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 김필도-78화 (78/225)

# 78

“와우!”

저도 모르게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동쪽 지평선 끝에서 짙푸른 덩어리 하나가 천천히 솟아오르고 있었다. 보석처럼 파란 광채를 뿌리며 떠오르는 그것은 1, 2월의 달인 블루 문이었다.

김필도는 멍한 얼굴로 블루 문을 바라보았다.

블루 문의 크기는 압도적일 만큼 컸다. 손을 뻗으면 잡힐 것 같다는 느낌마저 든다.

달이 쏟아내는 광채는 세상에 파란색 물감을 풀어 놓은 듯하다. 숲이 파랗고, 공기가 파랗고, 호수마저 푸르렀다.

“치어스!”

김필도는 달을 향해 맥주병을 들어 올렸다. 오직 하나, 맥주 맛은 변함없다.

달을 바라보며 맥주를 마시던 그는 채소를 건져 물기를 털고 먹기 좋은 크기로 뜯어 접시에 담아 모닥불 가로 돌아왔다.

채소 위에 겨자와 꿀을 섞은 소스를 뿌리고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리고 무쇠 솥을 내려 칼로 고기를 찔러보았다.

“퍼펙트!”

고기를 꺼내 한 김 빠지기를 기다렸다가 먹기 좋게 잘랐다. 기름기가 자르르 흐르는 수육이 완성되었다.

김필도는 수육 한 덩어리를 소금에 찍어 입으로 집어넣었다.

“역시!”

향신료와 맥주 탓인 듯 래딕커 특유의 냄새가 사라지고 깔끔한 맛이 느껴졌다. 육질 또한 상당히 부드러웠다.

“문제는 너무 많이 삶았다는 거지.”

늘 시아나와 함께 먹던 버릇 때문인 듯 아무 생각 없이 고기를 집어넣었는데 혼자 먹기에는 너무 많았다.

“맛이 괜찮은데 한잔하시겠소?”

김필도는 마치 혼잣말을 하듯 말했다.

“클클클! 젊어서 그런지 귀가 아주 밝구먼.”

키가 작은 노인이 이야크를 고삐를 잡고 호수 북편 갈대숲에서 걸어 나왔다.

노인 옆에는 로브를 걸친 소녀가 따르고 있었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김필도는 노인을 살폈다.

키는 1미터65센티미터가량이고, 흉터와 주름으로 뒤덮인 얼굴은 천년송의 나이테처럼 많은 사연을 담고 있는 듯하다. 원래 흑발이었을 머리는 백발이 무성하다. 어떤 감정도 담고 있지 않은 눈동자는 살인에 익숙한 검사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랜드 마스터라고 해도 다 같은 게 아니네.’

김필도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그가 만난 사람들 중 가장 강자는 톰벨이었다. 그런데 다가오는 노인 또한 톰벨에 못지않은 강자라는 느낌이 든다. 아니 더 강자가 확실하다.

톰벨은 처음 보는 순간 강자라는 느낌을 바로 받았다.

그런데 노인은 이야크 위에 검과 이야크 창이 걸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엔 아무런 느낌이 없다. 아니 존재 자체가 희미하다. 그건 곧 자신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을 자연과 합일시켰다는 의미다.

어느새 두 사람과의 거리는 5미터로 가까워져 있었다. 이번엔 노인 옆에 있는 소녀를 보았다.

키는 150센티미터쯤 되어 보이고 머리카락은 녹발에 금발이 간간이 섞여 있다. 계란형의 갸름한 얼굴에 눈동자는 녹색이고 눈썹도 녹색이다. 코는 적당하게 높고, 도톰한 입술이 도발적인 느낌을 주는, 특이한 느낌의 여자였다.

문득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어린애가 아니었네.”

김필도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깊이를 알 수 없는 동굴로 빨려들어 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 둥굴의 깊이는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깊은 무저갱이었다. 그런 깊은 눈동자를 가진 여자가 소녀일 리가 없을 터였다.

“난 베른이네.”

김필도 앞으로 다가온 노인은 자신을 소개했다.

“그리고…….”

“난 리시아예요.”

노인이 여자를 소개하려는 순간 먼저 여자가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리시아…….”

김필도는 고개를 갸웃했다.

보통 자신을 소개할 때 성을 빼는 건 이름만 말해도 나머지 성은 상대방이 짐작하겠지 하는 전제를 깔고 들어간다. 하지만 리시아란 이름은 기억 회로 속에 저장돼 있지 않았다.

“기억나지 않나 보죠?”

리시아는 김필도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우리 아는 사이요?”

김필도는 되물었다.

“리시아 히나시스란 이름도 모르세요?”

“리시아 히나시스?”

여전히 모를 말이다.

“당신의 약혼녀예요.”

“야, 약혼녀라고요?”

김필도는 멍한 얼굴로 녹색 눈동자의 소녀를 보았다.

제2장 약혼녀

아무리 기억 회로를 더듬고, 기억 저편에 방치해 둔 해묵은 것까지 꺼내 확인했지만 리시아 히나시스란 이름은 없었다.

이름뿐만이 아니었다.

약혼을 했다면 얼굴 정도는 기억하고 있을 텐데 만난 기억도 없다. 금발이 간간이 섞인 녹발에 초록색 눈동자를 지닌 특이한 소녀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기억이 안 나세요?”

“우리 만난 적 있어요?”

김필도는 열심히 머리를 굴려본다.

“아뇨.”

“그럼 오늘이 처음?”

“네.”

리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난 적도 없는데 약혼을 했다고요?”

“아버지 존함이 아서 프리우스 아니세요?”

“맞아요.”

“그럼 이것도 아시겠네요?”

리시아는 오른손을 김필도 앞으로 내밀었다.

“끄응!”

김필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리시아의 손목에 끼워져 있는 푸른색의 팔찌. 표면에 천둥의 신인 센카가 새겨져 있는 그것은 한때 프리우스 가문 최고의 무기이자 상징이었던 전투기갑 센카였다.

물론 진짜 센카는 가슴에 있다. 하지만 손목에 차고 있는 팔찌가 없으면 전투기갑은 착용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손목의 팔찌를 센카라고 부른다.

센카를 보는 순간 해묵은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언젠가 센카를 지닌 아이가 널 찾아올지도 모르겠다.

-센카면 우리 프리우스 가문의 가주가 착용하는 전투기갑 아닌가요?

-맞다.

-그럼 제 거잖아요.

-그거야 내가 죽었을 때 이야기지.

-어찌됐건 아빤 그걸 제게 물려주실 거잖아요.

-주면 지킬 자신은 있느냐?

-아뇨?

-그래서 내 며느리에게 줘 버렸다.

-아버지 며느리면 제 부인 아닌가요?

-꼭 부인이라고 할 수는 없구나.

-왜요?

-아직 태어나지 않았으니까. 어쩌면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르고.

-네?

-그 친구가 아직 총각이라서 말이야.

-그러니까 결혼도 하지 않은 친구에게 제 물건을 마음대로 줘 버리고, 자식을 낳으면 사내인지 여자인지 상관없이 며느리로 삼겠다고 하신 거예요?

-왜 간절하게 바라면 이루어진다고 하지 않더냐.

-그 친구 이름은 어떻게 되는데요?

-이름은 알아서 뭐 하려고?

-그분이 장가를 가지 않으면 센카를 찾아와야 하잖아요.

-줬으면 그걸로 잊어야지 다시 찾아오네 마네 하는 건 쪽팔린 짓이다, 루시안.

-그러니까 자식을 낳으면 며느리를 삼겠다고 한 건 센카를 주기 위한 핑계였군요.

-하하하! 똑똑하구나, 루시안. 맞다. 내가 장가도 안 간 그 친구에게 며느리 어쩌고 한 건 센카를 줘 버릴 핑계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 사실을 네게 말한 것은 센카를 찾을 생각을 하지 말라는 거고.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제가 센카에 욕심내면 얼마 살지 못할 걸로 보세요?

-센카뿐만 아니라 세상에 관심을 끊어야 한다. 알아도 모른 척하는 게 아니라 아예 알려고 하지를 말거라. 그냥 잊고 살아라. 아이작 가문과 프리우스 가문의 마지막 적통이란 사실도 잊고, 외조부께서 황제였다는 사실도 잊어라. 그래 줄 수 있겠느냐?

-평생 그렇게 살아야 하는 거예요?

-누구에게도 패하지 않을 자신이 있으면 네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

-잊을게요.

-그래. 그렇게 사는 거다, 루시안. 야망이니 하는 건 다 부질없는 짓이다. 그냥 살면 돼. 평민들처럼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고, 작은 것에 만족하는 그런 삶을 살아라.

-알았어요, 아빠.

여섯 살 때 아버지와 나눈 대화였고, 그게 유언이 됐다. 그날 아버지는 센카는 다른 사람을 줘 버렸으니까 잊으라고 하였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머릿속에서 깔끔하게 지웠다.

그런데 머릿속에서 완전하게 지웠던 센카가 20여 년 만에 나타난 것이다.

“식사하셨어요?”

김필도는 리시아를 보며 물었다.

“아뇨?”

리시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앉으세요.”

김필도는 테이블을 가운데로 밀어 놓고, 아공간을 열어 포크와 나이프를 꺼내 놓았다.

베른과 리시아는 테이블 앞으로 다가앉았다.

“잘 먹을게요.”

“잘 먹겠네.”

두 사람은 고기를 소금에 찍어 입으로 가져갔다.

김필도는 포크를 놓고 맥주를 마셨다. 센카를 보자 갑자기 입맛이 싹 달아나 버렸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호수로 갔다. 그러고는 아공간에서 맥주를 꺼내 얼음 구덩이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가 아공간에 넣어 가지고 다니는 맥주는 비긴 마을에서 얻는 것이었다.

“무슨 고기죠?”

리시아는 김필도를 살피며 물었다.

“래딕커라는 녀석이에요.”

“문 대륙에 서식하는 몬스터?”

“알아요?”

“그림으로만 봤어요. 그런데 고기 맛은 소고기보다 나은 것 같아요.”

“술에 재어 놓으면 고기가 연해지고, 삶을 때 향신료를 집어넣으면 잡내를 잡을 수 있거든요.”

“원래는 이렇게 맛있는 고기가 아닌데 요리를 잘해서 맛있다는 말인가요?”

“넵!”

김필도는 맥주 한 병을 꺼내 다시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뚜껑을 따서 잔에 따르고, 모닥불에 장작을 집어넣어 불을 키웠다.

“나도 한잔 주면 안 돼요?”

“지금 몇 살이죠?”

“실제 나이하고 루시안 공자를 만났을 때 말하라고 했던 나이하고 두 가지가 있는데 어떤 나이를 알고 싶으세요?”

“누가 그랬는데요?”

“아빠가요.”

“굳이 그럴 필요가 있어요?”

“전 친딸이 아니고 수양딸이거든요.”

“그럼 날 만났을 때 말하라고 하였던 나이를 먼저 듣죠.”

“열다섯 살이에요.”

“미성년자네요.”

“여자는 열다섯 살 때부터 성인 취급한다는 걸 모르세요?”

“그건 발탄 제국 법률이고 내 기준은 따로 있어요.”

“공자는 몇 살부터 어른으로 쳐 주는데요?”

“민증 나이로 스무 살요.”

“민증 나이가 뭐죠?”

“어른이라는 걸 증명하는 증명서예요. 아무튼 미성년자에게 술은 안 됩니다.”

“원래 나이를 말하면 술 줄 거예요?”

“원래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민증 나이가 적으면 술은 못 줍니다. 그게 내 법입니다.”

“흥! 주기 싫으니까, 공연히.”

리시아는 김필도를 쏘아보았다.

“그런데 그분은 결혼을 끝까지 못하셨나 보죠?”

김필도는 맥주를 마시며 물었다.

“누구요?”

“리시아 양아빠 말이에요. 우리 아버지 말씀이 센카를 건네주실 당시에 총각이었다고 했거든요.”

“아뇨, 결혼하셨어요.”

“그럼 리시아 양은?”

“엄마 혹이요.”

“어머니가 재혼?”

“네. 그런데 불행히도 두 분 사이에 자식이 없어서, 이걸 포함한 모든 유산을 내가 물려받게 된 거예요. 유산에는 아버지가 지니셨던 부채나 약속도 포함되거든요.”

리시아는 센카를 낀 팔을 들어 올렸다.

“그건 우리 아버지가 조건 없이 준 건데.”

김필도는 턱으로 팔찌를 가리켰다.

“그냥 줘요?”

“네.”

“센카는 수천 년 동안 프리우스 가문을 지켜 왔던 보물 아닌가요?”

“그걸 차고 있지 않으면 아무도 가주로 인정도 해 주지 않아요.”

“가솔들도?”

“그들은 내가 일곱 살 때 천둥의 성에 남아 있던 물건을 챙겨서 떠났어요. 센카를 상속받지 못한 나를 가주로 인정할 수 없다면서요.”

“그런데 그런 보물을 그냥 줘 버렸다는 거예요?”

“보물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자식 목숨만큼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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