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검은 머리 사내가 맥주통 앞에서 술을 따르고 있었다.
펠톤은 다시 올가를 보았다. 복장만 보고 마법사라고 생각한 탓이었다.
“마법사가 아니에요.”
올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죄수?”
펠톤의 시선이 죄수들 선두로 향했다.
거기엔 키가 2미터인 거구 사내와 키 190센티미터의 비만 사내, 그리고 145센티미터 키의 드워프 그리고 키가 2미터 가까이 되는 말라깽이 엘프가 서 있었다.
“처음 보는 새끼다.”
펠톤의 질문에 대답한 자는 드워프였다.
“씨팔놈들! 아무리 첫날 헤어졌다고 해도 그렇지. 단장 얼굴을 까먹는 새끼들이 어딨냐?”
김필도는 맥주를 작은 잔에 따르며 자리에 앉았다.
“단장?”
“억?”
“헉!”
놀람에 찬 외침과 신음이 교차했다.
차원 수리공 대원들은 경악한 얼굴로 김필도를 보았다. 문 대륙에 도착한 첫날 실종됐던 그가 무려 8개월 만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김필도는 작은 잔을 가져와 이름을 알 수 없는 독한 술을 따랐다. 그리고 맥주잔 안으로 집어넣었다.
일명 폭탄주였다.
그는 맥주잔을 들어 올렸다.
“반갑다, 아그들아!”
김필도는 활짝 웃으며 폭탄주를 죽 들이켰다.
탁!
술잔을 내려놓고 바텐을 나와 차원 수리공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김필도를 바라보는 펠톤의 얼굴에 조소가 어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바이칼 이콰라 자작과 이스 노르탄 자작의 얼굴에도 경멸의 빛이 떠올랐다.
“단장은 자격을 박탈당했소.”
펠톤은 차갑게 말했다.
차원의 벽 수리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돌아가지 못했던 것은 하만티움 때문이었다.
문 대륙에는 발탄 제국의 하만티움 광산이 있었다. 그런데 그곳이 몬스터의 땅으로 변하고 말았다. 문 대륙에서는 몬스터 땅으로 변하면 광산은 포기해야만 한다.
다시 하만티움 광산을 찾아 탐험을 했다. 그리고 2주 전, 몬스터 땅으로 변한 곳에 버금가는 규모의 광산을 찾아냈다. 하만티움의 순도는 50퍼센트 정도로 만족스럽지는 못했지만 매장량은 잃어버린 광산의 다섯 배가량 될 거라는 말을 들었다.
새로운 광산을 발견했다는 건 아주 큰 공이고, 평생 동안 경력으로 따라다닌다. 물론 단장이란 직함을 달고 있을 때 이야기지만.
그런데 차원의 벽을 수리할 때는 물론이고, 몬스터와 싸우면서 하만티움 광산을 찾아 헤맬 땐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던 자가 그 공을 가로채려고 하는데 순순히 물러날 수가 없었다.
“그거 황제 폐하 결정이야?”
김필도는 테이블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우리 결정이오.”
“너희들?”
김필도는 펠톤, 바이칼, 이스, 올가를 차례로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는 ‘너희들’이 아니고 펠톤 헬모트 자작이오.”
펠톤은 분개한 얼굴로 소리쳤다.
“그럼 난?”
김필도는 이번엔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 대공이오.”
“대공의 위치는 어디쯤이지?”
“위치라는 건…….”
“신분상 위치가 어디쯤이냐고 묻는 거다, 자작.”
“화, 황제 폐하와 공작 사이로 알고 있소이다.”
“발탄 제국은 어떤 사회지?”
“그건 또 무슨 말이오?”
“평등 사회냐 계급 사회냐 하는 걸 묻잖아.”
“계급사회로 알고 있소.”
“신분이 높은 사람이 장땡인 곳이 계급사회 맞지?”
“장땡은…….”
“최고란 뜻이야.”
“맞소.”
“그럼 다시 물을게. 너희 자작 새끼들이 대공인 날 자른다는 게 말이 돼, 안 돼?”
“능력이 없으면 잘릴 수도 있소.”
펠톤은 벌게진 얼굴로 말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어. 하지만 대공을 자를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은 너희 자작 새끼들이 아니라 황제야. 너희 자작 새끼들은 내가 싫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절대 자를 수 없어. 왜냐면 우리 발탄 제국은 계급 사회이기 때문이야. 내 말이 틀려?”
김필도는 펠톤을 빤히 바라보았다.
펠톤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김필도의 말이 구구절절 맞았다. 상관이 바보 멍청이라고 해도 하위 직급에 있는 자는 상관을 직위해제 시킬 수 없다. 이유가 어떻든 간에 그러한 일을 벌이면 하극상으로 간주하여 중죄로 처벌한다.
“대답해라, 자작!”
김필도는 차갑게 말했다.
“마, 맞소.”
“교육은 제대로 받았구나. 그럼 하극상의 죄를 짓지 않고 상급자를 직위해제 시키는 방법이 있는데, 알아?”
김필도는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모르오.”
정말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었다. 이런 질문에는 무조건 모른다고 대답하라는 교육을 받은 탓에 자동적으로 나온 말일 뿐이었다.
“넌?”
김필도는 펠톤 옆에 있는 바이칼을 보았다.
“나도 모르오.”
“그럼 너도 모르겠네?”
이번엔 이스를 보았다.
“그렇소.”
“너도 그렇겠지?”
“몰라요.”
올가는 싸늘한 눈으로 김필도를 쏘아보며 대답했다.
“다들 잘난 부모 덕분에 작위를 얻은 병신들만 모인 모양이구나. 야!”
김필도는 고개를 돌려 죄수들을 보았다. 그의 시선이 5조 조장인 드워프 데푸시에게로 가 꽂혔다.
시선이 마주치자 데푸시는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난쟁이 똥자루 네가 가장 눈에 띄잖아.”
“억!”
“헉!”
“허!”
놀람에 찬 신음이 죄수들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김필도가 똥자루라고 한 데푸시는 폭풍의 데푸시란 별명으로 불렸다. 안하무인에 위아래도 없고, 반말은 기본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죽지 않을 정도로 두들겨 팬다. 데푸시에게 맞아 뼈가 부러진 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게다가 데푸시에게 맞은 자들은 대부분 귀족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데푸시를 어쩌지 못했다. 체구는 작지만 검술은 그랜드 마스터에 필적할 정도로 강했기 때문이다.
그런 데푸시가 결정적인 실수를 했는데, 우연히 황제 행렬과 마주쳤을 때였다.
황제는 모처럼 드워프를 만나자 이야기나 나눌 겸 해서 불러 세웠다. 그리고 드워프 종족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물었다. 제국의 황제로서 총 1천만 명 정도 살고 있는 드워프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가 드워프로부터 들은 대답은 ‘미친 새끼 지랄하고 자빠졌네.’라는 쌍욕이었다.
대노한 황제는 그 드워프를 잡아들이라고 명령을 내렸다. 아무리 종족이 다른 드워프라고 해도 용서할 수 없는 중죄였다. 하지만 드워프를 없앨 수는 없었다.
데푸시는 드워프 종족 종 가장 막강하고 많은 인구를 가진 콜다 족 족장의 아들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콜다 족 족장에게 사람을 보냈다. 그리고 족장으로부터 버린 자식이니까 죽이든 살리든 알아서 하라는 대답을 들었다.
그렇다고 냉큼 죽일 수는 없었다.
아무리 내놓은 자식이라고 해도 누군가에 살해당하면 좋아할 아비는 없고, 언젠가는 독이 돼 돌아온다는 걸 황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데푸시를 용서해 주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황제는 결국 차원 수리공에 포함시켜 문 대륙으로 보내 버리기로 했다.
황제마저 어쩌지 못한 드워프 데푸시.
그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똥자루와 난쟁이였다.
그런데 하나도 아니고 두 가지를 이어 붙여 부르다니.
“난리가 나겠네.”
“썅노무새끼!”
누군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데푸시는 욕설을 뱉으며 김필도를 향해 돌진했다.
작은 체구와는 달리 데푸시의 움직임은 엄청났다. 그는 순식간에 김필도와 마주했다.
휙!
그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테이블에 엉덩이를 걸치고 있던 김필도가 벌떡 일어나 의자를 들어 올렸다. 김필도의 움직임 또한 데푸시 못지않게 빨랐다.
퍼억!
의자가 데푸시의 머리에 꽂혔다.
“크윽!”
데푸시의 입을 뚫고 나직한 비명이 흘러나왔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한 번에 기절할 정도로 엄청난 충격이었지만 데푸시는 쓰러지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김필도를 향해 몸을 홱 돌려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는 김필도를 너무 몰랐다.
의자가 박살난 순간 김필도는 다른 의자를 들어 올려 데푸시를 향해 내리찍고 있었다.
퍼억!
두 번째 의자가 데푸시의 머리에 작렬했다.
첫 번째 의자도 그랬지만 두 번째 의자에도 ‘강철의 굴강’이라는 대지의 마법이 걸려 있었다.
“커억!”
머리가 터진 듯 피가 푹 솟아 나왔다.
“존만한 새끼가.”
김필도는 또다시 의자를 들어 올려 내리찍었다.
퍼억!
“크악!”
세 번째 의자가 머리에 박히고 나자 데푸시는 그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세 방에 기절한 것이다.
“기절이 끝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새꺄!”
김필도는 다시 의자를 번쩍 들어 올려 기절한 데푸시의 머리를 향해 내리찍었다.
“저런 또라이 새끼!”
둘의 싸움을 지켜보던 엘프 이프리스가 혀를 찼다.
데푸시만큼이나 자신 또한 어디 가서 개 같은 성질로는 꿀리지 않는데 대공이란 새끼는 더했다.
이건 완전 미친 개새끼다.
어느새 박살난 의자는 스무 개가 넘어가고 있었다.
“난쟁이 똥자루 같은 새끼가 개기고 있어.”
김필도는 손을 탁탁 털고는 고개를 들었다.
움찔!
김필도의 시선을 받은 자들은 움찔했다.
“야! 꺽다리!”
김필도가 지목한 자는 2미터 키의 엘프 이프리스였다.
이프리스는 망설였다. 다른 때 같았으면 꺽다리란 말을 듣는 순간 눈동자는 돌아갔을 테고, 검을 뽑아들고 녀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이성이 맹렬하게 말린다. 달려가면 패대기쳐진 개구리 꼴 못 면한다고…….
“멀대, 내 말 안 들려?”
“씨발 새끼!”
이프리스는 결국 감정에 지고 말았다. 쫙 뻗는 개구리가 누가 될지는 싸워보기 전엔 모르는 일이었다.
더구나 최강의 무기였던 의자도 김필도 주변에는 없었다.
휙!
김필도 앞에 서자마자 이프리스는 오른 주먹을 강하게 찔러 넣었다.
퍼억!
둔탁한 소성이 이프리스와 김필도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이프리스는 고개를 숙였다. 아래쪽 급소에 가죽 부츠가 굳건히 박혀 있었다.
이번엔 시선을 들어 김필도를 보았다.
“엘프라고 거시기가 없는 건 아니겠지?”
김필도는 이프리스를 보며 생긋 웃었다.
“으아아아악!”
이프리스의 입이 쩍 벌어졌다.
“맞아본 놈이 아니면 거기서 오는 고통은 절대 모르지.”
김필도는 이프리스를 빤히 바라본 채 옆에 있는 테이블을 들어 올렸다.
그걸 눈뜨고 지켜보면서도 이프리스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맞은 데는 아래인데 왜 숨이 쉬어지지 않는지, 왜 똥이 마려운지, 왜 힘을 쓸 수가 없는지 안 맞아본 놈은 절대 몰라.”
김필도는 들어 올렸던 테이블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프리스의 머리를 향해 찍었다.
퍼억!
“크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이프리스가 풀썩 쓰러졌다. 단 한 방에 이프리스는 기절해 버린 것이었다.
“너!”
김필도는 죄수 중 덩치가 가장 큰 자를 가리켰다. 그는 사형수였다가 차원 수리공으로 발탁돼 문 대륙으로 넘어온 3조 조장 베르탄이었다.
“그, 그건…….”
베르탄은 말을 더듬었다.
사실 죄수들 중에서 가장 강자는 데푸시와 이프리스였다. 그 까닭에 드워프와 엘프임에도 불구하고 5조와 6조의 조장을 맡을 수 있었다.
확인된 바는 없지만 데푸시와 이프리스는 그랜드 마스터란 말까지 돌고 있다. 그런 두 명이 개구리 뻗듯 쭉 뻗었다. 말이 제대로 나올 상황이 아니었다.
“알면 대답하고, 모르면 모른다고 해라. 난 더듬거리는 건 딱 질색이니까. 무슨 말인지 알아?”
“씨팔! 모릅니다. 헉!”
베르탄은 솥뚜껑만 한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얼결에 ‘씨팔’이란 욕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그는 긴장한 얼굴로 김필도를 보았다.
“좋아, 그럼 비곗덩어리 넌?”
김필도의 시선이 4조 조장 헤르만에게로 향했다. 키는 1미터 90센티미터가량인데 체구가 워낙 커서 일행 중 가장 커 보였다.
“그어 버리는 겁니다.”
헤르만은 자기 손으로 목을 스윽 그었다.
“이름이 뭐지?”
“헤르만입니다.”
“넌 지금부터 비서실장이야.”
“내가 맞춘 겁니까?”
“늘 내게 말을 할 땐 ‘나’ 대신 ‘저’라는 말을 쓰는 습관을 들여. 그럼 넌 그 멋진 몸매를 계속 유지할 수 있을 거야.”
“알겠습니다, 대공 전하.”
헤르만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오픈(Open)!”
김필도는 아공간을 열어 검 한 자루를 꺼냈다. 그는 그 검을 테이블 위로 사정없이 꽂았다.
“이 검을 잘 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