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 김필도-73화 (73/225)

# 73

제11장 마스터(Master)

김필도의 자세는 여전히 전과 같다.

헬칸을 쥔 오른손은 옆으로 활짝 폈고, 왼발은 한 걸음 앞으로 내밀고 있다.

무게중심은 왼발에 실었다. 여차하면 곧바로 뛰쳐나갈 기세다.

전과 같은 자세를 취한 김필도와는 달리 알리토의 자세는 달랐다. 전에는 검을 지팡이처럼 짚고 의연하게 서 있었는데 오늘은 양손으로 쥔 채 오른팔을 앞쪽으로 비스듬히 늘어뜨리고 있다.

둘 사이의 공기는 건드리면 바로 터져 버릴 것처럼 팽팽하다.

휘익!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고 창날처럼 생긴 자이언트 트리 이파리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차앗!”

“타앗!”

김필도와 알리토는 동시에 기합을 내지르며 서로를 향해 돌진했다.

스악!

순식간에 가깝게 마주 선 둘은 검을 휘둘렀다.

강한 힘을 머금은 검은 서로를 향해 광포하게 쏘아져갔다.

콰앙!

검에 마나를 싣지 않고 순수하게 힘만을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소성이 터져 나왔다.

어느새 김필도도 헬칸을 양손으로 쥐고 있었다.

쐐액!

그는 검의 방향을 바꿔 사정없이 찔러 넣었다. 헬칸은 빛살처럼 알리토의 심장을 노리고 쏘아져 갔다.

알리토는 검을 역수로 쥐고 왼편으로 쭉 내밀면서 손목을 위로 꺾어 올려 헬칸을 쳐냈다.

카앙!

헬칸은 왼편으로 젖혀졌다. 알리토의 검과 김필도의 헬칸은 나란히 왼편으로 향하는 모양이 됐다.

그 상태에서 알리토는 오른발을 앞으로 내밀며 왼편으로 가 있던 오른손을 김필도 목 앞으로 빠르게 당겼다. 그러자 역수로 쥐고 있던 알리토의 검날이 김필도의 목을 향해 쏘아져 갔다.

김필도의 양 다리가 일자로 벌어지고 꺼지듯 자세가 낮아졌다. 그 상태에서 김필도는 헬칸을 횡으로 휘둘렀다.

푹!

알리토는 검의 방향을 바꿔 땅속으로 찔러 넣었다.

카앙!

검과 부딪친 여력을 이용하여 김필도는 다리를 편 상태로 3미터가량 물러났다. 그러고는 두 다리에 힘을 줘 자세를 바로 했다.

“차앗!”

“타앗!”

알리토와 김필도는 또다시 기합을 내지르며 서로를 향해 돌진했다.

콰앙! 콰앙! 콰앙! 콰앙!

둘의 움직임은 점점 거칠어지고 휘두르는 검의 속도도 빨라졌다. 하지만 검이 부딪치면서 나는 소리는 처음보다 더 커지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작아졌다.

그 이유는 바로 김필도가 펼치는 검술 때문이었다.

김필도는 절대 정면으로 부딪치지 않았다. 검과 검이 맞부딪치는 순간 교묘하게 방향을 틀어 검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알리토의 힘을 흘렸다.

힘을 흘리는 그 동작은 김필도가 알리토와의 대결을 통해 배운 가장 중요한 기술 중의 하나였다.

마족이나 천족에 비해 체구가 작은 그는 체중을 늘리고, 검의 무게를 늘린다고 해도 정면으로 받아치면 밀릴 수밖에 없었다. 밀리다 보면 허점은 금세 드러난다.

허점을 없애기 위해서는 상대의 검을 통해 들어오는 힘을 흘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 기술은 그에게 커다란 이점이 됐다.

상대의 힘을 흘리는 동작 자체가 다음 공격을 위한 준비 자세가 되어 공격 속도가 더 빨라지게 된 것이다.

알리토의 검과 충돌했을 때 검의 속도가 더 빨라지는 게 바로 그 때문이었다.

콰앙! 콰앙! 쾅쾅쾅!

스악!

“헉!”

알리토는 헛바람을 삼키며 뒤편으로 몸을 날렸다.

파앗!

알리토가 내려서는 순간 김필도의 신형이 가공할 속도로 쏘아져 왔다. 어느새 그는 마음을 먹는 순간에 광속의 바람 라콰 마법을 펼치는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쇄액!

그가 휘두르는 대검이 무서운 속도로 알리토를 향해 쏘아져 갔다. 검이 노리는 곳은 알리토의 허리 위쪽이었다. 목을 노리고 싶어도 워낙 신장의 차이가 커 방법이 없었다. 그가 노릴 수 있는 최고 높이는 심장이었다.

콰앙!

둔탁한 소성이 알리토의 허리에서 터져 나왔다. 또다시 알리토와 김필도는 거칠게 엉켰다.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터져 나오고, 살이 베어지는 소리가 쉬지 않고 흘러나온다.

어느 순간부터 알리토와 김필도가 멈췄다 떠난 자리에는 핏방울이 흔적처럼 남았다. 그러면서도 둘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서로를 향해 몸을 날리고 검을 휘둘렀다.

한 시간이 훌쩍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났다.

온몸이 땀범벅이 된 가운데 세 시간이 지나고, 거친 숨을 몰아쉬는 가운데 네 시간이 지났다.

그런데도 둘은 멈추지 않았다.

둘의 발이 바닥을 다지면서 피어오른 먼지가 공터를 뿌옇게 채우며 밤이 왔고, 이슬이 그 먼지를 가라앉히며 아침이 왔다.

검, 힘, 마나의 결합이라는 마족 검술의 극한이 알리토와 김필도를 통해 구현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둘의 검에는 마나가 실려 있지 않았다. 오직 힘에 의한 대결이었다.

만일 휘두르는 검에 마나가 실리면 공터는 진작 초토화되고 말았을지도 몰랐다.

둘의 대결은 또다시 하루를 넘기고 사흘째에 접어들었다. 둘의 움직임은 현격하게 느려졌고, 검에 실린 힘도 줄어들었다.

“어쩌다가 이곳으로 건너오게 된 겁니까?”

둘 다 힘이 빠지자 오히려 여유가 생겼다.

김필도는 검을 맞댄 순간을 틈타 물었다.

“도전을 했네.”

“이카렌에게 도전을 했단 말입니까?”

“내 검술이면 발콘이 지닌 폭풍의 힘 정도는 제압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네. 그런데 패했지.”

“자존심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군요.”

“모두들 나를 비웃는 것처럼 보였다네. 그래서 이곳으로 넘어왔네. 군단장을 넘어설 자신이 생기면 그때 돌아가기로 하고 말이네.”

“자신 있습니까?”

“없네.”

알리토는 주저 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전보다 두 배 이상 강해졌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자네와 대결하면서 실력은 더 늘었네. 나 또한 흘리는 기술을 배웠으니까.”

“그런데도 자신이 없단 말입니까?”

“자네 때문이네.”

알리토는 검을 물리고 물러났다. 그러고는 그 자리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지금껏 오기로 버티고 있었지만 더 이상은 서 있을 힘도 없었다.

김필도 또한 다르지 않았다.

그는 쓰러지듯 그 자리에 드러누웠다. 그의 전신은 작은 검상으로 인해 피범벅이었다. 하지만 치명상은 한 군데도 없었다.

만일 옷을 입고 싸웠더라면 절반 이상의 상처는 입지 않아도 됐을 생채기 같은 부상이었다.

‘피를 흘린 대가는 확실하게 받았다.’

김필도는 내심 중얼거렸다.

알리토와의 무투로 인해 엄청난 것을 얻었다. 마족 검술을 익힌 것은 기본이고, 그림자 숲에서 익혔던 육감을 완벽한 경지까지 끌어올렸다.

알리토와 싸우기 전까지, 육감은 데자뷰 같은 막연한 느낌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동안 실전 무투를 통해 구체적인 사실로 인식하게 됐고, 위험이 다가오는 순간 몸이 저절로 반응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물론 육감이기 때문에 위험을 완벽하게 피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치명적인 암습을 당하는 일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나 때문이라는 건 무슨 말입니까?”

김필도는 알리토를 보며 물었다.

“자넨 내가 검술을 배우기 전엔 거의 백지나 다름없었네.”

노력을 무색하게 만드는 천재적인 재능.

알리토는 그런 재능에 대해 지금까지는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설령 그런 재능을 가졌다고 해도 노력하는 자에게는 당할 수 없다고 여겼다.

왜냐면 노력하는 천재는 아직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녀석은 달랐다.

검에 있어서는 소름끼치는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검술을 배우는 데 목숨을 건다.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서 노력까지 하면 쫓아갈 재간이 없다.

“마족의 검만 백지였을 뿐 사시미 칼은 10년 이상 다뤘습니다.”

“사시미 칼?”

“오픈(Open)!”

김필도는 아공간을 열었다. 아공간에서 그가 꺼낸 것은 쿠크리 단검을 닮은 대거였다.

대거는 총 길이가 45센티미터고 손잡이 머리에서 검 끝부분까지 볼록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폭은 손잡이 바로 윗부분이 가장 좁고 점점 넓어지다가 끝으로 가면서 좁아지는데, 어떻게 보면 중국 고대에 나오는 유엽도를 축소시켜 놓은 것 같기도 하다.

다만 유엽도와 다른 점이 있다면 칼날이 볼록하게 튀어나온 부분이 아닌 오목하게 들어간 부분에 있다는 것이었다.

원래 이 대거는 밀림 같은 곳에서 풀과 나무를 잘라 낼 때 쓰이지만 살상력 또한 뛰어나다.

무게 중심이 날 끝 부분에 집중돼 있어, 적은 힘으로도 쉽게 베어 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 대거를 수집한 사람은 아공간의 주인인 요른이었다.

김필도는 대거를 돌리기 시작했다. 대거는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현란하게 움직였다.

칼날이 수시로 그의 살갗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피는 흐르지 않았다.

“예술이구먼.”

휙!

알리토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대거는 김필도의 손을 떠났다.

턱!

20미터를 날아간 대거는 나무에 박혔다.

“제 별명이 사시미였습니다.”

“사시미 칼이 저놈과 비슷한 모양이구먼.”

“저 녀석보다 더 날카롭습니다.”

김필도는 대거를 가리켰다.

“검은 자네에게 익숙한 물건이란 뜻인가?”

“익숙한 정도가 아니라 생활이었죠.”

“그 단검술을 대검술에 적용했다는 건가?”

“특별히 단검술을 배운 적은 없습니다. 공격을 해 오면 막고, 반격을 할 뿐이죠.”

“철저하게 실전 위주의 검술이란 말이구먼.”

알리토는 김필도와 싸울 때를 떠올렸다.

지난 두 달 동안 검술에 대해 설명한 적은 거의 없다. 간혹 자세를 교정해 주었을 뿐, 무차별하게 공격만 했다. 아마 수백 수천 가지의 공격법을 사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김필도는 그 공격을 막아내고 반격을 해 왔다.

즉 방어에 이은 공격법을 스스로 터득해 낸 것이다. 철저한 실전을 통해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실전 마법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없거든요.”

“실전 마법?”

“들어본 적 있으세요?”

“서, 설마 철족의 마법을 말하는 건가?”

알리토는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실전 마법은 리모스의 종말을 불러왔던 철족의 마법이었다. 대륙 최강이라고 하였던 그 마법은 리모스의 멸망과 함께 사라졌다고 하였다.

“네.”

김필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

알리토는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이미 잊힌 존재고 잊힌 마법이다. 실전 마법이 나타났다는 말을 들어 본 적도 없고 익혔다는 자도 보지 못했다. 그런데 그 실전 마법을 익혔다는 자가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마족과 천족 그리고 인간이 문 대륙으로 다시 눈을 돌리는 시점에.

절묘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아무튼 제가 알리토와 대등하게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사시미 칼을 다뤘던 경험과 실전 마법 때문이었어요. 천부적인 재능 때문이 아니에요.”

그아아우!

휙!

바로 그때 나직한 울음소리와 함께 시아나가 나무에 박힌 대거를 뽑아 김필도 곁으로 다가왔다.

알리토는 몇 번 본 적이 있어 놀라지 않았다.

늘 그랬듯 시아나의 손에는 약초가 가득 들려 있었다.

시아나가 다가오자 김필도는 그 자리에 엎드렸다. 시아나는 먼저 젖은 천으로 김필도의 등을 닦아 내고는 약초를 씹어 발랐다.

“나도 좀 발라줄 수 있는가?”

시아나를 보고 있던 알리토가 물었다.

그아아우우우!

“아, 알았네. 꿈도 꾸지 않겠네.”

알리토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주머니에서 포션을 꺼내 발랐다. 시아나가 한 번만 더 그따위 소리를 하면 목을 따 버리겠다고 했던 것이다.

상처에 약초를 다 바르고 나자 시아나는 자리를 떴다. 김필도는 헤를리온을 착용하고 누웠다.

30분 후 김필도는 헤를리온을 해제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에 나 있던 상처는 흉터만 남기고 깨끗하게 나아있었다.

“알리토님!”

로브를 걸치고 있는데, 경비 대장 하멜이 이야크를 몰고 왔다.

“왜 그러는가?”

“촌장님께서 찾으십니다.”

“급한 일인가?”

“다른 마을이 공격당한 모양입니다.”

“공격을 당해?”

알리토는 깜짝 놀랐다.

“자세한 건 저도…….”

“가세.”

알리토는 서둘러 옷을 걸치고 한편에 매어 둔 이야크에 올랐다. 김필도는 블랙칸에 올라 알리토를 따라 나섰다.

잠시 후 마을에 도착했다.

오디안은 심각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무슨 일인가?”

알리토는 자리에 앉자마자 물었다.

“선 마을과 로즈 마을이 사라졌습니다.”

오디안은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사라져?”

“블러드 데빌단의 공격을 받은 모양입니다.”

“크로가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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