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 김필도-67화 (67/225)

# 67

데푸시는 목에 닿아 있는 검을 내려 보았다.

“지킬 수 없다면 지금이라도 말해라.”

“내 목을 자르겠단 말이냐?”

“난 약속을 지키지 않는 놈을 가장 싫어해. 아울러 그런 놈들과는 함께 갈 생각도 없다.”

“나는 물론이고 이프리스도 나이가 381살이다.”

“난 나이로 세상 살지 않아, 데푸시.”

“꼭 형님 소리를 들어야겠냐?”

“잠시였지만 즐거웠다. 잘 가라, 데푸시, 이프리스!”

김필도의 눈에 스산한 기운이 어렸다. 그리고 그의 손목에 힘줄이 불뚝 돋았다.

“따, 따르겠습니다.”

먼저 입을 연 자는 이프리스였다. 그는 김필도의 말이 빈말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이어 데푸시가 대답했다.

“따르겠습니다.”

“진심이냐?”

그의 설풍과 단도는 데푸시와 이프리스의 목을 5밀리미터가량 파고 들어간 상태였다.

“그렇습니다!”

“네!”

데푸시와 이프리스는 동시에 소리쳤다.

“좋다.”

김필도는 설풍과 단도를 회수했다. 그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잘해 보자, 데푸시!”

김필도는 오른손을 내밀었다.

“알겠습니다, 형님!”

데푸시는 김필도의 손을 잡고 고개를 숙였다.

“너도!”

데푸시의 손을 놓은 김필도는 이번엔 이프리스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알겠습니다, 형님!”

데푸시에 이어 이프리스도 ‘형님’이라고 소리치며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프리스 넌 촌장께 이야기해서 술 좀 구해 놔라.”

“얼마나 필요하십니까?”

“8개월 만인데 저 녀석들하고 술이라도 해야 할 거 아냐.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

“알겠습니다, 형님!”

이프리스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오디안 앞으로 걸어갔다.

“데푸시 넌 내 이야크 끌어오고.”

“어디에 두셨습니까?”

“저 검은 녀석을 이야크 상인들은 블랙칸이라고 부르고 난 750이라고 불러.”

김필도는 턱으로 블랙칸을 가리켰다.

“저 녀석이 형님 거였습니까?”

데푸시는 놀란 얼굴로 물었다.

“이야크 평원에서 얻은 거야.”

“그랬군요. 어쩐지…….”

데푸시는 고개를 끄덕이며 블랙칸이 있는 곳으로 갔다.

“이 이야크는 내가 주운 거요, 대공.”

펠톤이 버럭 소리쳤다.

“넌 남의 물건을 그냥 가져가서는 주웠다고 하는 모양이지?”

김필도는 펠톤 앞으로 걸어갔다.

주위에 있던 기갑기사들이 잔뜩 경계하며 김필도를 바라보았다.

기갑기사들의 손은 어느새 검 손잡이에 가 있었다. 그들의 의도는 명백했다. 그들은 김필도가 펠톤에게 해가 된다고 결론을 내리면 당장 검을 뽑아 공격할 생각이었다.

“검 손잡이에서 손을 떼지 않으면 전부 죽는다, 놈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데푸시의 몸에서 차가운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것은 곧 살기로 변해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하지만 기갑기사들은 물러나지 않았다.

그들은 그랜드 마스터가 쏟아내는 살기를 고스란히 몸으로 맞으며 김필도를 주시했다.

“이것들이!”

데푸시의 눈초리가 사정없이 추켜 올라갔다.

“참아!”

김필도는 손을 들어 데푸시를 막았다.

“형님!”

“저 녀석들은 대부분 헬모트 가문 기사들이야. 가문의 공자를 보호하는 건 당연한 거야.”

김필도는 펠톤을 바라보았다.

“맞소, 대공. 난 이 녀석을 골든 브리지 앞에서 주웠소. 골든 브리지 앞에는 전투를 치른 흔적이 남아 있었소.”

“그래서 750이 골든 브리지 근처에서 전투를 치른 자들 중 누군가가 놓고 간 거라고?”

“이 이야크가 대공 거라는 증거도 없잖소.”

“안장 있잖아.”

“이야크는 대부분 저런 안장을 얹어서 다니오.”

“하지만 ‘슈라’라는 글이 새겨진 안장은 거의 없지.”

“대공이 타고 다녔던 이야크 안장에는 글이 새겨져 있단 말이오?”

“응!”

김필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 녀석은 대공이 타고 다녔던 이야크가 아니오.”

“왜?”

“왜냐면 이 녀석의 안장엔 글이 없기 때문이오. 오른편에 문양만 있을 뿐이오.”

“그 문양이 글이야.”

“뭐라고요?”

“그 이상한 문양이 ‘슈라’라는 뜻이야. 그리고 ‘슈라’는 폭풍을 뜻하는 고대 언어고.”

“말을 잘 만들어 내는구려.”

펠톤은 피식 웃었다. 그 문양에 대해서는 바이칼이나 이스와도 이야기를 나눠 보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처음 본다고 했다.

“어떤 현상에 대해 의문을 갖는 건 자기계발을 위해 아주 바람직한 태도이긴 해. 하지만 자기가 모르는 분야에 대해서까지 의심을 하는 건 좋지 않은 습관이야. 왜 그런 말 있잖아. 무식한 건 용서가 되는데, 무식하면서 나대는 건 용서가 안 된다고 말이야.”

“이, 이게 정말 문자란 말이오?”

무식하다는 말에 펠톤의 얼굴이 벌게졌다.

“보여 줄게. 오픈(Open)!”

김필도는 아공간을 열고 이야크 창 라콰를 꺼내서 펠톤에게 내밀었다.

“뭐요?”

김필도가 내밀고 있는 것이 이야크 창이라는 걸 몰라서 묻는 게 아니었다. 그가 알고 싶은 건 이야크 창을 내미는 이유였다.

“손잡이 부분에 보면 안장에 있는 것과 비슷한 문양이 새겨져 있지?”

펠톤은 이야크 창 중간 마디를 보았다.

김필도의 말처럼 그곳엔 안장에 있는 것과 비슷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건 ‘라콰’라는 글이야. 라콰가 무슨 뜻인지는 알지?”

“바람이란 뜻이잖소.”

“폭풍과 바람, 어울리는 궁합이라고 생각되지 않아?”

“난 대공의 말을 믿을 수 없소.”

“끙! 이거 어서 힘을 길러야지. 빽도, 힘도 없는 대공이라고 공작가문의 자식새끼마저 무시하네.”

김필도는 펠톤을 빤히 바라보았다.

“난 무식하지 않소, 대공.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고, 고대어에 대해서도 아주 잘 알고 있소이다.”

펠톤은 김필도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말했다.

“안장에 새겨진 그 문양은 ‘슈라’라는 글이 맞소, 자작.”

뜻밖에도 김필도의 주장에 동의하고 나선 이는 두 사람을 지켜보던 오디안이었다.

“맞다고?”

펠톤은 오디안을 보았다.

“그렇소, 자작. 안장에 적힌 글은 슈라고, 이야크 창에 적힌 글은 라콰요.”

“난 믿을 수 없소!”

펠톤은 버럭 소리쳤다.

“네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훨씬 많은 게 세상이야, 자식아. 모르면 일단은 받아들이고 배워. 공연히 무식한 티내지 말고.”

김필도는 이야크 창을 조립했다. 앞쪽과 뒤쪽을 끼워 놓은 그는 펠톤을 밀쳐내고 블랙칸 옆으로 다가갔다.

스릉! 스릉! 스릉!

그러자 기갑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절반가량 뽑았다. 펠톤의 명령이 떨어지면 곧바로 공격할 태세였다.

삽시간에 팽팽한 긴장감이 주위를 휘감았다.

“그 상태에서 더 이상 뽑지 마라. 그 이상을 뽑는 놈은… 죽는다!”

블랙칸 고삐를 잡은 김필도가 기갑기사들을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펠톤은 부하들 중 한 명을 바라보았다. 펠톤의 시선을 받은 자는 헬모트 가문의 기사였다.

시선이 마주치자 펠톤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검을 뽑으라는 의미였다.

펠톤은 상관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방법으로 명령을 무시하는 걸 선택했다. 물론 명령을 거부하는 사안은 항명죄의 범주에 넣기 힘든 아주 사소한 것들이다.

이를테면 식사를 30분이나 1시간 후에 가져다준다든가, 세탁을 맡겼는데 그대로 둔다든가 하는, 철저한 무시다. 그러한 일들은 기분이 나쁘긴 하지만 처벌할 수가 없다.

지금 명령도 다르지 않았다.

검을 뽑지 말라는 명령을 받긴 했지만 실수로 뽑아 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검을 뽑았다는 사실만으로 처벌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바로 옆에 있는 것도 아니고 5미터나 떨어진 곳에 있으니까.

펠톤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어렸다.

스릉!

그의 입가에 미소가 채 지워지기 전에 시선을 받은 기갑기사가 검을 뽑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휙!

김필도의 오른발이 빠르게 앞으로 튀어나갔다. 곧 김필도의 오른발은 바닥에 깊은 자국을 남겼다.

쇄액!

그리고 이야크 창이 가공할 속도로 공간을 단축했다.

“헉! 시, 실숩니다, 대공 전하.”

검을 뽑았던 기갑기사가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기갑기사는 결코 김필도가 이야크 창으로 자신을 찌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미 실수라고 했는데도 찔러오는 이야크 창을 멈추지 않으면 살인이 되기 때문이다. 주위에 있던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기갑기사들은 비웃을 준비를 하며 상황을 지켜보았다.

푸욱!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김필도의 이야크 창두는 기갑기사의 목을 뚫고 들어갔다.

“컥!”

기갑기사는 멍한 얼굴로 김필도를 보았다.

“시, 실수라고 했는…….”

“하지 마.”

김필도는 이야크 창을 사정없이 뽑았다.

츄악!

동맥을 잘라낸 듯 기갑기사의 목에서 피가 폭포처럼 흘러내렸다.

기갑기사는 고개를 돌려 펠톤을 보았다. 그의 얼굴엔 원망의 기색이 역력했다.

한동안 펠톤을 바라보던 기갑기사의 신형이 앞으로 넘어갔다.

쿠웅!

기갑기사들은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일제히 펠톤을 보았다. 검을 뽑으라고 지시를 내린 이가 펠톤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몰튼은 실수라고 했소, 대공!”

펠톤은 김필도를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김필도는 펠톤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훌쩍 몸을 날려 블랙칸에 올랐다.

푸릉!

김필도가 올라타자 블랙칸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굳이 소유권 주장을 하지 않아도 블랙칸이 김필도의 이야크란 사실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조금 전 사건은 분명 살인이오, 대공.”

펠톤은 재차 소리쳤다.

“그래서?”

김필도는 블랙칸의 고삐를 쥐며 툭 말을 뱉었다.

“아무리 상관이라고 해도 명분 없는 살인은 용납되지 않소.”

“실수야.”

김필도는 낮게 말하고는 블랙칸을 돌렸다.

“무슨 소리요?”

“거기 죽은 놈이 몰튼이라고 했어?”

“그렇소.”

“몰튼과 같은 상황이었다고.”

“같은 상황이었다는 건?”

“나도 몰튼처럼 실수를 했다는 말이야. 아무튼 죽은 놈에 대해서는 미안하게 됐어. 이걸로 아주 후하게 장례를 치러주도록 해.”

김필도는 품속에서 동전 하나를 꺼내 시체 옆으로 던졌다.

“시, 실수…….”

펠톤은 멍한 얼굴로 되뇌었다.

몰튼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받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앞으로는 서로에게 실수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 그렇게 해 줄 수 있겠어?”

김필도는 펠톤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 알았소이다.”

펠톤은 더듬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들은?”

김필도의 시선이 이번엔 기갑기사들을 향했다.

“명심하겠습니다, 대공 전하.”

기갑기사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명심 정도가 아니라 뼛속 깊이 새겨 놔야 할 거야. 사소한 실수는 곧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말이야.”

고개를 숙이고 있던 기갑기사들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실제 검을 뽑아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것보다 사소한 실수도 하지 말라는 말이 더 무서웠다. 기갑기사들은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만 고개들 들고 하던 일 해라.”

김필도는 빙그레 웃으며 블랙칸을 몰아 오디안 곁으로 다가갔다.

오디안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8개월 만에 나타났다고 하였고, 기갑기사는 물론이고 죄수들도 그를 지휘관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단 두 시간도 지나지 않아 조직을 완벽하게 장악해 내는 엄청난 능력을 발휘한 것이다. 특히 몰튼이란 자를 없애 버리는 과감한 결단력은 아무나 보여 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문득 대단한 사람을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헬모트 가문은 발탄 제국 최강의 가문입니다.”

오디안은 김필도를 보며 말했다.

“난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 대공이요. 돌봐야 할 가족도 없고, 친척도 없고, 가진 재산도 없고, 내가 죽는다고 해도 걱정해 줄 사람도 없소.”

“아무도 없단 말입니까?”

“잃을 게 없는 사람이란 말이오.”

“잃을 게 없다는 건, 곧 강하다는 말이군요.”

“맞소, 촌장.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는 잃을 게 없으면서 실력을 갖춘 자요.”

“대공 같은 분을 말하는 거군요.”

“잘 아네. 그건 그렇고, 기갑기사 포함해서 14명을 화해 선물로 준비했는데 마음에 드시오?”

“저자까지 포함하는 겁니까?”

오디안은 몰튼을 가리켰다.

“우리가 잘못했는데 어쩌겠소. 그리고 이걸 추가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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