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
김필도는 그 자리에 드러누웠다.
하늘에는 레드, 블루, 다크 문이 휘영청 떠올라 있었다. 달 속에서 필녀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문득 팔 옆으로 따뜻한 기운이 끼쳐왔다.
김필도는 고개를 돌렸다. 테이블을 건너온 시아나가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누울래?”
김필도는 왼팔을 내밀었다.
크!
시아나는 그의 왼팔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누운 채 하늘을 바라보며 과거의 추억을 더듬던 둘은 두어 시간이 지난 후 마을로 향했다. 마을 입구가 가까이 보이자 늘 그랬던 것처럼 시아나는 숲으로 몸을 날려갔다.
김필도가 성문 앞에 멈춰 서자 저절로 문이 열렸다.
“……?”
김필도는 의아한 얼굴로 성문을 연 사람을 바라보았다. 문 옆에는 촌장 오디안이 서 있었다.
“뭐하는 거요?”
김필도는 안으로 들어가며 물었다.
“고민이 있을 땐 간혹 혼자 경비를 서곤 합니다. 카판 한잔 하시겠습니까?”
오디안은 슬쩍 미소를 지으며 성문을 닫았다.
“카판 한잔 달라는 말처럼 들리네?”
“제가 아무리 신경 써서 끓여도 대공 전하께서 끓여 주신 카판 맛은 내지 못하니까요.”
“그렇게 하지.”
김필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카판 잔을 앞에 두고 성벽 위에 앉았다.
“어떻게 할 생각이오?”
김필도는 카판 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지금까지는 대부분 해결책이 나왔는데…….”
“이번에는 답이 없다는 말?”
“차원 수리공들에게 도와 달라고 하면 안 되겠죠?”
“난 그림자 대공일 뿐이오, 오디안. 그리고 설사 명령을 내리는 위치에 있다고 해도 도와줄 수 없소.”
“승산이 전혀 없는 싸움이란 말입니까?”
“우리가 가진 전력은 기갑기사 70여 명이 전부요. 반면에 적은 3백여 명이고. 게다가 인간도 아니고 체격이 월등한 마족과 천족이잖소.”
“그렇겠죠.”
오디안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주할 생각은 없소?”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떠날 마음만 있다면 내가 아는 장소가 있소.”
“어딥니까?”
“간다고 결정을 해야 가르쳐 줄 수 있소.”
“여기서 멉니까?”
“비옥하고 넓은 땅도 있고, 몬스터도 없소. 블러드 데빌단만 잘 따돌리면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거요.”
“가겠습니다, 전하.”
“정말 여기를 버리고 가겠다는 거요?”
“전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곳에 있으면 젊은이들은 노예가 되고 나머진 전부 죽고 맙니다.”
“리모스요.”
김필도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리모스로 들어갈 방법이 있습니까?”
“그렇소.”
김필도는 리모스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감사합니다, 대공 전하.”
오디안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지옥에 발을 담갔다가 다시 빼낸 기분이었다.
“당장 준비해야겠습니다.”
오디안은 곧바로 그의 숙소를 향해 날아갔다.
“시아나 네가 오디안을 도와줘야겠다.”
김필도는 어둠속을 향해 말했다.
시아나의 인도가 없으면 몬스터들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호수를 건널 수 없을 것이다.
크아우우!
“오디안은 믿어도 될 것 같아. 아무탄 가주를 따라왔다가 인생의 대부분을 허비했는데도 원망하기는커녕 슈라와 라콰를 보며 반가운 표정을 지었잖아. 헤라칸 가문을 원망하고 있었더라면 알은체도 하지 않았을 거야. 게다가 그는 날 헤라칸 가문의 가주로 앉힐 생각까지 했잖아. 이 세상에 그런 사람은 별로 없어.”
캬우우!
“모르게 살짝 도와주면 되잖아.”
김필도는 카판 잔을 챙겨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뎅뎅뎅! 뎅뎅뎅!
계단을 내려가는데 비상종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부산한 움직임이 비긴 곳곳에서 감지됐다.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네.”
김필도는 혼잣말을 하며 걸음을 옮겼다.
다음날.
김필도는 오디안을 찾아 나섰다.
간밤 회의에서 오늘 돌아가자고 결론이 났기 때문이다. 오디안을 비롯하여 그동안 안면을 익혔던 마을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남쪽 성문을 나섰다.
성문 앞에는 차원 수리공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가! 곧 따라갈 테니까.”
김필도는 그렇게 말하고 이야크를 몰아 알리토의 숙소로 갔다.
“돌아올 건가?”
김필도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알리토는 공터 입구에서 김필도를 맞았다.
“앞가림을 제대로 하게 되면 돌아올지도 모르죠.”
“앞가림이라면?”
“함께 온 자작 놈들은 나를 그림자로 취급하거든요. 가끔은 미친 척 명령을 내리기도 하고요.”
“개무시한다는 말이구먼.”
“지금은 자작이나 남작 놈들에게마저도 개무시당하는 신세지만 외조부는 발탄 제국의 황제였어요.”
“그래서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는 상황이라고 한 거구먼.”
이제야 그가 목숨을 걸고 대검술을 익힌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의 삶은 이곳이 아닌 발탄 제국에 있었다.
“그렇습니다.”
“권력을 얻고 싶은가?”
알리토는 심각하게 물었다.
“권력을 얻고 싶은 게 아니라, 타의에 의해 땅속 깊숙이 묻었던 성을 끄집어내고 싶을 뿐입니다.”
“황제와 공작들을 바로 쳐다보고 싶다는 말이구먼.”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건 제가 드리는 감사의 선물입니다.”
블랙칸에서 내린 김필도는 준비한 주머니를 알리토에게 내밀었다.
“감사의 선물은 또 뭔가?”
“하찮은 인간에게 검술을 전수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감사합니다.”
한 걸음 물러난 김필도는 알리토를 향해 허리를 90도로 꺾었다.
“허허허! 행운을 비네, 대공.”
알리토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김필도는 블랙칸에 올라 공터를 떠났다.
혼자 남은 알리토는 김필도가 주고 간 주머니를 열었다. 주머니 안에는 푸른색 구슬, 검 손잡이, 싹이 약간 돋은 씨앗 한 개 그리고 쪽지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알리토가 먼저 집어든 것은 푸른색 구슬이었다.
“이건?”
알리토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구슬에서 따스한 기운과 더불어 거친 바람의 기운이 감지되었다.
그는 황망히 쪽지를 집어 들었다.
-우연히 맹약의 구슬을 얻었습니다. 블루 드래곤 이드라스가 남긴 맹약의 구슬입니다. 내게는 필요 없는 거라서요……. 그리고 검 손잡이는 라콰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리모스에서 얻은 열 개 중의 하납니다.
많은 걸 주셨는데 드릴 게 이것밖에 없네요.
그리고 씨앗도 리모스에서 얻은 건데, 얻을 땐 몰랐는데 싹이 나 있더군요. 이곳보다는 리모스에 심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혹시 리모스로 가게 되면 심어 주세요.
털썩!
알리토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드래곤이 남긴 맹약의 구슬은 최고의 마나단으로 일컬어지고, 리모스에서 주웠다는 검 손잡이는 잊힌 5대 신검의 하나인 라콰다.
바람의 기운을 사용하는 자신에게 꼭 맞춘 두 가지는 기연, 아니 천연이었다. 두 가지가 있으면 최상급 마족으로 각성도 가능하다.
“감사합니다, 대공!”
알리토는 김필도가 떠난 자리를 향해 고개를 푹 숙였다. 두 팔을 쭉 뻗고 입마저 땅에 대는 그것은, 단순한 감사의 표시가 아니라, 누군가를 주군으로 모실 때 처음으로 하는 존경과 복종의 표시였다.
“마스터(Master)!”
마음속 저 깊은 곳에서 울림이 솟구쳤다.
히데우스의 후계자란 사실만으로도 김필도는 이미 알리토로부터 인정을 받은 상황이었다. 그 상태에서 맹약의 구슬과 잊힌 5대 신검이 하나인 라콰까지 받자, 인정은 복종으로 변했다.
상급 마족이 부하가 됐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 김필도는 일행과 함께 길을 떠났다.
차원의 벽은 문 대륙의 휴도니아 지역 서쪽 끝에 있었었다.
밤엔 휴식을 취하고 낮엔 이동하기를 한 달여. 드디어 차원의 벽 앞에 도착했다.
차원의 벽과 1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커다란 석조 건물이 차원 수리공의 최종 목적지였다.
건물에 도착하자마자 마법사들은 마법진을 발동시키기 위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김필도는 블랙칸을 몰아 차원의 벽으로 향했다.
그 뒤를 이프리스와 데푸시가 따랐다.
그런 그들을 차가운 눈으로 쏘아보는 자가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펠톤 헬모트였다.
‘끝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놈! 이제 시작일 뿐이다. 나는 물론이고 바이칼과 이스는 결코 그림자 대공 네놈에게 당한 모욕을 잊지 않고 있다. 갚아 줄 것이다. 반드시!’
펠톤은 주먹을 지그시 말아 쥐었다.
그때 김필도와 이프리스, 데푸시는 차원의 벽에서 2백 미터 떨어진 장소에 도착해 있었다. 마나 폭풍이 불고 있어 더 이상은 접근이 불가능했다.
김필도는 차원의 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차원의 벽은 마치 거대한 바다를 잘라 수직으로 세워놓은 것 같다. 좌우측은 물론이고 위쪽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파도 소리 같기도 하고, 먼 데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 같기도 하다. 어쩌면 차원의 벽이 내쉬는 숨소리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깐 해 보았다.
“제국의 수도까지 형님 혼자 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김필도 옆에서 차원을 벽을 바라보던 이프리스가 말했다.
“나 혼자 간다고?”
“우린 죄수니까 행진은 불가능합니다.”
“그럼 기갑기사와 마법사만 남는단 말이네?”
“그들 또한 가문에서 나와 데리고 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혼자 남으면 좀 더 쉽게 내 목을 노릴 수 있다고 생각한 걸까?”
“형님을 암살한 자는 알아냈습니까?”
“접근해 온 녀석이 없었어.”
김필도는 고개를 흔들었다.
“짚이는 것도 없습니까?”
“그동안 한 가지 가설은 세워 보았어.”
“어떤 가설 말입니까?”
“내게 아주 중요한 어떤 물건을 있어. 여기서 중요하다는 건 발탄 제국의 권력 구도를 바꿀 수 있을 정도를 말해. 하지만 난 그게 뭔지를 몰라.”
“그런데 누군가는 그걸 알아차리고, 형님이 물건에 대한 비밀을 알아내기 전에 제거하려고 한다는 겁니까?”
“내가 가진 건 불알 두 쪽이 전부거든. 아이작 프리우스란 성은 땅속 깊숙이 파묻어서 꺼낼 수도 없을뿐더러 꺼내 봐야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어. 굳이 대공이란 작위를 줘 문 대륙으로 보낼 이유가 없었지.”
“그러니까 형님께는 형님도 모르는 어떤 중요한 물건이 있는데, 그 물건은 형님이 죽으면 쓸모없게 된다는 말이군요.”
듣고 있던 데푸시가 말했다.
“확신은 아니고 추측일 뿐이야.”
“만약 그 추측이 사실이라면 수도까지 가는 길이 죽음의 길이 될 수도 있겠군요.”
“그럴지도 모르지.”
김필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가시겠단 말입니까?”
“그럼 달리 갈 곳이라도 있어?”
“여기도 있습니다.”
“데푸시!”
“말씀하십시오, 형님!”
“저 차원의 벽 너머는 외조부 땅이었어. 외조부께서 돌아가신 지 45년밖에 지나지 않았고. 오랜 시간도 아냐. 그런데 그 땅의 주인이었던 외조부의 유일한 후손이 추방자 신세가 돼야 한다면, 그건 너무 슬프잖아.”
데푸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대공으로 임명되기 전까지는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는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과거 황제의 후손일 뿐이었다.
은둔자처럼 살고 있던 그를 누군가 외부로 끄집어내 죽이려고 했고,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들을 피해 문 대륙으로 숨는다는 건, 자존심, 굴욕, 비참함을 넘어, 그의 말처럼 아주 슬픈 일이다.
“가진 게 없는 놈은 실패해도 본전이란 말 알아?”
“잃을 게 없다는 건 가장 강력한 무기란 말도 압니다.”
“맞아, 데푸시. 그리고 난 대공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야.”
차원의 벽을 바라보는 김필도의 입가에 면도날 같은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