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 김필도-64화 (64/225)

# 64

김필도는 일행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먼저 그의 시선을 받은 자들은 펠톤을 비롯한 귀족들이었다.

그리고 죄수들을 찬찬히 훑었다.

“나는 이곳에 도착한 날 밤 독에 중독당하고, 이 검에 찔려 낭떠러지 아래로 던져졌다.”

“그게 무슨…….”

“세상에!”

“맙소사!”

안에 있은 이들은 놀란 얼굴로 김필도를 보았다. 그들은 설마 김필도가 그런 일을 당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이건 놀랄 일이 아냐, 제군들. 정말 놀라운 사실은 여기 있는 니들 중에 내게 독을 풀고, 검으로 찔러서 낭떠러지로 던져 버린 놈이 있다는 거야. 한 놈인지 두 놈인지, 아니면 너희들 전부가 공모를 했는지 그것까진 알 수 없어.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게 말해 주겠다. 그놈은 내 손에 죽는다, 반드시.”

김필도는 차원 수리공 대원들을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그런 그의 미소를 보며 차원 수리공 대원들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제7장 빅 브라더

‘말도 안 돼.’

올가 드보르칸은 내심 소리쳤다.

이곳으로 출발하기 전에 아버지로부터 대공에 대해 들었다. 검술은 호신용으로 약간 익혔고, 마법은 마나 친화력이 부족하여 시작도 못했다고 들었다. 게다가 가택 연금을 당한 것처럼 살아왔기 때문에 세상 물정에도 어둡다고 했다.

그런데 조금 전 보여준 모습은 뭐란 말인가?

집 안에 틀어박혀 살았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인생 경험이 상당한, 그것도 밑바닥을 전전한 자의 모습이다.

정식으로 검술을 배우거나 박투술을 익힌 적이 없다고 하였던 그가 드워프 데푸시와 엘프 이프리스를 기절시킨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둘을 기절시킬 때 보여 준 잔인함은 또 어떤가. 이미 기절한 상대를 향해 의자로 내리찍는 건 광기의 표출이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어쩌면…….’

“작위가 어떻게 되지?”

문득 김필도의 목소리가 귀에 와 꽂혔다.

“남작이에요.”

올가는 김필도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후작 가문의 자식이 올라갈 수 있는 최고 작위가 남작이야?”

“모르세요?”

올가는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그래도 명색이 대공이고, 전 황제의 외손자다. 그런데 발탄 제국의 기본 법령조차 모르고 있었다.

“알아야 하는 건가?”

“꼭 알아야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대공인데 모른다고 하니까 이상해서요.”

발탄 제국에서는 귀족이라고 해서 모두 작위를 주지 않는다. 오히려 작위가 없는 귀족이 훨씬 많다. 그 이유는 황실에서 작위를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작가문과 후작가문은 두 개의 작위 이상은 가질 수 없고, 두 번째 작위 또한 자작과 남작만 가능하다. 즉 공작가문에서 가질 수 있는 작위는 공작과 자작뿐이고, 후작가문에서는 후작과 남작의 작위만 가질 수 있다. 그 이하 가문은 가문당 하나의 작위만 허락된다.

그녀가 남작인 이유는 드보르칸 가문의 유일한 상속자이기 때문이었다.

“난 이곳으로 오긴 전에 대공 작위를 받았을 뿐이야. 그 전엔 작위가 없는 단순 귀족이었을 뿐이고.”

“하지만 외할아버진 황제셨죠.”

“그 양반이 황제였기 때문에 제국의 제반 사항에 대해 관심을 가지면 안 되는 거야.”

“그게 무슨…….”

“아까 내가 한 질문에 너희들이 대답하지 않은 것과 같아. 전대 황제의 피붙이는 알아도 모른 척해야 살아남을 수 있거든.”

“그런데 대공께서는 모른 척한 게 아니라 아예 관심을 끊어 버렸다는 말씀이시군요.”

“더 확실한 방법이거든. 그 덕분에 그림자에 불과하지만 대공도 됐고.”

김필도는 싱긋 웃었다.

‘이 사람?’

올가의 눈빛이 흔들렸다. 문득 대공에 대해 잘못 알고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날 해친 사람이 남작이 아니길 빌어.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착한 것 같은데, 그 둘을 분리하긴 싫거든.”

부르르!

올가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마치 농담을 하는 것 같은 얼굴이다. 하지만 웃음기 어린 목소리에는 싸늘한 살기가 어려 있다. 그건 곧 살인에 아주 익숙한 사람이란 의미였다.

“10분 남았다!”

느닷없이 들려온 오디안의 목소리는 김필도의 등장으로 잠시 다른 길로 빠졌던 일행을, 다급한 현실로 끌어들였다.

정작 그들에게 급한 일은 8개월 전에 사라졌던 대공이 돌아왔다는 사실이 아니라 이편을 향해 화살을 겨누고 있는 비긴 마을 경비대 대원들이다.

‘그렇군.’

펠톤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8개월 만에 나타난 단장은 하만티움 광산을 발견한 공만 가로챈 것이 아니었다. 지금 비긴 마을과 시작된 갈등도 단장이 책임져야 할 일 중의 하나였다.

만일 전쟁이 일어나고, 다수의 기갑기사들이 죽임을 당하면 하만티움 광산을 발견한 공로는 묻힐 뿐 아니라 책임추궁을 당하게 될 것이다.

‘이럴 땐 밀어주는 게 낫지.’

“단장님.”

펠톤은 김필도를 불렀다.

“속보여, 인마.”

김필도는 펠톤을 빤히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이번엔 바이칼이 말했다.

“비서실장!”

김필도는 헤르만을 불렀다.

“말씀하십시오, 대공 전하.”

“검 뽑아.”

“검은 왜…….”

“돼지!”

김필도의 목소리가 차갑게 변했다.

“아, 알겠습니다, 대공 전하.”

헤르만은 급하게 검을 뽑아들었다.

“가급적이면 토 달지 않은 게 좋아. 목숨을 걸고라도 막아야 하는 일이라면 그땐 끼어들어도 좋아. 무슨 말인지 알겠어?”

“아, 알겠습니다, 대공 전하!”

“좋아. 저기 난쟁이 똥자루 앞에 서!”

“알겠습니다.”

헤르만은 곧바로 데푸시 앞에 섰다.

“검 들어 올려!”

“아, 알겠습니다.”

헤르만은 검을 번쩍 들어 올렸다. 검 끝이 향한 곳은 데푸시의 배였다.

“검 끝은 심장을 겨눠.”

“주, 죽이란 말입니까?”

“오디안 그 양반 말 못 들었어? 머리 다섯 개만 내주면 없었던 일로 한다고 했잖아.”

“그럼 이분의 머리를…….”

“그 똥자루 새끼하고 저기 멀대 새끼하고 합치면 벌써 두 개야. 나머지 세 개만 더 구하면 되잖아.”

“하지만 이분은…….”

“돼지!”

“아, 알겠습니다, 대공 전하.”

김필도의 목소리에 날이 서자 헤르만은 검 끝을 데푸시의 심장으로 향하도록 방향을 조정했다.

“찔러!”

“알겠습니다, 대공…….”

“돼지새끼, 스톱!”

헤르만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데푸시가 벌떡 일어났다. 데푸시가 일어나자마자 이프리스도 몸을 일으켰다.

둘의 얼굴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너 이 새끼!”

데푸시는 김필도를 노려보았다.

“계속 죽은 척하고 있다가 저승으로 바로 가지, 왜 일어난 거냐?”

“널 죽인 다음에 가려고 그런다, 개자식아. 오픈!”

데푸시는 아공간을 열더니 그의 키보다 더 큰 검을 꺼냈다. 검의 길이는 거의 150센티미터에 육박했다.

데푸시뿐만이 아니었다. 엘프 이프리스 또한 제 키 크기만 한 도끼를 꺼내들었다.

“특이한 자식들이네.”

김필도는 데푸시와 이프리스를 빤히 보았다.

“준비해라, 인간.”

“그러다 디진다, 똥자루!”

김필도는 번들거리는 눈으로 데푸시를 쏘아보았다.

‘저 씨발놈!’

데푸시는 찔끔했다.

분명 그는 인간들이 말한 그랜드 마스터 경지에 올랐다. 그런데 대공이란 인간 놈의 눈빛을 대하면 공연히 간이 콩만해진다.

조금 전 의자 공격을 당할 때도 다르지 않았다.

보통 인간 같으면, 시선이 마주치면 잔뜩 위축돼 피하는데 이번엔 자신이 피했다. 그러다가 마나를 끌어올려보지도 못하고 개처럼 두들겨 맞고 말았다.

그런데 또 그런 상황이 되는 것 같았다.

데푸시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이왕 뺀 검이니 저 속에서 열 마리만 추려.”

김필도는 죄수들을 가리켰다.

“열 마리?”

“덩치, 비서실장!”

김필도는 대답 대신 베르탄과 헤르만을 불렀다.

“말씀하십시오, 대공 전하!”

두 사람은 부동자세를 취하며 소리쳤다.

“명예귀족이란 말 알아?”

“모릅니다.”

“똥자루 넌?”

“몰라, 새꺄!”

“멀대 너도 모르겠지?”

“바랄 걸 바라라, 존만아.”

“아무튼 어떤 새끼가 엘프를 고귀한 종족이라고 하고 드워프를 대지의 축복이라고 했는지, 만나면 입을 찢어버리고 말 거야.”

김필도는 데푸시와 이프리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드워프와 엘프라는 놈들의 주둥이가 조폭보다 더 걸레였다.

“명예 귀족이라는 게 뭔데?”

데푸시가 물었다.

“원래 평민이었는데 이런저런 공을 세워서 귀족 대우를 받는 놈들이 있는데, 알아?”

“알지. 특히 기사들에게 그런 개구리들이 많지.”

“개구리?”

“올챙이 적을 생각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래, 개구리 같은 놈들이야. 아무튼 그런 놈들 중에서 유독 지가 평민이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평민만 보면 벌레 취급하는 아주 개잡것들이 있어. 그것들을 일컬어 명예 귀족이라고 불러.”

“그러니까 좀만이 니 말은 같은 죄수이면서 죄수가 아닌 척하면서 다른 죄수를 개무시하는 새끼들을 골라 분해를 하란 말이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전투기갑이 없는 놈들은 대부분 죽게 될 거야.”

“죄수들만 죽는다는 말이구나.”

“원래 전쟁 같은 큰 재난이 닥치면 없는 것들이 가장 먼저, 그리고 많이 죽게 돼 있는 거잖아.”

“니가 뭘 좀 아는구나.”

데푸시는 김필도를 향해 싱긋 미소를 보내고는 몸을 돌렸다.

그렇지 않아도 죄수들 중에 명예 죄수라 불러야 할 놈들이 있었다.

문 대륙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죄수들이 동요하는 기색을 보이자 펠톤은 첩자를 심어 죄수들을 감시해 왔다. 그렇게 해서 처형당한 죄수의 수가 22명이다. 그동안 죄수들을 살피면서 펠톤에게 정보를 제공한 자들을 색출해 놓았다. 하지만 없앨 수가 없었다.

그런데 신임 단장, 아니 8개월 만에 돌아온 단장이 놈들을 없앨 기회를 준 것이다.

“야들아, 준비해라!”

데푸시의 말이 떨어지자 모여 있던 죄수들이 일제히 좌우로 물러났다.

차앙! 차앙! 차앙!

느닷없이 검을 뽑는 소리가 죄수들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몇몇 죄수들이 다른 죄수들과 함께 이동하려다가 제지당한 것이었다. 제지당한 죄수들의 수는 전부 열두 명이었다.

“난 아니야!”

“아냐, 난 첩자가 아냐!”

죄수들은 당황한 얼굴로 소리쳤다. 하지만 좌우측으로 물러난 죄수들은 차가운 눈으로 바라볼 뿐 움직이지 않았다.

“단장님!”

죄수들은 김필도를 보았다.

“너희들을 배신자로 지목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거기 있는 동료들이다. 해명을 하려면 그들에게 해라.”

“저희들은 아닙니다, 대공 전하!”

“쏴라!”

바로 그때 밖에서 오디안의 외침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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