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 김필도-62화 (62/225)

# 62

제6장 반갑다, 아그들아

왁자지껄했던 주점 안쪽이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침묵에 빠졌다. 그리고 차원 수리공들의 시선이 일제히 출입문으로 향했다.

“책임자가 누구냐?”

오디안은 안쪽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구뜨(Good)!”

김필도는 싱긋 웃으며 커다란 맥주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눌러 담았지?”

김필도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출입문을 바라보는 노인에게 물었다.

“무, 물론입니다.”

노인은 허리를 숙여 기다란 뭔가를 꺼내 바텐 아래쪽 선반에 놓으며 대답했다.

“검?”

“지금은 술집 주인이지만 문 대륙으로 오기 전에는 용병이었습니다.”

“그럼 나부터 없애야겠네.”

“저자들이 촌장님께 해코지를 하면…….”

“나도 검이 있는데?”

김필도는 제 엉덩이를 가리켰다.

“비록 늙었지만 손은 아직 빠릅니다.”

“얼마나 빠른지 조금 있으면 알겠지.”

김필도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김필도가 출입문을 바라보는 사이에 주인은 검을 절반가량 빼 놓았다.

“책임자가 누구냐고 물었다!”

돌처럼 무거운 오디안의 목소리가 주점 내부를 짓눌렀다.

“…….”

어쩌면 어이가 없어서 그랬는지도 몰랐다. 차원 수리공들은 멍한 얼굴로 오디안을 바라볼 뿐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신분도 명확하지 않고, 책임자도 없다면 쓰레기 마적밖에 없을 터…….”

오디안은 수중의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난 펠톤 헬모트다!”

홀 중앙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어 적금발의 건장한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이 헬모트란 말이냐?”

“말조심하라, 놈! 난 귀족이다.”

“산적이나 마적보다 더 더러운 짓을 하고 있으면서도 귀족 대우를 받고 싶은 모양이군, 헬모트 자작. 너희 헬모트 가문에서는 밖에선 개처럼 행동하라고 가르치느냐?”

“건방진 놈!”

오디안의 말에 기분이 상한 기사 한 명이 자리를 박차고 쏘아져 갔다.

“명을 재촉하는구나! 파이어 볼(Fire Ball)!”

오디안은 기사를 향해 지팡이를 겨냥했다.

화르르!

거대한 불덩어리가 지팡이 앞에서 생성됐다. 그러고는 기사의 얼굴을 향해 쏘아져 갔다.

“헉!”

기사는 질겁했다. 상대가 마법사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당연 마법에 대한 대비도 없이 몸을 날렸는데 얼굴을 향해 거대한 불덩어리가 쏘아져 온 것이다.

퍼앙!

파이어 볼이 기사의 얼굴에서 폭발했다.

“크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기사의 몸이 허공을 날아갔다.

쿠웅!

기사는 동료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헉!”

“허억!”

기사들은 경악했다. 테이블 위로 떨어진 동료 기사의 얼굴이 사라지고 없었다.

아무리 경황중이라고 해도 3클래스 마법인 파이어 볼에 당했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아니 설령 파이어 볼에 당했다고 하더라도 얼굴이 사라지는 경우는 없다. 마나를 다루는 기갑기사가 아닌가.

그렇다면 가능성은 한 가지.

파이어 볼을 펼친 마법사가 상당히 클래스가 높은 고위 마법사란 의미가 된다.

척! 척척척!

창! 창창! 창창창!

기사들은 일제히 일어나 무기를 뽑았다.

“잘하고 있네. 이왕 시작한 거 마을 주민들을 전부 없애 버리는 거야. 여긴 발탄 제국도 아닌데 누가 뭐라겠어? 아무도 말하지 않으면 되지 뭐.”

어디선가 비아냥대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 말에는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기갑기사들은 펠톤의 명령을 기다렸다.

“난 오디안 힐바다. 너희들 중 나와 싸울 자는 없느냐?”

오디안은 차원 수리공 일행을 노려보며 차갑게 소리쳤다. 하지만 기사, 마법사, 죄수들 중 나서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건 다름 아닌 오디안의 마법 때문이었다.

파이어 볼은 3클래스 마법사만 되면 누구나 펼칠 수 있다. 하지만 파이어 볼로 기사의 머리를 가루로 만들 수 있는 마법사는 그다지 많지 않다.

최소한 7클래스 마법사는 돼야 가능하다. 상대가 7클래스 마법사라면 몬스터를 때려잡듯 아무렇게나 덤빌 수도 없다.

동료가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기갑기사들이 움직이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너희 발탄 제국에는 기사도, 전사도 없고 비겁자들만 있는 모양이구나. 그렇다면 나도 생각을 달리하겠다. 준비하라!”

오디안은 고함을 내질렀다.

덜컹! 덜컹! 덜컹! 덜컹! 덜컹!

출입문을 비롯한 창문이 일제히 열렸다.

“헉!”

“부, 불화살이다!”

창밖을 보고 있던 죄수들은 질겁했다. 1백 미터 떨어진 곳에 불화살을 든 자들이 이편을 노려보고 있었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창문을 열자마자 기름 냄새가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호들갑 떨지 마라!”

펠톤은 죄수들을 보며 차갑게 소리쳤다.

“씨팔!”

몇몇이 욕설을 흘리기도 했지만 죄수들은 이내 잠잠해졌다.

펠톤은 오디안을 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마을 사람들이 전부 죽어도 상관없단 말이냐?”

“너희들이 먼저 죽는지 우리가 먼저 죽는지 내기할까?”

오디안은 받아쳤다.

“이곳에 있는 우리는 기갑기사들이다. 그리고 저들 30명은 마법사다. 약간의 희생이 나겠지만 마을 사람들이 죽는다는 덴 변함이 없다.”

“불렀는가?”

그때 묵직한 목소리가 일행의 귓전으로 들려왔다. 그리고 거대한 덩치가 홀 안으로 들어왔다.

“헐! 반전이네.”

김필도는 깜짝 놀랐다. 놀랍게도 안으로 들어온 자는 2미터 50센티미터의 키에 검은 피부 그리고 이마 양쪽에 뿔을 가진 마족이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마족의 전투마갑인 크레디온을 착용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김필도는 시선을 돌려 펠톤 일행을 보았다.

“자식들 쫄기는.”

김필도는 피식 웃으며 술잔을 주인 앞으로 내밀었다.

“네?”

주인은 뜨악한 얼굴로 김필도를 보았다.

“술 팍팍 눌러 담으라고 한 말 못 들었어?”

“지금 술 마실 때가…….”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잖아.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말고… 아니다, 영감은 그만 나가 봐.”

김필도는 훌쩍 몸을 날려 바텐 안으로 들어갔다.

“나가라고요?”

주인은 황당하다는 듯이 눈을 끔벅였다.

“원래 독한 놈 옆에 있으면 정 맞는다고 하잖아. 저기 시커먼 친구 있을 때 얼른 빠져나가.”

“그, 그래도 되겠습니까?”

주인은 믿어지지 않는 얼굴로 물었다. 그는 한바탕 싸울 작정이었다.

“난 거짓말 같은 거 안 해.”

“감사합니다. 손님!”

주인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걸음을 옮겼다.

“영감!”

김필도는 주인을 불렀다.

“마, 말씀하십시오.”

“이거 가져가.”

김필도는 주인이 올려 두었던 검을 휙 던졌다.

“이건 왜…….”

주인은 검을 받아들며 김필도를 빤히 보았다.

“가족 안 지킬 거야?”

“가족을 지켜요?”

“그럼 안 지키려고 그랬어?”

“물론 지키겠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건 황제도, 귀족도, 저기 촌장도, 저기 나쁜 놈들도, 영감 자신도 아냐. 가족이야. 영감이 여기서 죽자사자 일해서 먹여 살리는 가족 말이야. 영감 가족에게 해코지를 하려고 하는 놈이 있으면 그놈이 누가 됐든 죽여. 무슨 말인지 알겠지?”

“아, 알겠습니다.”

“가 봐!”

“수고하십시오.”

주인은 고개를 숙이고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

“아이고, 이젠 좀 편하게 마셔보겠네.”

김필도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가장 큰 용기에 맥주를 따랐다. 맥주는 시원하게 쏟아져 나왔다.

김필도는 맥주잔을 바텐 위에 놓고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아이고! 너무 흡입했더니 쏠리네.”

김필도는 얼굴을 찌푸렸다.

사실 조금만 마셔도 금방 신호가 오는 탓에 맥주를 그다지 즐겨하지는 않는데 너무 오랜만이라 과하게 마셨나 보았다.

“그나저나 화장실이…….”

김필도는 좌우를 살폈다. 보통 화장실은 바텐 근처에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 출입문 근처에서 오디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부터 10분을 주겠다. 살인자를 넘기든지 머리를 가져와라. 물론 우리 마을 아녀자를 희롱한 것에 대해서도 대가를 받아야겠지만 크게 다친 사람이 없으니까 넘어가겠다.”

오디안은 머리가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차원 수리공과 전면전을 치르게 되면 자신들이 불리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전부를 없애지 못하면 발탄 제국에서는 토벌대를 보낼 수 있다.

불안에 떨고 있는 마을 사람들에게 촌장의 힘을 보여 주는 최선은 전쟁을 피하면서 살인자만 처리하는 것이다.

아녀자 희롱 건에 대해서는 잊겠다고 한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저런 사람을 곁에 둬야 성공하는데.”

김필도는 감탄한 얼굴로 오디안을 보았다.

마침 오디안도 김필도를 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계속 계실 겁니까?”

오디안은 물었다.

“화장실이 어디요?”

김필도는 되물었다.

“화장실은 왜?”

“맥주를 좀 빨았더니…….”

“바텐과 카운터 옆 통로로 가면 있습니다.”

“고맙소. 이따 봅시다.”

김필도는 손을 흔들고는 오디안이 가르쳐 준 방향으로 내달렸다.

“묘한 친구군.”

오디안은 김필도가 들어간 통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완 상관없으니까.”

이내 상념을 털어낸 그는 펠톤을 돌아보았다.

“지금부터 30분을 기다리겠다, 헬모트 자작.”

오디안은 차갑게 말하며 몸을 돌렸다.

“잠깐!”

펠톤은 오디안을 불러 세웠다.

“할 말이라도 있느냐?”

“당신 성을 알고 싶다.”

펠톤은 오디안을 빤히 바라보았다.

“난 오디안 힐바다.”

“성을 말하지 않으면 난 공격 명령을 내릴지도 모른다, 오디안 힐바.”

오디안은 홀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토바하크다.”

홀먼을 가만히 바라보던 오디안은 성을 말했다.

“헤라칸 가문의 제1가신이었던 그 토바하크 가문?”

“이미 잊힌 가문이다. 난 비긴의 촌장일 뿐이다. 현명한 결정을 내리길 기대하겠다, 자작.”

오디안은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으음!”

펠톤은 신음을 내뱉으며 자리에 앉았다.

일이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지금은 잊혔지만 과거 토바하크 가문은 바람의 가문인 헤라칸 가문 못지않게 대단했다.

4대 공작가문을 불, 물, 대지, 바람의 가문이라고 불렀다면 토바하크 가문은 마법의 가문이라고 불렀다. 토바하크 가문이 없었다면 헤라칸 가문은 감히 대공의 작위를 달라는 요구를 하지 못했을 거라는 게 그 당시 지배적인 의견이었다.

제국 최고의 마법사 가문이자 최강의 마법사를 배출했던 가문. 헤라칸 가문이 몰락했어도 토바하크 가문은 늘 주시의 대상이었다. 그랬던 그들은 헤라칸 가문과 함께 잊혔다. 토바하크 가문의 마지막 가주가 문 대륙으로 들어가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비긴의 촌장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어떻게 봤소?”

펠톤은 올가 드보르칸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6클래스 마법사였다.

“나보다 2배 이상 강해요.”

“그렇다면?”

“최소 7클래스 마법사예요.”

“전쟁을 택했을 때 우리가 승리할 확률은?”

“물론 승리는 하겠지요. 하지만 적진엔 7클래스 마법사와 상급 마족까지 있으니까 아군 또한 많은 희생이 따르겠지요.”

“승리해도 남는 게 없다는 소리군.”

“원래 사고는 친 놈이 수습해야 하는 거야.”

나직한 목소리가 바텐에서 들려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