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
“듣거라!”
프리메우스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마계10군단 대원들은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우리 마족 평의회는 객관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고 한번 내려진 판결은 번복되지 않는다. 모두들 돌아가서 일상으로 복귀하라!”
“재고해 주십시오, 마왕!”
“재고해 주십시오, 마왕!”
마계10군단 대원들은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소리쳤다.
그런데 그들은 원로라고 하지 않고 마왕이라고 하였다. 즉 위에 있는 프리메우스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계속 말을 듣지 않으면 항명죄로 다스리겠다. 지금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업무에 복귀하라!”
프리메우스는 전혀 여지를 두지 않겠다는 뜻을 다시 한 번 분명히 했다.
“부당한 명령입니다!”
맨 선두에 있던 하이닐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그대는 마족 평의회 평결을 부정하는가?”
“사실 관계를 따지지 않고 내린 부당한 평결입니다. 전쟁을 먼저 시작한 건 대천신군이었고, 우린 대항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울러 골든 브리지 앞 벌판에서는 이곳과 연락을 취하려고 해도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한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권력 남용이라고 한 것은 지휘관의 지휘권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처사입니다. 게다가 신임 군단장으로 추대된 데메우스 히달 알타테 홀리바인은 군단장의 명령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리모스로 들어갔습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리모스에서 부군단장의 처형식을 거행했다는 겁니다. 그런 자를 군단장으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응?’
듣고 있던 쿤할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데메우스가 이카렌의 처형식을 거행했다는 건 처음 듣는 말이었다.
“방금 너는 내 아들 데메우스의 명예와 관련된 발언을 했다. 증거가 있느냐?”
프리메우스는 쿤할의 눈치를 살피며 소리쳤다.
“부군단장님의 입을 통해 들었습니다. 그 이상의 증거가 필요합니까?”
“이카렌은 죄인이다! 그리고 죄인의 말은 증거로 채택될 수 없다!”
“그 말을 할 당시엔 죄인이 아니었습니다.”
하이닐은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등에 차고 있던 검을 풀어내려서는 바닥을 향해 힘껏 내리쳤다.
카앙!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그의 검이 절반으로 부러졌다.
하이닐은 부러진 검을 앞으로 던졌다.
마계10군단이 되면서 받았던 검을 부러뜨려 버린다는 건 곧 마계10군단을 떠나겠다는 의미였다.
“기어코 항명을 저지르겠다는 말이냐?”
“내가 사랑하는 마계10군단은 결코 꼼수나, 권력을 이용하여 신분이 상승하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검으로 승부를 보는 곳이었고,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신분에 상관없이 뛰어난 검술을 가진 자가 성공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전통이 이번에 무너졌습니다. 아무런 죄가 없는 군단장은 죄인이 돼 수감됐고, 명령을 어기고 진영을 이탈하고 부단장을 살해하려 했던 자는 군단장이 됐습니다. 나는 그런 곳에서 근무하는 걸 거부하겠습니다.”
“체포하라!”
프리메우스는 버럭 소리쳤다.
그러자 광장 우측에서 전투기갑을 걸친 마족들이 뛰어나왔다. 광장 주위에는 이미 마계1군단부터 5군단까지 5천여 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무릎을 꿇고 있던 마계10군단 대원들이 일제히 일어나 검을 뽑아들었다.
“반역을 할 셈이냐?”
“그럴 생각은 없소이다, 원로. 난 내 발로 걸어가고 싶을 뿐이오.”
하이닐이 말하는 사이에 친위대 대원 한 명이 나와 검을 부러뜨려 앞으로 던졌다. 그러고는 하이닐 옆으로 섰다. 마치 의식을 거행하듯 마계10군단 대원들은 앞으로 나와 검을 부러뜨린 후 던져 버리고는 하이닐 곁으로 섰다. 광장에 있던 자들 중 검을 부러뜨리고 하이닐 곁으로 선 자들은 절반가량이었다.
“안내하시오.”
하이닐은 외각에 늘어서 있던 마족들을 보며 말했다.
“따라 오시오.”
마족들 중 한 명이 나오더니 길을 잡았다.
하이닐은 동료 크라제를 돌아보았다. 시선을 받은 크라제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이닐은 다시 고개를 돌려 성벽 위를 보았다. 프리메우스는 여전히 이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계10군단이여 영원하라!”
하이닐은 낮게 말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마계10군단이여 영원하라!”
“마계10군단이여…….”
대원들도 하나둘 하이닐을 따라 나섰다.
크라제를 비롯한 남은 대원들은 하이닐 일행이 광장을 벗어날 때까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이 완전히 벗어나자 광장을 빠져나갔다.
“그들을 어떻게 처리할 생각인가?”
쿤할은 프리메우스를 보며 물었다.
“절차대로 처리해야 하지 않겠는가.”
“광장에 모였던 자들은 마계10군단의 절반가량인데 그들 전부에게 죄를 묻는단 말인가?”
“놈들은 마족 평의회의 결정에 반기를 들었네. 그건 곧 우리 마계의 근간을 뒤흔드는 중대한 범죄행위네. 만일 우리가 이번 일을 묵과하고 넘어가면 제2, 제3, 제4의 사건이 일어날 테고 우리 마계는 존속을 위협받게 될 거네. 나는 이번 일을 계기로 기강을 확립할 생각이네. 우리 마족 평의회 결정에 불복하는 자들의 말로가 어떻다는 걸 똑똑히 보여 줄 참이네.”
“그들을 죽이겠다는 겐가?”
쿤할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난 마계를 사랑하네. 마계의 미래를 위해 내 목숨을 바쳐야 한다면 기꺼이 그렇게 할 거네. 우리 마계의 존립에 해를 가하는 자들은 용서할 수 없네. 절대로.”
프리메우스는 차갑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난 피바람이 잠잠해질 때까지 조용히 집안에 틀어박혀 있어야겠군.”
“그렇다고 명분도 없이 마계10군단 대원들을 처형하는 일은 없을 거니까 걱정하지 말게.”
프리메우스는 빙긋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이어 원로 두 명이 프리메우스를 따라 나갔다.
“자네 아들인 데메우스를 마계10군단에 앉히는 순간 이미 명분을 잃었네, 프리메우스. 허점을 보이지 말게. 자네가 허점을 보이는 순간 내 검은 그 허점으로 파고들 거네.”
쿤할은 중얼거리듯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편, 성벽을 내려간 프리메우스는 곧바로 그의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에는 그의 아들 데메우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데메우스의 모습이 변해 있었다.
전엔 2미터 키에 검은색 뿔을 지닌 평군 마족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뿔은 화려한 은색 광채를 뿌리고 있다. 상급 마족이 됐다는 의미였다. 물론 키 또한 2미터 50센티미터가 되어 있었다.
“어떻게 됐느냐?”
프리메우스는 데메우스를 보며 물었다.
“일단 임시 감옥에 수감해 두었습니다.”
“놈들은 ‘어둠의 땅’으로 보내라.”
“거기엔 이카렌이 있습니다, 아버지. 하이닐 그놈을 그쪽으로 보내면 곧바로 이카렌과 함께 탈출을 시도할 겁니다.”
“그래서 어둠의 땅으로 보내려는 거다.”
“혹시…….”
데메우스는 놀란 얼굴로 프리메우스를 보았다.
“이번 일이 마무리되면 우리 모데아는 세 개의 군단을 거느리게 되고, 이시아와 리디아가 거느린 군단을 합치면 메디아의 쿤할이 거느린 군단과 비슷한 수준으로 올라선다. 이번 기회에 마계10군단은 반드시 장악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아버지. 놈들을 어둠의 땅으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 일이 끝날 때까지는 마계10군단 숙소 쪽으로는 가지 않도록 해라.”
“물론 그래야죠.”
데메우스는 빙그레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계1군단 군단장에게 명령을 전하러 갈 참이었다.
그로부터 사흘 후.
하이닐을 비롯한 마계10군단 대원 250여 명은 ‘어둠의 땅’으로 투옥됐다.
‘어둠의 땅’은 감옥이 아니라 버려진 장소라고 해야 옳다. 동서 50킬로미터, 남북 1백 킬로미터에 달하는 이곳은 빛이 존재하지 않는 지하 세계이면서, 마계에서 가장 강한 몬스터들이 서식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하이닐 일행이 이카렌을 찾았을 때 그녀는 몬스터와 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발콘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몬스터의 몸통은 싹둑싹둑 잘려 나갔다.
상당히 오래 전부터 싸움을 시작한 듯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몬스터 시체가 그녀 주위에 뒹굴고 있었다.
“웬일이야?”
하이닐 일행을 발견한 이카렌은 깜짝 놀랐다.
“단장님을 만나려고 사고를 좀 쳤습니다. 그런데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하이닐은 되물었다.
“여긴 심심하잖아.”
“다른 죄수들은 없습니까?”
“근처 어디에 숨어서 구경하고 있을 거야.”
“그런데 이놈들은 뭡니까?”
하이닐은 몬스터를 가리켰다. 크기는 황소만 한데 등은 딱딱한 껍질로 덮여 있고, 얼굴은 쥐를 닮은 특이한 몬스터였다.
“이곳에만 서식하는 황소두더지.”
“황소두더지요?”
“고기 맛도 제법 괜찮아.”
“이걸로 무슨 훈련이 된다고…….”
크아아!
하이닐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광포한 외침과 함께 수십 마리의 황소두더지가 쏘아져 왔다. 황소두더지가 튀어나온 곳은 놀랍게도 땅속이었다.
“차앗!”
“타앗!”
“이얍!”
하이닐 일행은 일제히 검을 휘둘렀다. 마계10군단으로 들어올 때 받은 검은 버렸지만, 어둠의 땅으로 들어오면서 과거에 사용하던 검을 다시 꺼내들었다.
카앙! 캉! 카앙!
“헉!”
“억!”
“헛!”
여기저기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놀랍게도 마계10군단 대원들이 휘두른 검이 황소두더지의 몸통을 잘라 내지 못한 것이다.
“그런 칼질에 잘리는 것들은 몬스터라고 부르지도 않아. 차앗!”
이카렌은 피식 웃으며 전방으로 쏘아져 나갔다.
캑! 꽥 꽥! 캑!
곧 그녀가 지나간 곳에는 황소두더지의 시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헐!”
하이닐은 어이없는 얼굴로 이카렌을 보았다. 그녀의 움직임은 폭풍우를 연상케 했다.
‘전보다 배 이상, 아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어.’
하이닐은 내심 중얼거렸다.
전에는 폭풍의 힘이 검에서만 감지됐다. 그런데 지금은 그녀 자체가 폭풍이었다.
“그럼 승산은 우리에게 있겠군.”
하이닐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말해!”
어느새 몬스터를 다 처리한 듯 이카렌은 하이닐 옆으로 다가와 있었다.
“군단장님을 모시고 나가기 위해 들어왔습니다.”
“어디로 갈 건데?”
“문 대륙으로 갈 생각입니다.”
“프리메우스가 순순히 보내 줄 거라고 생각해?”
“이곳에서 탈출할 거라는 암시를 프리메우스에게 줬습니다.”
“프리메우스가 알아차린 게 아니라 막을 테면 막아보라는 식으로 암시를 줬다는 거야?”
“그렇습니다.”
“왜?”
“쿤할 원로를 끌어들이기 위해섭니다.”
“그가 움직일 거라고 봐?”
“그가 움직이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프리메우스 견제용이란 말이구나.”
“그렇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일부러 이곳까지 왔는데 안 나간다고 하면 섭섭해 하겠지?”
“울지도 모릅니다.”
“그럼 가야지. 함께 갈래요?”
이카렌은 어둠 속을 향해 소리쳤다.
“클클클! 햇빛 보러 가는 건데 사양할 이유가 없지.”
어둠 속에서 어기적거리며 마족들이 걸어 나왔다. 그들의 수는 대략 1백 명이었다.
“인사들 해. 선배들이야.”
이카렌은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온 마족들을 가리켰다.
“선배들이라고요?”
“반갑네, 후배님들! 난 롹(Rock)이라고 하네.”
마족 한 명이 앞으로 걸어 나오며 자신을 소개했다.
“로, 록이라고요?”
하이닐은 경악한 얼굴로 마족 사내를 보았다. 마족 사내의 키는 2미터 50센티미터였다.
“록이 아니고 롹이네, 롹! 바위 말이네.”
마족 사내는 흰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