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 김필도-69화 (69/225)

# 69

알리토는 말없이 김필도를 보았다.

김필도가 말한 작은 계집애는 다름 아닌 이카렌이다. 김필도가 이카렌을 어떻게 아는지 의아했다.

“이야크 대평원에서 리모스까지 함께 여행을 했습니다.”

“가드 맵이 열렸단 말인가?”

알리토는 깜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

“가드 맵에 대해 아세요?”

“리모스로 들어가는 길이 숨겨져 있는 지도를 말하는 거 아닌가?”

“아는군요. 리모스를 나와 처음으로 들른 곳이 여기예요.”

“허!”

알리토는 멍한 얼굴로 김필도를 보았다.

마계10군단과 천계의 대천신군이 나왔다고 했을 때 어쩌면 가드 맵이 열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리모스에서 나온 인간을 만나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어, 어떻던가?”

알리토는 숨을 죽인 채 김필도가 입을 열기만 기다렸다.

“리모스 말입니까?”

“그렇네.”

“하만티움으로 만든 건물이 우뚝우뚝 솟아 있고, 빛으로 둘러싸인 빛의 도시더군요. 하지만 생명체의 흔적은 전혀 없는 죽은 도시였습니다.”

김필도는 리모스에 펼쳐져 있던 마법이 풀려 배만 타면 갈 수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수많은 세월동안 방치됐던 곳이니까.”

알리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맛은 어때요?”

김필도는 카판으로 화제를 돌렸다.

“한 잔 더 주겠는가?”

알리토는 한 잔 더 달라는 말로 카판의 맛에 대한 평가를 대신했다.

“매일 끓여드릴 수 있는데…….”

김필도는 주전자를 손으로 감싸고는 불의 속성 마법인 세딕을 펼쳤다. 그러자 곧 주전자 주둥이에서 허연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카판을 끓여 주는 대신 뭔가를 달라는 말이구먼.”

알리토는 김필도가 마법을 펼치는 광경을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

“알리토에겐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더 쉬운 일입니다.”

“들어보세.”

“대검술을 가르쳐 주십시오.”

“대검술?”

“마족과 천족이 사용하는 대검술 말입니다.”

“대검의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는가?”

“검 손잡이는 50센티미터, 검신은 1미터 50센티미터이고 무게가 20킬로그램 나가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20킬로그램의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아는가?”

“이 정도면 되지 않을까요?”

김필도는 로브의 소매를 걷었다.

그러자 납작하게 만들어진 모래주머니 세 개가 나타났다.

“뭔가, 그건?”

알리토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모래주머니를 쳐다보았다.

“모래주머니요. 무게는 30킬로그램 나갑니다.”

“지금껏 그걸 차고 다녔단 말인가?”

“양쪽을 합치면 60킬로그램이에요.”

“근력을 키우려고 그걸 차고 있었던 건 아닐 테고, 이유가 뭔가?”

“근력 강화 마법을 영구 마법으로 만들기 위해섭니다.”

“그런 마법도 가능한가?”

“시험을 해 본 건데 제대로 된 것 같네요.”

김필도는 빙그레 웃으며 아공간을 열었다. 그가 아공간에서 꺼낸 검은 히데우스로부터 받은 헬칸이었다.

“그분은… 어떻게 됐는가?”

사실 알리토가 카판 핑계를 대고 천막 안으로 들어온 것은 김필도의 왼손 손가락에 끼워진 오테르의 인장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히데우스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헬칸까지 꺼내 놓은 것이다.

“칼베리언이라고 아세요?”

“전 군단장 살해 방조죄로 투옥됐던 자네. 투옥되기 전에는 마계10군단 부군단장이었고. 그런데…….”

“마계의 누군가가 그놈을 풀어 준 모양이네요.”

“그래서 그분과 칼베리언이 싸웠단 말인가?”

“보진 못하고 말만 들었어요.”

“그럼 마계10군단 군단장은 어떻게 됐는가?”

“알리토에게 패배를 안겨 준 그 어린 계집애가 됐어요.”

“그랬구먼. 그런데 그분의 임종은 자네가 지켰는가?”

알리토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이카렌이 과연 군단장 자리를 지켜낼지 의문스럽긴 했지만 그 생각은 이내 지웠다. 그가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난 반지와 검을 받고 포션 몇 명을 주었을 뿐이에요.”

“홀로 떠나셨는가?”

“어쩌면 마계10군단에서 임종을 맞았는지도 모르겠네요.”

굳이 이카렌을 찾아갔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럼 오테르의 인장과 헬칸을 자네에게 준 건, 후계자 문제로 인해 일어날지도 모르는 혼란을 막기 위해서였구먼.”

히데우스는 평생을 혼자 살았고, 아는 이들이라고 해 봐야 마계10군단 대원들밖에 없다. 마계10군단 대원 누군가에게 오테르의 인장과 헬칸을 물려주게 되면 후계자 쟁탈전이 벌어질 게 뻔하다. 그렇다고 발콘을 가지고 있는 이카렌에게 헬칸을 물려주는 것도 탐탁지 않았을 것이다.

이카렌이 평범한 검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 검을 버리고 헬칸을 사용할 수 있겠지만, 그녀가 가진 검 또한 마계3대 신검의 하나. 더불어 발콘과 헬칸은 지닌 기운도 완전히 다르다.

결국 그녀에게 물려주면 헬칸은 사장될 수밖에 없다.

검의 주인으로서는 좋아할 만한 일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고 실력이 형편없는 자에게 물려줄 리도 만무하다.

알리토는 김필도를 보았다.

그랜드 마스터 경지에 올라 있는 데푸시와 이프리스를 잡은 걸 보면 상당한 실력자임에는 틀림없다.

특이한 마법도 익히고 있는 것 같고. 하지만 마족이나 천족에게까지 통할는지.

“비록 꼼수에 불과했고, 최상급 포션 수십 개를 사용했지만 이 손에 죽은 마계10군단 대원이 12명입니다.”

김필도는 양손을 활짝 펴서 얼굴 높이로 들어 올렸다.

“난 믿을 수가 없네.”

“천족도 한 명 없앴습니다. 이름이 세라핌이라고 하더군요.”

“세, 세라핌!”

알리토는 잘못 들었나 싶었다. 천좌10군의 제1군인 세라핌은 그도 아는 자였다. 대천신군 최강자의 한 명인 그를 인간이 이겼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믿어달라고 한 말이 아니에요. 헬칸을 노리는 자들은 그가 천족이든 마족이든 혹은 인간이든 전부 죽는다는 겁니다. 내 손에.”

“세라핌을 이겼다면서 굳이 대검술을 배울 필요가 있는가?”

“세라핌과 싸울 땐 지금 모습이 아니었거든요.”

“전투기갑을 착용했단 말이구먼.”

“…….”

김필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투기갑을 착용하면 두려울 것이 없는데, 지금 상태에서는 그렇지 않다?”

“이곳에 도착한 첫날 독에 당하고 검에 찔려 낭떠러지로 던져졌습니다. 만일 드래곤이 구해 주지 않았다면 이곳에 오지 못했을 겁니다.”

“차원 수리공 중에 자넬 없애려고 한 자가 있단 말인가?”

“그런 셈입니다.”

“그런데도 다시 돌아와서 차원 수리공을 지휘한다는 건가?”

“남의 자리를 빼앗을 생각은 없지만, 내 자리를 빼앗기고 싶은 생각도 전혀 없거든요. 그리고 날 없애려고 했던 놈도 찾아야 하고요.”

“…아직 인간을 가르쳐 본 적은 없지만, 해 보겠네.”

김필도를 가만히 바라보던 알리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고개를 저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히데우스 군단장이 선택한 인간의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더불어 세라핌을 잡았다는 말에 약간 흥미가 동하기도 했다.

천막을 나온 둘은 이야크를 타고 마을을 나섰다. 알리토가 이야크를 멈춘 곳은 남문에서 1킬로미터 떨어진 숲속의 공터였다.

공터는 지름이 50미터쯤 되는 원형이었다.

공터 주위는 자이언트 트리가 빼곡하게 들어차 천연 장벽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공터 한쪽 구석에는 통나무집이 세워져 있었다. 공터에서 잘라낸 자이언트 트리로 만든 집인 듯했다.

“내 숙소네.”

“마을 사람들과는 어울리는 게 쉽지 않았나 보죠?”

“마족은 특이하게 생겼지 않은가.”

알리토는 빙그레 웃으며 통나무집으로 이야크를 몰아갔다.

그리고 잠시 후.

알리토와 김필도는 공터 중앙에 마주 보며 섰다. 둘의 손에는 대검이 한 자루씩 들려 있었다. 김필도는 모래주머니를 풀어 한편에 둔 채였다.

“날 공격해 보게.”

알리토는 검 손잡이를 잡은 채 말했다.

파앗!

김필도는 사양하지 않았다. 공격한다는 말도 없이 곧바로 알리토를 향해 짓쳐들어갔다.

스아악!

강한 바람 소리를 남기며 헬칸이 허공을 갈랐다. 헬칸이 노리는 곳은 알리토의 허리였다.

차앙!

알리토는 거꾸로 세우고 있던 검 손잡이를 옆으로 미는 간단한 동작으로 헬칸을 막았다.

김필도는 튕겨져 나온 힘을 이용하여 검을 들어 올려 내리찍었다. 그의 동작은 상당히 빨랐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알리토는 아주 작은 움직임으로 김필도의 검을 막아냈다.

김필도는 쉬지 않고 움직였다. 휘두르고, 찌르고, 도끼질하듯 찍고, 베었다.

하지만 알리토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수천 년 묵어 폭풍우에도 꿈쩍도 하지 않는 자이언트 트리였다.

김필도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알리토를 보았다.

10여 분 동안 미친 듯이 공격을 가했지만 얻은 건 턱까지 차오른 가쁜 숨과, 미친 듯이 펌프질을 해대고 있는 심장뿐이다.

“봤는가?”

알리토는 숨결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다.

“봤습니다.”

누군가로부터 뭔가를 배울 땐 김필도는 최대한 자신을 낮춘다. 나이가 많고 적음은 따지지 않는다. 아주 작고 사소한 거라고 해도 뭔가를 가르쳐 주는 이는 전부가 스승이고 형님이다.

“뭘 보았는가?”

“방어는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해야 한다는 걸 배웠습니다.”

김필도의 대답에 알리토는 빙그레 웃었다.

그는 마족에게 처음 검술을 가르칠 때마다 같은 질문을 했다. 마족들은 백이면 백 ‘넘을 수 없는 벽을 보았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알리토가 원하는 대답은 그게 아니었다. ‘방어는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해야 한다는 걸 보았습니다.’라는 대답을 원했다.

수천 년 동안 검술 사범을 하면서 단 한 번도 듣지 못했던 대답을 인간으로부터 들은 것이다.

‘그래서 헬칸을 물려주신 건가?’

알리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또 뭘 보았는가?”

“대검술은 마나와 힘의 결합이라는 걸 느꼈습니다.”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힘은 체중과 근육에서 뿜어져 나옵니다.”

“하지만 지금 자네 체중으로는 아무리 강하게 공격한다고 해도 마족이나 천족을 물러나게 하지 못하네.”

“체중을 늘리든지, 대검의 무게를 늘리는 수밖에 없다는 말이군요.”

“이해가 빠르구먼.”

“대검의 무게를 늘릴 방법은 있습니까?”

“무게 조절기가 있네.”

알리토는 주머니에서 팔찌 형태의 물건을 꺼내 김필도에게 던졌다.

척!

김필도는 얼른 잡아챘다.

무게 조절기의 모양은 손목시계와 흡사했다. 위쪽의 둥근 판에는 십(十)자로 줄이 그어져 있었는데 세로 줄은 진하고 가로 줄은 옅었다.

“자네가 보고 있는 그 원형이 조절기네. 3시 방향까지 돌리면 25퍼센트가 늘어나고 6시 방향은 50퍼센트, 9시 방향은 75퍼센트, 12시 방향까지 돌리면 100퍼센트가 늘어나네.”

“어디에 끼워야 합니까?”

“검 손잡이 아래쪽에 끼우면 되네.”

김필도는 무게 조절기를 검 손잡이 아래쪽에 끼우고, 조절기를 마지막까지 돌렸다.

우웅!

나직한 소리가 무게 조절기에서 흘러나왔다.

이어 뭔가가 헬칸 내부를 채우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니 한순간에 무게가 늘어났다.

“손잡이 무게만 늘리는 게 아니었군요.”

단순히 손잡이 쪽만 무게가 늘어나는 게 아니라 검 전체적으로 고르게 늘어난 것이었다.

“전사를 훈련시키는 데 사용하는 건데 대충 만들 순 없지 않는가.”

“훈련용으로 만든 겁니까?”

“그걸 끼우고 반년만 생활하면 대검이 종이처럼 가벼워진다네.”

“그렇겠군요. 무게 조절기 또 있습니까?”

“있기는 하네만 어디에 쓰려고 그러는가?”

“발목에 하나 끼우려고요.”

“체중을 늘릴 생각인가?”

“우선은 그렇게라도 해 봐야지요.”

“될는지 모르겠구먼.”

알리토는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더니 무게 조절기 하나를 꺼내 던졌다. 그의 호주머니는 마법 주머니와 연결돼 있었다.

김필도는 무게 조절기를 오른 발목에 채우고, 조절기를 끝까지 돌렸다.

무게 조절기는 몸에서도 작동했다. 75킬로그램 나갔던 몸무게가 150킬로그램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김필도는 풀어 두었던 모래주머니마저 다시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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