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 김필도-77화 (77/225)

# 77

달려오는 김필도의 머리를 향해 도끼질하듯 찍어 버릴 생각이었다.

“차앗!”

기사의 입에서 우렁찬 외침이 터져 나왔다.

슈캉! 슈캉!

바로 그 순간 설풍과 단도가 뽑혔다.

아주 짧은 차이였지만 오른손의 단도가 먼저 뽑힌 모양이었다. 단도는 먼저 기사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고, 이어 설풍이 기사의 허리를 갈랐다.

검을 도끼처럼 찍던 기사의 동작이 우뚝 멈췄다.

김필도는 몸을 똑바로 세워 뒤로 물러나며 설풍과 단도를 도집에 던져 넣었다.

툭! 툭!

파앗!

먼저 기사의 머리가 뚝 떨어졌다. 그리고 허리 위쪽이 벌러덩 넘어가며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창! 창창창! 창창!

기사들은 일제히 검을 뽑고 말에서 뛰어내렸다.

말에서 내린 자들 중 다섯 명이 김필도를 향해 쇄도해 들어갔다.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김필도는 기사들을 향해 쏘아져 갔다.

순식간에 기사 앞에 선 그의 허리춤에서 설풍과 단도가 뽑혀 나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도를 잡는 방법이 달랐다. 조금 전엔 오른손은 왼편의 단도를 왼손은 오른편 설풍을 쥐었는데, 이번엔 정반대였다.

오른손으로는 설풍을 뽑고 왼손으로는 단도를 쥐었다. 당연 역수로 쥘 수밖에 없었다.

김필도는 지그재그 스텝을 밟으며 권두 선투가 훅을 치는 것처럼 오른팔과 왼팔을 휘둘렀다.

역수로 틀어쥔 도가 둥글게 호선을 그리고, 달려들었던 기사의 몸통이 어깨에서부터 반대편 옆구리까지 사선으로 잘려 나갔다.

“아악!”

“커억!”

“크윽!”

푸욱!

세 명을 해치운 김필도는 네 번째 기사의 가슴에 단도를 꽂아 넣었다. 그러고는 그 기사를 지나쳐가면서 뒤에 있던 다른 기사의 목을 향해 설풍을 휘둘렀다.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동작이었다.

“커억!”

“크윽!”

처절한 비명이 흘러나왔다.

김필도는 조금 전 가슴에 단도를 꽂았던 기사의 몸을 홱 돌렸다.

기사는 죽기 직전이었다. 아직 가슴에 꽂혀 있는 단도를 왼손으로 뽑아내면서 오른손의 설풍을 내리그었다. 왼편 목으로 파고들어 간 설풍은 오른편 옆구리로 빠져나왔다.

“크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기사의 몸통이 쩍 갈라졌다.

“이왕 시작한 거 끝장을 봐야겠지?”

김필도는 기사들을 쏘아보았다. 어느새 그의 로브는 기사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로 엉망진창이었다.

“기갑기사들은 전투 기갑을 착용하라!”

지켜보던 펠톤은 기사들을 향해 버럭 소리쳤다.

“멈춰라!”

느닷없이 마차 안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전투기갑을 착용하려던 기사들이 일제히 물러났다.

“쿡!”

김필도는 피식 웃으며 마차를 보았다.

그는 조금 전부터 마차 안에 사람이 앉아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펠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오지 않는다는 건 펠톤보다 신분이 높은 자란 의미였다. 어떤 자인지 궁금했는데 이제야 대면을 하게 되는 모양이었다.

벌컥!

마차 문이 활짝 열렸다.

5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적금발 중년인이 김필도가 있는 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헬모트 공작 가문의 가주인 비하트 에드모리 카반 헬모트 공작이었다.

굳이 올 필요가 없었음에도 이곳까지 나온 이유는, 아들 펠톤의 말 때문이었다. 그 중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드워프 데푸시와 엘프 이프리스가 대공을 형님으로 모신다는 말이었다. 그것도 장난이 아니라 진지하게.

믿어지지 않는 말이었다.

드워프 데푸시는 발탄 제국 황제에게도 ‘미친 새끼 지랄하고 자빠졌네.’라고 했던 전적이 있다. 엘프 이프리스 또한 데푸시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그런 둘이 대공을 형님으로 부르고 깍듯하게 모신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데푸시는 장차 콜다 족의 족장이 될 자였고, 이프리스는 샬 족의 족장이 될 엘프다.

사실 데푸시와 이프리스를 차원 수리공에 포함시킨 것은 비하트를 비롯한 세 공작의 의견이었다.

그들의 자식들과 드워프와 엘프의 차기 족장들이 친분을 쌓기를 바라며 함께 보냈던 것이다.

그런데 자식들이 아닌 다른 놈과 형님 동생 하는 사이가 됐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도 드워프나 엘프가 형님이 아닌 동생이 되었다고 했다.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부랴부랴 이곳으로 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난 비하트 에드모리 카반 헬모트 공작입니다.”

시선이 마주치자 비하트는 정중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펠톤 저놈이 공작을 닮은 모양입니다.”

상대방이 정중하게 나오는데 모질게 나갈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말 속에 잘 벼려진 칼이 들어 있는 것처럼 분위기는 싸늘했다.

“자식이 아빌 닮지 누굴 닮겠습니까?”

“어째 싸가지가 없다 했습니다, 공작. 서른다섯 살이나 처먹은 놈이 위아래도 없고, 경우도 없고, 세상이 지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는데… 공작의 자식이 아니었으면 진작 목을 쳐 버렸을 겁니다.”

비하트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욕을 먹을 줄은 생각지 못한 탓이었다.

하지만 김필도는 한술 더 떴다.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라고 했소이다, 공작. 자식새끼 교육을 잘못 시키면 욕은 부모가 먹는 게 당연하다고 배웠소이다.”

“그래도 대공의 아비인 아서 프리우스보다는 자식 교육을 잘 시켰다고 생각하오이다.”

비하트의 말투가 하오체로 바뀌었다.

“그 의견엔 나도 같은 의견이오. 서른다섯 살이나 처먹은 자식 놈의 똥구멍을 닦아 주는 부모는 많지 않으니까. 문제는 우리 아버지는 누군가가 당신을 욕하는 걸 절대 들을 수 없는 곳에 계신다는 거고, 공작은 들을 수 있다는 거 아니겠소.”

김필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비하트를 빤히 바라보며 반공대를 했다.

“지금 난 화가 나려고 하오, 대공.”

“공작도 나하고 같은 기분인가 보구려.”

“난 젊은 놈의 반말 때문에 부아가 치미는데, 대공은 왜 부아가 치미시오.”

“나는 대공이 되면 공작 놈 새끼들이 내게 반말을 하지 않을 줄 알았소.”

으드득!

비하트의 입에서 이 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싸늘한 눈으로 김필도를 노려보았다.

“아무튼 반가웠네, 공작.”

김필도는 손을 흔들고는 몸을 돌렸다.

‘개자식. 어디 김필도 앞에서 잔머리를 굴리려고.’

걸음을 옮기는 김필도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참!”

블랙칸 앞에서 선 김필도는 몸을 돌려 비하트를 보았다.

“혹시 날 암살하라고 시킨 놈이 공작이오?”

김필도는 다시 반공대를 했다.

‘개자식!’

비하트는 하마터면 벌떡 일어나 뛰쳐나갈 뻔했다.

하지만 그는 극한의 인내심을 발휘하여 참았다. 지금 싸움은 창검을 들고 하는 무투가 아니라 흥분하는 사람이 패하는 말싸움이다. 흥분한 모습을 보일 수가 없었다.

“나는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가 대공이 되는 것보다 내 영지의 산에 오크가 늘어나는 게 더 걱정인 사람이오.”

“내가 몬스터보다 못하다는 말이구려.”

“가진 거라고는 대공 작위 하나가 유일한데 당연한 거 아니겠소.”

“그럼 어떤 놈이라고 보시오?”

암살 지시를 한 자가 누구일 거냐는 질문이었다.

“그건 나도 모르겠소.”

비하트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내가 알아내는 수밖에 없겠군. 오픈(Open)!”

김필도는 아공간을 열어 전에 펠톤으로부터 받았던 마법 주머니와 리모스에서 얻은 하만티움 하나를 꺼내 펠톤의 이야크 발치로 던졌다.

마차 안에서 김필도를 지켜보던 비하트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김필도가 던진 마법 주머니는 그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채굴한 하만티움을 담아오라고 황제가 건넸던 마법 주머니였다. 문제는 그 마법 주머니가 아니라, 마법 주머니와 함께 떨어진 호박색 물체였다.

사람 머리 크기의 그것은 보석으로 사용되는 호박보다 더 아름다운 광채를 뿌려대고 있다. 저렇게 광채를 뿌리는 금속은 그가 알기론 한 가지밖에 없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만티움이다.

비하트는 시선을 들어 김필도를 보았다.

그때 김필도는 이야크 창을 꺼내 안장에 끼우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이야크 창은 조립하지 않은 상태였다.

“무슨 뜻이오?”

“원래는 황궁 앞 ‘승리의 광장’에서 임무를 성공리에 마쳤다는 보고를 하면서, 아주 폼 나게 건네줄 생각이었소.”

“그런데 수도까지 행진도 없고, 국민들의 열렬한 환영식도 없는데 굳이 임무를 완수했다며 마법 주머니를 내밀기 싫단 말이오?”

“그건 너무 초라할 것 같단 말이지. 아무튼 그건 공작이 전해 주도록 하시오. 저 누런 덩어리는 선물이오.”

김필도는 하만티움을 가리켰다.

“저건 뭐요?”

비하트는 호박색 물체를 바라보며 물었다.

“밑밥이오.”

“밑밥?”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알게 될 거요.”

“가져오너라.”

비하트는 펠톤을 보았다.

“알겠습니다.”

비하트에서 내린 펠톤은 마법 주머니와 하만티움을 가지고 마차에 올랐다.

“황궁에서 봅시다, 대공.”

“죽지 않으면 보게 되겠지.”

“출발하라!”

비하트는 기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곧 기사들은 자루를 가져와 동료들의 시체를 담았다. 그리고 바로 광장을 떠났다.

부산했던 광장은 금세 정적이 깔렸다.

휘이익!

어디선가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혼자 남은 김필도와 블랙칸의 몸을 할퀴고 지나갔다.

“아무리 그림자라고 해도 명색이 대공인데, 이건 좀 심하네.”

김필도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블랙칸을 몰고 자리를 옮겼다. 그가 멈춰 선 곳은 만남의 광장에서 20미터 남쪽에 있는 호수였다.

호수는 폭이 50미터 정도로 상당히 컸다.

그는 호수 바로 옆으로 자리를 잡고 아공간을 연 다음 물건을 꺼냈다.

천막, 좌식 테이블, 삼각대, 조리 도구, 음식을 담는 접시, 포크, 나이프, 래딕커 고기, 채소, 양념 등이 차례로 나왔다. 물론 카판과 카판을 내리는 도구도 나왔다.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낚싯대를 꺼내 놓았다.

그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풀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다시 아공간 안으로 고개를 집어넣은 그는 곡식을 추수할 때 사용하는 낫을 꺼냈다. 낫의 손잡이는 꽤 길었다.

빗자루로 마당을 쓰는 것처럼 낫을 좌우로 쓸었다. 무성한 풀들이 쓰러지자 편평한 바닥이 나타났다. 풀을 대충 치우고 천막을 쳤다. 문 대륙에서 쓰던 것을 언젠가 필요할 것 같아서 챙겨두었다.

천막 설치가 끝나자, 마른 가지를 주워와 불을 피우고 삼각대를 걸었다.

그는 느긋하게 휘파람을 불면서 음식 준비를 했다. 먼저 솥뚜껑을 열고 토치 불꽃 마법을 펼쳐 안쪽을 소독했다.

솥의 열기가 식기를 기다려 래딕커 고기와 마늘, 정향 등 향신료를 넣고 물을 채운 후 카판 열매 두 개를 던져 넣었다. 그리고 맥주를 한 컵 부었다. 수육을 만들 때 맥주를 넣으면 고기 특유의 잡내를 잡을 수 있다.

뚜껑을 닫고 손잡이를 쇠사슬에 건 다음 불 위로 올려 높이를 조절했다.

“아무래도 장작이 더 필요하겠네.”

문득 팔에 소름이 돋는 듯했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기온이 급격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아공간을 닫고 일어났다.

5분 후, 커다란 통나무를 구해 자리로 돌아왔다.

통나무를 내려놓은 후 닫았던 아공간을 열고 헬칸을 꺼냈다. 도끼가 있지만 작업 시간이 너무 걸린다.

검의 주인인 히데우스에게는 미안하지만 장작을 만드는 도구로는 헬칸이 최고였다.

김필도는 헬칸을 번쩍 들어 올려 내리찍었다.

스악!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어른 허리둘레 두께의 통나무가 한 번에 잘려 나갔다. 먼저 30센티미터 크기로 자른 다음 잘게 쪼개서 우물 정(井) 자로 쌓았다. 하룻밤을 세울 정도의 분량이 만들어지자 작업을 마치고 헬칸을 아공간으로 집어넣었다.

어느새 무쇠 솥은 쉭쉭! 소리를 내며 허연 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는 쇠사슬 한편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솥이 불꽃에서 멀어졌다. 삼각대를 이용하여 조리를 할 때 불의 세기를 조절하는 방법이었다.

다시 아공간을 열고 채소와 맥주를 꺼내 들고는 호수로 향했다. 호수 물에 손을 담그고 물의 속성 마법을 펼쳤다. 심연의 차가움 쿠라, 라는 외침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의 손을 중심으로 주위 1미터가량이 얼음으로 변했다. 얼음 한가운데 구멍을 파고 물을 부은 후 채소와 맥주를 집어넣었다.

대충 작업이 끝나자 아공간에서 건초를 꺼내 블랙칸 앞에 놓아 주었다. 그러고는 분리된 채로 꽂혀 있는 라콰를 조립하여 원래 자리에 꽂았다.

“발탄 제국에 온 걸 환영한다, 750!”

김필도는 블랙칸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프릉!

“물론 나도 좋지.”

김필도는 얼음물 속에 담가 두었던 맥주를 꺼내 뚜껑을 따면서 동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