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 김필도-61화 (61/225)

# 61

김필도에게 타라고 한 사람은 촌장이었다.

김필도는 곧바로 촌장의 이야크에 올랐다.

“난 오디안 힐바 토바하크입니다.”

촌장은 자신을 소개했다.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요. 그런데 토바하크란 성이 상당히 귀에 익는 것 같은데?”

“이곳에 정착한 지 50년이 넘었는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럇!”

오디안은 채찍을 휘둘렀다.

그러자 이야크가 빠르게 앞으로 튀어나갔다.

“마을이 큰가 보죠?”

김필도는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작은 마을이면 굳이 이야크를 타고 올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인구가 2천 명이니까 작은 마을은 아니지요.”

“2천 명이면 상당히 많군요. 그런데 전부가 추방자들?”

“30년 전까진 전부 추방자들이었는데 요샌 자발적으로 넘어온 자들도 많습니다.”

“휴도니아 대륙에도 노는 땅은 많은 걸로 아는데…….”

“하지만 50퍼센트를 세금으로 내고 나면 남는 게 아무것도 없죠.”

“세금을 50퍼센트나 걷소?”

“모르셨습니까?”

오디안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내가 가진 거라고는 불알 두 쪽이 전분데 알 리가 없잖소.”

“하긴 영지가 있었다면 문 대륙까지 오지도 않았겠지요.”

“…….”

김필도는 말없이 빙긋 웃었다.

20여 분을 달린 이야크는 상점이 늘어서 있는 시장에 들어섰다. 시장은 상가를 비롯한 노점상들로 꽉 들어차 있었다. 그런데 상인들 대부분이 주먹을 불끈 틀어쥔 채로 시장 안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촌장님!”

누군가 오디안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촌장님이 오셨다!”

시장에 있던 상인들은 소리쳤다.

구세주를 만난 듯 상인들의 얼굴은 밝아졌다.

“무슨 일인가?”

“대륙인들이 정육점을 몽땅 털어갔습니다!”

“과일도 몽땅 가져가고, 여자들도 잡아갔습니다.”

원성 어린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알았으니까 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게.”

“우리도 돕겠습니다, 촌장님!”

상인은 아래쪽에서 길쭉한 걸 들어 올렸다. 그것은 다름 아닌 검이었다.

“이번 일은 경비대가 처리할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들어가 있게.”

오디안은 상인들을 말리고 이야크를 몰아갔다.

“대공의 부하들이 약탈을 자행한 모양입니다.”

오디안은 전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약탈이 아니고 일탈이겠죠.”

“일탈?”

“상식이나 도덕, 규범, 법률 등으로 억누르고 있던 파괴적 본능의 표출 말이오.”

“자기네들이 속한 사회가 아니란 말입니까?”

“돌아가면 다시는 오지 않을 곳이잖소. 더구나 이곳에 사는 자들은 추방자들이거나 추방자들의 후손이고.”

“그래서 죽여도 상관없다?”

“상관없는 게 아니라 양심의 가책을 덜 받는다고 하는 게 맞겠지.”

“우리에게도 힘이 있습니다.”

“날 따라온 녀석들이 어떤 자들인지 아시오?”

“모릅니다.”

“마법사 30명, 기사 70명, 죄수 4백 명이오. 기사들을 이끌고 있는 자들은 세 명인데, 펠톤 헬모트, 바이칼 이콰라, 이스 노르탄이고, 마법사를 이끌고 있는 여자는 올가 드보르칸이오.”

“발탄 제국 3대 공작 가문과 5대 후작 가문의 자식들이란 말입니까?”

오디안의 얼굴이 굳어졌다.

불의 가문 헬모트, 물의 가문 이콰라, 대지의 가문 노르탄은 발탄 제국 3대 공작 가문이고, 드보르칸 가문은 5대 후작가문의 수장이다. 드보르칸 가문의 자식이 왔다면 다른 네 가문의 자식들도 와 있을 것이다.

“그럴 거요.”

“한번 시작하면 끝장을 봐야 한다는 거군요.”

“맞소, 오디안. 싸움을 시작하게 되면 전부 죽여 없애든지, 아니면 꼬리를 말고 기다려야 하오.”

“뭘 기다리란 말입니까?”

“놈들이 싫증을 내고 물러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거요.”

“내 백성이 능욕을 당하는데 참으란 말입니까?”

“그게 바로 약자의 비애잖소.”

김필도는 훌쩍 몸을 날려 이야크에서 내렸다.

10여 미터 앞에 검을 든 사내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인원은 3백 명가량이다. 잡혀간 마을 사람을 구하기 위해 온 비긴 마을의 경비대 대원들인 모양이었다.

그들 뒤에는 엄청난 크기의 건물이 있었다.

김필도는 오디안을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내가 말한 기사 70명은 기갑기사요.”

김필도는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

“기, 기갑기사?”

오디안의 얼굴이 잔뜩 굳었다.

기갑기사.

기사들 중 전투기갑을 보유한 기사를 일컫는 말이다. 기갑기사의 전투력은 일반 기사들이 따를 수가 없다.

그런 자들이 70명이라면 이곳에 있는 경비대 대원들은 금세 몰살당하고 만다.

“척, 레이놀, 이반, 잭슨, 폴이 당했습니다.”

대원 중 한 명이 분개한 얼굴로 보고했다.

“안으로 들어갔단 말인가?”

“척과 레이놀은 아내가 끌려 들어갔고, 이반과 잭슨은 동생이, 폴은 딸이 끌려갔습니다.”

“죽일!”

오디안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으스러져라 주먹을 그러쥐었다.

“하멜 자넨 가서 알리토를 불러오게.”

“알겠습니다.”

하멜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야크를 돌렸다.

오디안은 차가운 눈으로 안쪽을 노려보았다.

한편.

먼저 들어간 김필도는 마당 오른편 이야크 보호소 앞에 서 있었다. 그가 술집으로 들어가기 전 입구에서 한참 떨어진 이야크 보호소로 온 것은 귀에 익숙한 울음 때문이었다.

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데 느닷없이 이야크 울음소리가 들려온 것이었다. 그는 깜짝 놀라 이야크 보호소로 갔다. 그런데 그곳에 블랙칸이 떡하니 서 있었다.

아마도 차원 수리공들이 골든 브리지 근처로 갔다가 블랙칸을 발견하고 잡아온 모양이었다.

“아무나 덥석 따라가니까 험한 꼴을 당하지, 인마.”

문득 녀석을 공연히 잡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야생 상태로 계속 살았더라면 인간이 근처로 오는 걸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녀석은 다가오는 차원 수리공을 전혀 경계하지 않고 있다가 잡힌 게 분명했다.

잡히고 나서 반항을 많이 한 듯 입엔 재갈이 물려 있었다.

“네게 재갈을 채운 놈이 어떤 놈인지 몰라도 반 죽여 놓을 테니까 화 풀어. 머리 숙여!”

김필도는 손짓을 했다. 그러자 블랙칸은 김필도 얼굴 앞으로 고개를 숙였다.

김필도는 블랙칸의 입에서 재갈을 제거했다.

푸릉!

재갈이 풀려 기분이 좋은지 블랙칸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다녀올 테니까 쉬고 있어.”

김필도는 블랙칸의 가슴을 가볍게 쓰다듬고는 몸을 돌렸다.

이야크 보호소에서 식당 입구까지는 20미터 거리였다. 그런데 근처에 가지도 않았는데, 왁자지껄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쯧!”

걸음을 옮기던 김필도는 혀를 찼다.

시야에 시체 다섯 구가 들어왔다. 가족을 구하기 위해 들어왔다가 당한 모양이었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차원 수리공들이 전부 들어와 있는데도 테이블이 남을 정도로 엄청나게 넓었다.

차원 수리공들은 제 집에 들어온 것처럼 술잔을 비우며 떠들어댔다. 테이블 사이로는 반라 차림의 여자들이 빈 술잔을 채우며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마을 여자들인 모양이었다.

‘가만, 4백 명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문득 성문 앞에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소식을 전하러 왔던 자는 차원 수리공 4백 명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곳까지 오는 동안에 1백 명이 목숨을 잃었다는 뜻이 된다.

“그래서 돌아버린 건가? 하지만 마을을 잘못 선택했어.”

촌장인 오디안.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톰벨의 딸인 아델리나와 비슷했다. 즉 마법사란 소리다. 하지만 강함은 아델리나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다.

5클래스 마법사인 아델리나가 감히 따를 수 없을 정도라면 최소한 7클래스 마법사란 말이 된다. 말이 쉬워 7클래스 마법사지 그 정도 마법사는 대륙에서 손가락에 꼽는다. 게다가 7클래스 마법사 정도면 상대가 누구이건 목에 힘을 주고 노려보아도 무시당하지는 않는다.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겠네.”

김필도는 바텐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검은 로브를 걸친 자가 걸음을 옮기고 있지만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왜냐면 김필도의 로브 색이 차원 수리공 중 마법사들이 입고 있는 로브와 같기 때문이었다.

김필도는 바텐 앞에 앉았다.

바텐에는 60대로 보이는 노인 한 명이 잔뜩 겁먹은 얼굴로 홀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술 한잔했으면 좋겠는데.”

김필도는 노인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뭐, 뭘로 드릴까요?”

노인은 퍼뜩 정신을 차리며 김필도와 눈을 맞췄다.

“혹시 맥주도 있소?”

“네.”

“일단 한 잔 줘 보쇼.”

“아, 알겠습니다, 나리.”

노인은 재빨리 몸을 돌렸다. 커다란 통 아래쪽에 있는 마개를 따자 검은 액체가 콸콸 쏟아져 나왔다.

“흑맥주네.”

김필도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여기 있습니다.”

노인은 김필도 앞에 맥주잔을 놓았다.

김필도는 맥주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잔은 500CC잔보다 약간 크고 1,000CC잔보다는 작다. 700CC가량 될 것 같다.

“시원하게 보관하는 건 마법?”

김필도는 맥주잔을 잡으며 물었다. 시원한 기운이 손바닥 가득 느껴졌다.

“그렇습니다.”

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소.”

김필도는 히죽 웃으며 맥주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예술이네!”

참 오랜만에 느껴보는 맛이지 싶었다. 톡 쏘는 맛과, 약간 씁쓸한 맛, 그리고 시원함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향이 입 안 가득 퍼진다.

“캬아!”

김필도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술잔을 내려놓았다.

“이런 젠장! 한 모금 마셨을 뿐인데…….”

김필도는 노인을 빤히 바라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이빠이 채운 거 맞아?”

“네?”

“잔에 이빠이 채운 거 맞느냐고?”

“가득 채웠냐는 말씀이십니까?”

“난 딱 한 모금밖에 안 했어. 그런데 이 커다란 잔이 텅 빈다는 게 말이 되냐고, 앙?”

“다, 다시 채우겠습니다.”

노인은 얼른 잔을 가져갔다.

“꽉꽉 눌러서 담아.”

“아, 알겠습니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술잔을 채웠다.

주인이 술을 채우는 사이 김필도는 홀을 훑어보았다. 무질서하게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차원 수리공들은 세 부류로 나뉘어 있다.

한가운데에 앉아 있는 70여 명은 기갑기사들이고, 벽 근처에 있는 자들은 죄수들이다. 마을 여자들을 희롱하는 자들 또한 대부분 죄수들이다.

그리고 김필도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자들은 마법사들이다.

김필도의 시선이 홀 중앙으로 향했다.

그곳엔 커다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세 명이 둘러 앉아 있다.

적금발의 사내는 헬모트 공작가문의 3남 펠톤 헬모트고, 은발 사내는 이콰라 가문의 차남 바이칼 이콰라, 금발 사내는 노르탄 가문의 장남 이스 노르탄이다.

이들 세 명의 가문을 불의 가문, 물의 가문, 땅의 가문이라고 부른다. 원래는 바람의 가문 헤라칸을 합쳐 제국4대 공작가문이라고 불렸는데, 3백 년 전 헤라칸 가문이 독립해 나가면서 3대 공작가문이 됐다.

“루시안을 살해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녀석들이지. 그리고…….”

김필도의 시선이 이번에는 마법사들 중앙으로 향했다.

금발 여자를 비롯한 다섯 명이 원형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다. 금발 여자는 5대 후작 가문의 수장인 올가 드보르칸이다.

특이하게도 발탄 제국의 귀족은 기갑기사가 주요 전력인 3대 공작 가문과 마법사가 전력인 5대 후작 가문으로 구분된다. 나머지 가문은 이들 여덟 가문과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얽혀 있을 뿐이다.

“쟤들은 두 번째 용의자고.”

김필도는 노인이 내려놓은 맥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탁!

“영감!”

김필도는 노인을 바라보았다.

“분명 꽉꽉 눌러 담았습니다.”

노인은 슬금슬금 김필도의 눈치를 살폈다.

“딱 한 모금밖에 안 한 걸 영감도 봤잖아.”

“팍팍 눌러 담겠습니다.”

노인은 얼른 빈 잔을 가져갔다.

“영감!”

“말씀하십시오.”

“저기에 담으면 될 것 같아.”

김필도는 오른편을 가리켰다. 거기엔 3,000CC를 담을 정도의 커다란 용기가 있었다.

“저건 개인용이 아니라 테이블용인데…….”

“거기다 담아 줘.”

“알겠습니다.”

노인은 커다란 용기에 맥주를 따랐다.

김필도는 다시 홀로 시선을 던졌다.

‘바보 같은 자식!’

루시안은 자기 가슴에 검을 꽂아 넣은 자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물론 독을 푼 자도 모른다.

자다가 독에 당하고, 검에 찔려 낭떠러지 아래로 던져진 것이다.

살인자는…….

“분명 이 안에 있겠지. 죽지 않았다면.”

김필도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맺혔다.

루시안의 가슴에 꽂힌 검이 유일한 단서인데 대장간에 가면 쉽게 구입할 수 있는 평범한 대거에 불과하다.

콰앙!

바로 그때 요란한 소리와 함께 주점 문이 활짝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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