돌아가야 하는데 그게 귀찮을 뿐이었다.
풀잎 하나를 뜯어 입 안에 넣고 질겅질겅 씹었다.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김필도는 얼굴을 찌푸리며 풀을 뱉었다.
“육포라도 넣고 다녀야지, 이거 심심해서…….”
다시 씹을 거리를 찾고 있는데 성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김필도는 시선을 들었다.
성문 바로 앞에는 가죽 갑옷을 걸치고 검을 찬 자들 열 명이 좌우로 늘어서 있었다.
“날 샜네.”
김필도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일어났다.
이편을 바라보는 사내들의 얼굴에서 적의가 느껴진다. 환영 같은 건 바라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적의를 가진 자들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고 싶지도 않았다.
김필도는 좌우를 살폈다.
“오른편으로 가면 40킬로미터를 돌아가야 하고 왼편으로 가면 30킬로미터를 돌아가야 합니다. 마을을 통해 가면 7킬로미터만 걸어가면 되고요.”
검사들 사이에서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필도는 고개를 돌렸다. 가죽옷을 걸친 노인이 이편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날 아시오?”
김필도는 노인을 살피며 물었다.
나이는 70세에서 80세 정도고 몸은 왜소하다. 머리카락은 흑발인데 움직일 때마다 녹색 광채가 약간씩 비친다. 눈동자는 파란색이고, 코는 뭉툭하니 낮다. 얇은 입술에 얼굴은 갸름해서인지 길어 보인다.
70살이 넘은 노인이 젊은이에게 공대를 한다는 건, 얼굴을 알거나 성을 안다는 뜻이다.
“루시안이란 이름은 모릅니다. 하지만 아이작과 프리우스란 성은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성 때문에 고통받은 적 있소?”
“이곳 비긴에서 살아가는 이들 중 상당수는 아이작과 프리우스란 성을 피해 왔습니다.”
“지금은 황제의 성이 아이작에서 가이우스로 바뀌었는데 돌아가지 그러시오.”
김필도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사내들의 몸에서 살기가 흘러나왔다. 이곳에 있는 젊은이들은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 때 넘어온 자들이 대부분이다. 발탄 제국에 연고가 있을 리가 없다.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는 자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제국으로 돌아가라는 건 빈정대는 말로 들릴 수밖에 없었다.
“여긴 발탄 제국이 아닙니다.”
노인의 말투가 차가워졌다.
“내 말이 그 말이야. 여기가 발탄 제국이었다면 영감을 비롯한 덩치들이 어디 감히 대공을 향해 살기를 흘릴 수 있겠어. 그러다 바로 맞아 죽지. 여기가 발탄 제국이 아니라 문 대륙이니까 가능한 거야.”
들어갈 것도 아닌데 정중하게 나갈 이유가 없었다.
슈캉!
듣고 있던 사내 한 명이 검을 뽑아들고 앞으로 나왔다. 사내는 키가 190센티미터에 달하는 거구로 비긴의 경비대 대장 하멜이었다.
“내 말이 맞잖아. 발탄 제국에서는 평민 놈이 대공을 향해 검을 뽑는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잖아, 안 그래?”
“죽고 싶은 모양이군, 놈!”
하멜은 차갑게 말하며 김필도를 향해 걸어갔다.
“쿡!”
김필도는 다가오는 하멜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이작 프리우스란 이름으로 대우받고 싶은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다. 반면에 그 이름으로 인해 피해를 보는 것도 사양한다.
김필도는 양손을 편하게 늘어뜨렸다. 손이 닿는 곳에 설풍과 단도 손잡이가 있었다.
김필도의 몸에서 차가운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응?’
김필도를 지켜보던 노인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그는 처음엔 김필도가 검술을 전혀 모르는 걸로 여겼다. 그런데 갑자기 온몸에서 서늘한 기운이 무럭무럭 흘러나오고 있다. 더불어 김필도가 혼자라는 사실이 퍼뜩 떠올랐다.
다른 대륙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이곳 문 대륙에서는 밤에 나다닌다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게다가 지금은 몬스터가 가장 거칠게 날뛰는 카오스의 계절.
노인은 얼른 김필도의 행색을 살폈다.
‘으음!’
검은색이라 잘 보이지 않았을 뿐 김필도의 로브는 온톤 검 자국 천지였다. 심지어 심장에도 검에 찔린 자국이 남아 있다.
“멈추게.”
노인은 급하게 하멜을 불러 세웠다.
“촌장님!”
하멜은 걸음을 멈추고 노인을 돌아보았다.
“굳이 싸울 이유가 없잖은가.”
“저자는 우릴 모욕했습니다, 촌장님.”
“모욕은 내가 아니고 너희들이 했지.”
“정녕 죽고 싶은 거냐?”
하멜은 김필도를 돌아보며 살기를 흘렸다.
“내가 대공이 되는데 도와준 거 있어?”
김필도는 하멜을 향해 걸으며 물었다. 그의 양손은 여전히 설풍과 단도 손잡이 근처에 머물고 있었다.
“내가 아이작이란 성과 프리우스란 성을 쓰는데 도와준 거 있냐고!”
김필도의 몸에서 살기가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나, 난 네놈이 쓰고 있는 그 성이 싫다.”
갑작스럽게 온몸을 압박해 오는 살기에 하멜은 말을 더듬었다.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넌 싫으면 다 죽이는 모양이지?”
“…….”
하멜은 할 말이 없었다.
“적선은 못할망정 쪽박은 깨지 말라고 했거든. 대우를 해 주고 싶으면 하는 거고, 싫으면 무시하면 되는 거야. 그리고 네가 이곳에 태어난 게 네 선택이 아닌 것처럼 내가 아이작 프리우스란 성으로 태어난 건 내 선택이 아냐.”
김필도는 걸음을 멈췄다. 문득 추방자들을 상대로 화를 내는 자신이 우습게 느껴졌다.
“운이 좋았다, 덩치.”
김필도는 한숨을 내쉬고는 왼편으로 몸을 돌렸다. 아무래도 30킬로미터 길을 택해야 할 것 같았다.
두두두두! 두두두두!
그때 대로를 달려오는 이야크가 있었다.
“무슨 일이냐?”
노인은 이야크를 타고 온 자를 보며 물었다.
“기사들이 들어왔습니다.”
“기사들?”
“차원 수리공입니다.”
“차원 수리공이 왜 들어왔단 말이냐?”
“문을 열지 않으면 마을을 없애 버리겠다고 협박했습니다.”
“으음! …몇 명이나 되더냐?”
노인은 얼굴을 찌푸린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4백 명가량이었습니다.”
“4백 명이라…….”
노인은 김필도를 바라보았다.
문득 김필도가 차원 수리공을 이끌고 온 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원 수리공을 인솔해 오셨습니까?”
노인이 물었다.
“인솔해 온 게 아니라 책임자로 따라왔소.”
“들어오십시오.”
노인은 왼손으로 비긴 안쪽을 가리켰다.
“날 데리고 들어가 봐야 써먹을 데가 별로 없을 거요.”
23킬로미터를 더 걷지 않아도 되고 차원 수리공이 들어왔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김필도는 안으로 들어갔다.
“무기는 우리에게 맡겨라!”
하멜은 김필도를 노려보며 말했다.
“차원 수리공들에게도 무기를 회수했나?”
김필도는 이야크를 타고 온 사내를 보며 물었다.
“아, 아니오.”
이야크를 탄 사내는 고개를 흔들었다.
김필도의 시선이 다시 하멜을 향했다.
“늘 그렇게 살았어?”
“무슨 말이냐?”
“강자로 보이는 자들에겐 찍 소리도 못하면서, 약자라고 생각되면 사정없이 짓뭉개며 살았냐고.”
“개새끼!”
하멜은 집어넣었던 검 손잡이를 다시 잡았다.
“화를 내는 거 보니까 내 말이 맞는 모양이구나. 하긴 니들도 쌓인 걸 풀 대상은 있어야겠지. 받은 놈들에게 돌려줄 힘은 없지만 니들보다 약한 놈을 짓밟을 힘은 있을 테니까.”
김필도는 피식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하멜은 김필도의 등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검 손잡이를 쥔 손등에 불뚝 힘줄이 돋아 있다. 하지만 그는 검을 뽑지 못했다.
김필도의 말이 완전히 틀렸다고 할 수 없었다.
차원 수리공들에게는 무장을 해제하라는 말을 꺼내지도 못했을 게 분명하다. 그런데 김필도에게는 무기를 내놓으라고 한 것이다.
“나는 우리 비긴의 법령을 말했을 뿐이다!”
하멜은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실제로 비긴의 법령에는 외부인이 들어올 때는 무기를 비긴 경비대에 맡겨야 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법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적용돼야 하는 거야. 힘이 강한 놈들은 예외로 치는 그런 법은 없는 게 나아. 차라리 없으면 그러려니 하는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진 자들에게만 비켜가면, 없는 놈 입장에서는 진짜 더럽거든.”
“……!”
하멜은 또다시 할 말을 잃었다.
“나 요새 너무 똑똑해진 것 같아서 큰일이야. 전 같으면 누구 앞에서 법이니 뭐니 하는 것들을 씨부리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거든. 뭐 사시미에 대해서는 2박3일 동안 쉬지 않고 씨부리는 건 가능하지만 말이야.”
김필도는 혼잣말을 하며 히죽 웃었다.
그런 김필도를 하멜은 빤히 바라보았다.
법률에 대해 견해를 말하는 걸 보면 대공 같기도 하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건달 냄새를 풍긴다.
어떤 사람인지 딱 꼬집어 정의를 내릴 수가 없었다.
“S대 나온 조폭이라서 그래.”
하멜의 내심을 눈치 챈 김필도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S대 나온 조폭?”
하멜은 되뇌었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넘어가. 그게 세상 편히 사는 방법이야.”
“타십시오!”
어느새 일행은 이야크를 매놓은 곳에 당도했다. 이야크는 성문에서 2백 미터가량 떨어진 곳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