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
제10장 탈출
해발 2천5백 미터에 위치한 칼만지 고원은 동서 3백 킬로미터, 남북 2백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땅덩어리다. 그 칼만지 고원을 달무리처럼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구덩이가 바로 헤린느 협곡이다.
헤린느 협곡에서 영원의 호수까지 거리는 가장 긴 쪽이 60킬로미터 정도고, 짧은 곳은 40킬로미터가량 된다.
인간들이 마을을 일구고 사는 장소가 바로 호수와 협곡 사이 공간이다.
인간들이 이곳에 마을을 이루고 살게 된 이유는 기후 때문이었다. 특이하게도 헤린느 협곡 안쪽은 다른 지역과 달리 밤낮의 기온차가 크지 않아 농사를 어렵지 않게 지을 수 있었다. 게다가 헤린느 협곡이라는 천연적인 방어벽이 있어 칼만지 고원에 서식하는 몬스터를 제외한 외부 몬스터들은 쉽사리 접근해 오지 못했다.
기후가 좋고, 몬스터는 적은 장소.
인간이 생활하기엔 최적의 장소였다.
칼만지 고원 북동쪽에 위치한 선(Sun) 마을도 그러한 이유 때문에 생겨난 정착촌 중의 한 곳이었다.
선 촌장은 발탄 제국에서 후작을 지냈던 클라베르였다.
클라베르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폭이 20센티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대검이 배를 뚫고 나가 뒤쪽의 나무에 꽂혀 있다. 마치 나뭇가지에 걸어 놓은 빨래 같은 신세다. 발끝과 지면과의 거리는 1미터 가량. 몸에서 흘러내린 피가 아래쪽에 흥건하게 고여 있다.
‘포션을 복용할 수 있다면 아직은 기회가 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전면을 보았다.
2미터 앞에는 붉은 전투기갑을 걸친 마족 열 명이 이야크에 탄 채로 이편을 바라보고 있다.
맨 앞에 있는 자의 신장은 3미터에 달했지만 이마에는 황금색이 아닌 백색 뿔이 나 있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칼베리언과 그의 부하들이었다.
클라베르의 시선이 오른편으로 향했다. 6미터 떨어진 곳에 가슴이 피로 범벅인 소녀가 누워 있다.
소녀는 이미 숨이 끊어져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살려 주시오.”
클라베르는 칼베리언을 보며 애원했다.
“말하라!”
“뭘 알고 싶소?”
“네가 알고 있는 것 전부를 말하라.”
“난 발탄 제국 황제의 밀명을 받고 문 대륙으로 건너왔소.”
“자원해서 온 건 아닐 테고, 저런 어린 암컷과 관련이 있나 보지?”
칼베리언은 죽은 소녀를 턱으로 가리켰다.
“그렇소. 내가 어린 아이와 관계를 갖는 걸 들키지 않았다면 이곳으로 오지 않았을 거요.”
“좋지 않은 취미는 늘 파멸을 몰고 오지. 네가 처음이냐?”
칼베리언은 빙긋 웃으며 물었다.
“세 번째요.”
“너보다 먼저 온 자는 누구냐?”
“로즈(Rose)와 블리스(Bliss) 촌장 두 명이오. 로즈 촌장은 30년 전에, 블리스 촌장은 20년 전에 왔소이다.”
“발탄 제국에서는 진작부터 문 대륙에 관심을 가졌다는 말이구나.”
“단 한 번도 눈을 뗀 적이 없소이다. 차원 수리공의 첫 번째 임무가 바로 문 대륙의 정찰이오. 그러다가 2백 년 전부터 문 대륙이 변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소.”
“계속해라.”
“발탄 제국 황실에서는 문 대륙에는 기름진 옥토가 넘친다는 소문을 전 대륙에 흘렸소. 그러다가 인구가 어느 정도로 늘어나자 나 같은 사람을 보내 마을을 세우기 시작했소.”
“이곳을 식민지로 만들 참이었더냐?”
“문 대륙은 우리 인간의 시발점이었소. 식민지를 만드는 게 아니라 뿌리를 찾아온 거요.”
“큭!”
칼베리언는 조소를 베어 물었다.
칼베리언 역시 고대에 이곳에서 마족, 천족, 드워프, 엘프, 인간이 모여 살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다섯 종족이 동등한 지위라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마족과 천족을 제외한 나머지 종족은 일꾼일 뿐이었다.
조경은 엘프가, 건축은 드워프가, 그리고 인간은 잡다한 허드렛일을 하는, 지금으로 치면 노예와 같은 신분이다. 인간 사내를 수컷, 인간 여자를 암컷이라 부르고 그들 사이에서 난 자식을 새끼라고 불러도 하등 이상할 게 없다.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칼베리언에게 뿌리를 찾아왔다는 클라베르의 말은 우스울 수밖에 없었다.
“켈러!”
“하명하십시오, 군단장님!”
“노예로 부릴 건강한 수컷과, 노예 시장에 내다 팔 젊은 암컷을 제외한 나머지는 소개하라!”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켈러는 마을 쪽으로 이야크를 몰아갔다. 마을에서 50미터 떨어진 숲속에는 크레디온과 세이기온을 걸친 마족과 천족 3백여 명이 이야크를 타고 있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블러드 데빌단이었다.
그런데 블러드 데빌단의 단장인 크로가 보이지 않았다. 승자가 모든 것을 차지한다는 마계 율법에 따라 블러드 데빌단을 떠난 것이다.
“건강한 수컷과, 젊은 암컷만 남기고 나머진 전부 소개한다.”
켈러는 선두에 있는 네 명을 보며 말했다.
천족 두 명, 마족 두 명으로 구성된 그들은 블러드 데빌단을 이끌고 있는 조장들이었다.
“알겠습니다.”
네 명은 고개를 숙였다.
“시작하라!”
“1조는 나를 따라라!”
“2초는 나를 따라라!”
“3조는……!”
“4조는……!”
두두두두! 두두두두!
블러드 데빌단 3백 명은 무서운 속도로 숲을 빠져나가 마을을 향해 질주해 갔다.
“적이다!”
“마적 떼다!”
뎅뎅뎅! 뎅뎅뎅! 뎅뎅뎅!
다급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성문을 닫아라!”
“성문을 닫아라!”
클라베르가 돌아오지 않아 성문을 열어 두었던 것이다.
그으으응!
급하게 성문을 닫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성문을 닫는 속도보다 블러드 데빌단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그들은 열린 성문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막아… 악!”
“아악!”
“으아악!”
비록 추방자가 됐다고 하지만 마족과 천족은 한때 전사였던 자들. 인간이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블러드 데빌단은 폭풍처럼 선 마을을 휩쓸었다. 잠시 후 마을 곳곳에서 불길이 오르기 시작했다.
“살려 준다고 하지 않았소?”
클라베르는 검을 뽑기 위해 다가온 칼베리언을 보며 말했다.
“너희 인간은 몬스터에게도 약속을 하느냐?”
칼베리언은 헤힐의 손잡이를 잡았다.
“넌 명예가 뭔지도 모르는 개잡종놈의 새끼구나.”
클라베르의 말에 칼베리언의 동작이 우뚝 멈췄다.
클라베르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무섭게 커졌다. 토끼눈처럼 새빨갛게 변한 눈으로 칼베리언은 클라베르를 쏘아보았다.
“눈동자가 새빨간 동물이 있는데 아느냐?”
클라베르는 칼베리언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이죽댔다.
칼베리언은 말없이 검을 천천히 돌렸다.
“귀는 뾰족하고 눈동자는 너처럼 빨게. 우리 인간은 그 녀석을 토끼라고 불러. 동물 중에서 겁이 제일 많지. 그런데 그 토끼와 네가 닮았어. 토끼라고 착각할 정도로!”
휙!
칼베리언은 헤힐을 뽑아냄과 동시에 다시 휘둘렀다.
스악!
그의 헤힐은 클라베르의 목을 자르고 나무마저 잘라 냈다.
쿠우웅!
나무는 커다란 소리를 내며 넘어갔다.
“크아아아!”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 듯 칼베리언은 고함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의 분노를 풀어 줄 대상은 옆에 없었다.
그에 반해 마을 안에는 넘치고 넘쳤다.
“타핫!”
칼베리언은 미친 듯이 마을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헤힐은 인간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8백여 명이 살아가던 마을이 초토화되는 데는 1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2백 명의 남자와 230명의 여자를 남기고 선 마을은 잿더미로 변했다. 그 남자와 여자들의 목에는 쇠로 만들어진 개목걸이가 채워지고 오른발 발목에는 족쇄가 끼워졌다. 개목걸이와 족쇄는 다시 기다란 쇠사슬로 이어졌다.
“로즈로 간다!”
떠날 준비가 끝났다는 보고를 받은 칼베리언이 소리쳤다.
“출발하라!”
“출발하라!”
차악! 차악! 차악!
채찍 휘두르는 소리가 들려오고, 노예로 잡힌 인간들과 블러드 데빌단은 마을을 벗어났다.
“문 대륙은 내 거다! 복종하는 놈은 살고 그렇지 않은 놈은 죽는다.”
칼베리언은 불길 속에 무너져 내리는 마을을 싸늘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 * *
마계라고 해서 사람들이 사는 세상과 특별히 다르지 않았다. 마족들이 사는 대륙의 이름은 루루시아다.
마족들은 인간들처럼, 과거 문 대륙에서 그들이 살았던 지명을 그대로 가져와 루루시아라고 지었다.
그들이 사는 방식 또한 인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가족이 있고, 가문이 있고, 마을이 있으며 도시가 있었다. 작은 집 한편엔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대저택이 있다. 귀족이 있고, 평민이 있고 노예가 있다.
그들이 인간과 다른 점이라면 긴 수명과 강인한 육체뿐이었다.
루루시아는 모데아, 메디아, 이시아, 리디아, 네 구역으로 나뉘고 원로들에 의해 다스려진다.
최고 신분인 마왕이 있기는 하지만 그는 상징적인 존재일 뿐 전면에 나서는 일은 거의 없다.
대부분의 실무는 4원로들 선에서 처리된다.
마계10군단 군단장을 결정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보통 차기 군단장은 전임 군단장이 지목한 자를 앉히는 게 관례였고, 전임 군단장이 유언을 남길 시간조차 없이 돌연사하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래 왔다.
사전에 마족 평의회가 열리긴 하지만 그것은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마족 평의회에서는 전대 군단장이었던 히데우스의 유언을 무시하고, 마계10군단 차기 군단장으로 데메우스를 지목한 것이었다.
또한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전 군단장인 히데우스가 차기 군단장으로 지목했던 이카렌이 체포돼 수감된 것이었다. 그녀의 죄목은 ‘권력 남용 죄’와 ‘반국가적 행위’ 두 가지였다.
-마왕께서는 천계와의 충돌은 절대적으로 피하라고 명령을 내리셨다. 불가피할 경우에는 선(先) 보고 후 명령을 받아 처리하라고 하셨다.
그런데 군단장 히데우스 팔콘 세이디오 오테르와 부군단장 이카렌 쿤타 카킬레우스는 독단으로 의사 결정을 하였다.
이는 ‘권력 남용’ 죄에 해당한다.
아울러 대천신군과 전쟁을 치름으로써 전면전을 초래할 뻔했다. 이는 ‘반국가적인 행위’에 해당한다.
따라서 본 마족 평의회는 히데우스 팔콘 세이디오 오테르와 이카렌 쿤타 카킬레우스에게 내렸던 모든 직위를 회수하기로 하였다.
그들이 마계10군단 군단장과 부군단장이었다는 사실과 그들이 세운 공적은 모든 기록에서 삭제될 것이며, 공작과 백작 작위를 박탈한다.
아울러 이카렌 쿤타 카킬레우스는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어둠의 땅’에 수감한다.
마계10군단은 발칵 뒤집혔다.
‘어둠의 땅’이란 다름 아닌 감옥이었다.
군단장의 호위인 친위대 전원과 마계10군단 대원 중 절반이 마왕의 거처인 마신의 성 앞 광장에 무릎을 꿇었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무릎을 꿇은 채 이카렌을 풀어 주고 데메우스를 군단장으로 앉힌 결정을 번복해 주기를 원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다.
하지만 친위대와 마계10군단 대원들은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프리메우스를 비롯한 마계4원로였다.
마계4원로가 앉아 있는 장소는 마신의 성 성벽 위에 세워진 건물 안이었다. 전면은 유리로 돼 있고, 좌우측과 뒷면이 석재로 돼 있는 이곳은,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 마왕이 휴식을 취하는 휴게실이었다.
“이제 어떻게 할 참인가?”
왼편에 앉은 자가 프리메우스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는 메디아를 다스리고 있는 쿤할 디움바 세이디안 팔리카였다. 프리메우스를 지지하는 두 명의 원로와는 달리 쿤할은 중립적인 위치를 견지하고 있었다.
“마계의 법은 우리네, 쿤할. 히데우스와 이카렌에 대한 사안은 이미 끝났네.”
“이카렌이 사병처럼 거느린 자가 850명이나 있다는 걸 잊었는가? 그들이 나서면 시끄러워질 수도 있네.”
“난 자네만 나서지 않으면 조용할 거라고 보네.”
프리메우스는 쿤할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쿤할 디움바 세이디안 팔리카.
그는 남작에서 시작하여 최상급 마족에서도 최고 위치인 원로까지 오른 입지적인 자였다. 마계4원로 중 남작에서 시작한 자는 그밖에 없다. 게다가 골수까지 전사라고 할 수 있는 자다. 그런 그의 경력은 많은 마계전사들의 귀감이 됐고, 수많은 전사들이 부하가 되기를 자처했다.
루루시아에서 전사를 가장 많이 보유한 곳이 메디아인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마왕이 계시는데 내가 나설 이유가 없지 않는가. 나는 자네가 정당하게 처리할 거라고 믿네.”
쿤할은 프리메우스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말했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그리고 자네가 걱정하는 그들은 중급 마족, 계집아이에게 패한 조무래기들에 불과한 자들이네. 그런 자들은 850명이 아니라 8천5백 명이 있다고 해도 문제될 게 없네.”
“하면, 저들은 어떻게 할 참인가.”
쿤할은 광장에 있는 마계10군단 대원들을 가리켰다.
“잘 처리해야지.”
프리메우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유리벽 앞으로 가 섰다. 그가 발을 디디고 있는 곳은 특별한 행사가 열릴 때 광장에 모인 마족들을 향해 마왕이 연설을 하던 자리였다.
그 자리에는 평소처럼 말해도 광장 끝까지 전파되는 샤우트 마법이 걸려 있다.
오픈이라고 외치자 유리벽이 좌우로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