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
제1장 대공의 작위가 좋은 이유
뒤쪽에서 인기척이 나자 김필도는 고개를 돌렸다. 펠톤을 비롯한 대원 일부가 다가와 있었다.
“자넨 이쪽으로.”
김필도는 올가를 불렀다.
올가는 이야크를 몰아 김필도 옆으로 다가갔다.
“저거 마나야?”
김필도는 차원의 벽을 가리키며 물었다.
“혼돈의 마나라고 봐야 할 거예요.”
“혼돈의 마나?”
“돌을 던져 보세요.”
김필도는 블랙칸에서 내려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적당한 돌을 주워들어 차원의 벽을 향해 던졌다.
40킬로그램에 달하는 헬칸을 휘두르다 보니 웬만한 무게의 돌은 야구공 던지듯 던질 수 있게 됐다.
1백여 미터를 날아간 돌은 강력한 흡입력에 의해 차원의 벽으로 끌려갔다.
퍽!
차원의 벽 표면에 닿았던 돌은 가루가 돼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멋진 곳이네.”
김필도는 다시 블랙칸에 올랐다. 그러고는 설명을 요구하는 눈으로 올가를 보았다.
“차원의 벽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다른 차원으로 가는 통로라는 말이 전설처럼 내려오기는 한데 들어간 사람이 없어서 그것도 알 수 없고요.”
“그래도 저걸 만든 사람은 있을 거 아냐.”
“드반드쉬라는 궁극의 마법사가 만들었다고 전해져 내려와요.”
“드반드쉬는 인간이야?”
“그것도 알 수 없어요.”
“인간인지, 드래곤인지, 천족인지 마족인지 알 수 없는 자가 차원의 벽을 만들었다?”
“그래요.”
올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 끝났습니다!”
그때 건물 앞에서 헤르만의 외침이 들려왔다. 김필도 일행은 건물로 이야크를 몰아갔다.
이미 마법진을 발동한 모양이었다. 건물 내부는 온통 푸른색 광채가 일렁이고 있었다.
“조별로 이동해!”
김필도는 명령을 내리고는 건물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블랙칸을 몰아 건물 왼편 숲으로 갔다.
“갈게!”
그는 숲을 향해 말했다.
그아우우!
아쉬움 가득한 시아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지만 않으면 다시 만날 거야, 잘 있어.”
김필도는 블랙칸을 돌려 건물로 향했다. 건물 앞에는 6조와 올가가 서 있었다.
김필도가 다가오자 일행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 마법진에 올랐다. 마법진을 발동시킨 사람은 올가였다.
도착 지점에는 입구와 비슷한 형태의 건물이 세워져 있었다.
“차원 마법진이라고 했어?”
건물을 나선 김필도는 올가를 보며 물었다.
“네!”
올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이거 말고 다른 차원 마법진 경험한 적 있어?”
“아뇨?”
“그럼 차이점을 모르겠구나.”
김필도는 차원의 벽을 보았다. 차원의 벽은 반대편과 다르지 않다. 수직으로 세워진 바다처럼 좌우는 물론이고 위쪽까지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는 이미 차원을 이동한 경험이 있다. 그런데 방금 이동한 차원 이동 마법과는 많이 달랐다.
전에 경험한 차원 이동 마법은 비행기를 타고 먼 곳으로 간다는 느낌이었다면 이번에 경험한 차원 이동 마법은 작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느낌이었다.
“무슨 소리죠?”
“아냐. 그보다 앞으로 일정은 어떻게 되지?”
김필도는 블랙칸에서 내리며 물었다.
“전엔 저 멀리 보이는 머나먼 숲을 지나 수도까지 행진해 갔어요.”
올가는 멀리 보이는 거무튀튀한 숲을 가리켰다.
“머나먼 숲?”
김필도는 올가가 가리키는 숲을 보았다.
문 대륙으로 들어갈 땐 만남의 광장이라는 곳까지 워프 마법으로 한 번에 이동했기 때문에 어떤 경로로 수도까지 가는지 알지 못했다.
“차원의 벽으로 들어가면 돌아오지 못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에요.”
“통과하는 덴 얼마나 걸리는데?”
“10일가량 걸릴 거예요.”
“오늘은 여기서 쉬어야겠지?”
김필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새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그래야 할 것 같아요.”
올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법사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곧이어 일행은 이야크에서 내려 야영 준비를 했다. 불을 피운 다음 비긴 마을에서 얻어온 술과 음식으로 살아 돌아온 행운에 대한 축배를 들었다.
“그동안 즐거웠다. 다들 행복하게 살길 바란다.”
김필도는 잔을 들어 올렸다.
“대공 전하의 앞길에도 행운이 함께하길 빌겠습니다.”
죄수들은 잔을 높이 치켜들며 소리쳤다.
그렇게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낸 일행은 다음 날 길을 나섰다. 그들이 있는 곳에서 만남의 광장까지는 9시간가량 걸렸다.
먼저 밖으로 나온 자들이 연락을 한 듯 만남의 광장에는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그들 중에는 전투기갑을 걸친 자들뿐만 아니라 기사들도 있었다. 아마도 워프 마법이 걸린 마법 스크롤을 이용해서 서둘러 온 모양이었다.
일행이 도착하자 전투기갑을 걸친 기갑기사 한 명이 펠톤 앞으로 다가왔다.
“수고하셨습니다.”
기사는 펠톤을 향해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무슨 일인가?”
펠톤은 기사를 보며 물었다.
“죄수들을 호송하기 위해 나왔습니다. 명령서 여기 있습니다.”
기사는 둘둘 말린 종이를 펠톤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펠톤은 명령서를 김필도에게 건넸다.
“네가 처리해.”
김필도는 명령서를 보지도 않고 말했다. 펠톤을 대장으로 대우하는 것에 대해 굳이 이러쿵저러쿵 말하고 싶지 않았다.
“데려가게.”
김필도의 말이 떨어지자 펠톤은 기사에게 말했다.
“먼저 가겠습니다.”
기사는 가슴에 손을 대고 상체를 약간 숙여 예를 표한 다음 말을 돌렸다.
“죄수들은 이쪽으로 집결하라!”
잠시 후 우렁찬 외침이 들려오더니 죄수들은 전투기갑을 걸친 자들 근처로 집결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형님!”
“다음에 뵙겠습니다, 형님!”
“다음에…….”
죄수들은 김필도에게 인사를 하고 기사를 따라 자리를 떴다.
김필도는 멀어지는 죄수들을 바라보았다.
죄수들은 머나먼 숲으로 향해 가는 중이었다. 만남의 광장에서 머나먼 숲까지는 1킬로미터 정도였다. 죄수들을 바라보던 김필도는 다시 함께 온 자들을 둘러보았다.
그들 또한 가문에서 나온 자들을 따라 떠날 준비를 했다. 가장 먼저 떠난 사람은 올가 드보르칸이었다.
“먼저 가야겠어요.”
올가는 김필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보통 어떤 사람을 파악하는 데 두어 달이면 충분하다. 아니 그것도 길다. 그런데 대공은 전혀 알 수가 없다.
분명 1년 전 이곳에서 처음 만났을 때 대공은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은 백지였다. 그런데 1년이 지난 지금 그 백지에는 많은 것들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그것들을 알아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특이하고 이상한, 그리고 신비한 사람. 그가 바로 대공이었다.
“우리 다시 보는 건가?”
“황궁에서 환영식이 있을 거예요.”
김필도의 말에 올가는 얼른 정신을 수습했다.
“그럼 또 보겠군.”
“즐거운 여행 되세요.”
올가는 목례를 하고는 몸을 돌렸다.
“올가 드보르칸 남작!”
김필도는 올가를 불렀다.
“자넨 어떨지 모르지만 난 즐거웠네.”
“영광이네요.”
올가는 빙긋 웃으며 몸을 돌렸다.
곧 그녀는 드보르칸 후작 가문의 마차에 올랐다. 올가 드보르칸을 태운 마차는 광장을 빠져나가 머나먼 숲으로 향했다.
올가에 이어 두 번째로 떠난 자는 이스 노르탄이었다.
그는 올가와는 달리 조소를 베어 문 채 마차에 올랐다.
다음에 떠난 바이칼 이콰라도 다르지 않았다. 김필도를 빤히 바라보더니 킬킬거리며 마차에 올랐다.
곧 두 대의 마차는 만남의 광장을 빠져나갔다.
이제 남은 자들은 김필도와 펠톤 그리고 기사 50여 명이었다. 왼편 가슴에 샐러맨더 문양이 수놓아져 있는 그들은 헬모트 공작 가문 기사들이었다.
그런데 김필도를 바라보는 기사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아니 곱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노골적으로 경멸의 표정을 지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어쩌면 당연한지도 몰랐다.
발탄 제국에는 수많은 귀족이 있지만, 그들 중 작위를 가진 자들은 10퍼센트가 채 되지 않는다.
작위를 가지지 못한 귀족들 중에는 가진 재산을 바탕으로 기사단을 운영하면서 작위 귀족 못지않은 힘을 발휘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다른 귀족이나 황실의 도움이 없으면 귀족 자리를 유지하기 힘든 자들도 있다.
전자를 작위가 없는 귀족이란 의미로 무작귀족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작위 빼고 아무것도 없다고 하여 무늬귀족이라고 부른다.
귀족 사회에서 무늬귀족은 경멸의 대상이었다.
김필도 또한 다르지 않았다.
재산도 없고, 거느린 기사도 없고, 권력도 없다. 다만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 앞에 대공이란 칭호만 붙었을 뿐이다. 그런 자가 대공이라며 거들먹거리고 있으니 우습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차원 수리공으로 함께 갔던 펠톤 헬모트와 다른 귀족 그리고 기갑기사들이 김필도를 무시한 이유가 그 때문이기도 했다.
“기분이 어떠냐?”
김필도를 바라보던 펠톤이 입을 열었다.
“……?”
김필도는 펠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발탄 제국으로 넘어오자마자 반말이다. 문득 참 유치한 녀석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제 차원 수리공은 해체된 거나 마찬가지거든.”
네 맘 다 알지 하는 얼굴로 펠톤이 말했다.
“그래도 난 대공이지.”
“남들이 인정해 주지 않으면, 대공 아니라 황제라고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아직 모르나 보지?”
“그럴지도.”
김필도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건 황실에서 온 거다.”
툭!
펠톤은 들고 있던 명령서를 블랙칸 발치로 던졌다.
“그동안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모양이지?”
김필도는 피식 웃으며 블랙칸에서 내렸다. 그러고는 블랙칸 발 옆에 나뒹구는 명령서를 주워들었다.
명령서에는 1월 30일에 차원 수리공에 대한 환영식이 있으니 참석하라는 황제의 명령이 적혀 있었다.
1월 30일이면 시간은 충분했다. 아니 참석하지 않아도 상관없으니까 1월 30일이란 날짜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황실에서 해 주는 성대한 연회보다는 거리에서 환영식을 해 주는 게 훨씬 좋은데.”
김필도는 명령서를 블랙칸 안장 옆에 끼워 넣으며 투덜댔다.
“원래는 그렇게 했었다. 죄수를 제외한 나머지는 온 국민의 열렬한 환영 속에 수도 테라까지 행진을 했지. 당연히 차원 수리공의 단장은 영웅이 됐고.”
“그런데?”
“딱 한 명 때문에 모든 일정이 취소됐다.”
“그러니까 내가 문 대륙에서 죽었다면 열렬한 환영식을 열었을 텐데, 죽지 않고 살아 오는 바람에 모든 일정이 취소됐다?”
“잘 아는구나.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
펠톤은 조소를 머금고 말했다.
“그 주둥이 조심해라, 펠톤 헬모트. 여기가 발탄 제국이고, 헬모트 가문이 목에 힘을 주는 곳이라고 해도 대공을 능멸하면 죽는다.”
싸늘한 목소리가 김필도 입에서 흘러나왔다.
아무리 가진 게 없고 권력을 쥐지 못했다고 하지만 자작 놈이 머리 꼭대기 위로 올라가는 건 용서할 수 없었다.
“건방진 놈! 그림자 대공 주제에 눈에 봬는 게 없는 모양이구나.”
사전에 이야기가 된 듯 기사 한 명이 앞으로 뛰쳐나왔다.
김필도는 기사들을 한 명씩 훑었다. 펠톤을 비롯한 기사들의 얼굴엔 하나같이 빈정거림이 묻어났다.
김필도의 시선이 다시 펠톤의 얼굴에 꽂혔다.
“대공의 작위를 지키는 건 권력이다. 아무런 힘도 없는 자가 나는 대공입네 하고 외쳐 봐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걸 알아야 한다, 애송이!”
그동안 당했던 걸 갚아 주기라도 하듯 펠톤은 마구 비아냥댔다.
“그러니까 내가 개털이라서 저런 존만한 새끼들까지 우습게 본다 이거지?”
김필도는 기사를 가리켰다.
“넌 개털보다 더 못한 존재라는 걸 아직 모르는 모양이구나, 그림자 대공.”
기사가 비아냥댔다.
“썅!”
김필도의 신형이 기사를 향해 폭사돼 갔다.
그의 상체는 약간 숙인 채였고, 양팔은 엇갈려 엉덩이 쪽으로 향해 있었다. 오른손은 왼편 단도 손잡이를, 왼손은 설풍 손잡이를 잡았다.
스르릉!
기사는 기다렸다는 듯 검을 뽑아 번쩍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