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 김필도-79화 (79/225)

# 79

리시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뭔가에 골몰했다.

“때론 분수에 맞지 않은 보물은 화를 부르기도 하죠.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줄 수 있는 물건도 아니고. 고민을 하다가 리시아 양아버지를 선택하신 모양이에요. 조건 없이 준다고 하면 안 받을 것 같으니까, 혹시라도 결혼을 해서 딸을 낳으면 며느리로 달라는 조건을 걸었던 것 같고요.”

“우리 아버지는 아서 프리우스 그분의 사정을 알고 못이긴 척 받았다는 건가요?”

“그랬을 거예요.”

“드릴까요?”

“준 물건을 다시 달라고 하는 건 쪽팔린 짓이라고 하더군요.”

“누가요?”

“우리 아버지가요.”

“그건 공자 아버지 의견이잖아요.”

“나도 아버지 의견에 동의해요.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와 리시아 양아버지 사이에 오갔던 거래 같은 건 잊어버려도 돼요.”

“공자께서는 없었던 일로 하겠다는 건가요?”

“그 센카의 주인은 리시아 양입니다.”

김필도는 싱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호숫가로 가서 맥주를 가져왔다.

“한잔하시겠습니까?”

김필도는 베른을 향해 맥주병을 들어 올렸다.

“한잔 주면 고맙게 마시겠네.”

베른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그는 술을 마시고 싶다는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진작 말씀하시지.”

김필도는 잔에 술을 따라 베른 앞으로 놓았다.

“아가씨께 맥주를 안 주겠다고 하기에 나도 안 줄 걸로 알았네.”

“리시아 양은 미성년자잖습니까. 그런데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겁니까?”

“이틀 전부터 저곳에 있었네.”

베른은 그와 리시아가 나온 곳을 가리켰다.

“그럼 내가 대공이라는 것도 알겠네요?”

“대우받고 싶어서 그러는가?”

베른은 김필도를 빤히 바라보았다.

보통 대우를 받고 싶으면 목에 힘을 잔뜩 주고 퉁명스런 얼굴로 신분을 말한다. 그런데 김필도는 전혀 그런 표정이 아니었다.

“언제 잘릴지 모르는데 그 전에 대공의 직위를 실컷 만끽해야 할 것 같아요.”

“내가 보기엔 당분간 잘릴 일은 없을 것 같구먼.”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자네가 비하트 그자에게 선물로 준 게 하만티움 아닌가?”

“99퍼센트 이상의 순도를 자랑하는 극상품의 하만티움이죠.”

“마법 주머니 안에 있는 하만티움과 같은 건가?”

“같은 거라면 따로 줄 이유가 없겠죠.”

“차이가 많이 나겠구먼.”

“마법 주머니 안에 있는 하만티움은 순도가 50퍼센트 정도고 크기는 절반밖에 되지 않아요.”

“그래서 대공 작위가 유지될 거라고 한 거네.”

“비하트 공작과 황제는 내가 그 하만티움을 어디서 구했는지 궁금하게 여길 거란 말인가요?”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아울러 자네가 하만티움을 얻은 장소를 알아낼 때까지는 대공 작위를 그대로 유지시켜 줄 거네.”

“내가 지킬 수 있는 건 그것뿐만이 아니죠.”

“대공 작위 말고 다른 게 또 있단 말인가?”

“이것도 지킬 수 있죠.”

김필도는 집게손가락으로 자기 머리를 가볍게 쳤다.

“누가 자네를 없애려고 하는가?”

“이미 한 번 죽었다가 살아났네요.”

“정말인가?”

베른은 깜짝 놀랐다. 아무것도 없는 대공을 없애려고 하는 자들이 있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드래곤입니까?”

김필도는 베른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그럴 리가 있겠는가?”

베른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한때 잘나갔던 양반?”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대공에게 막말을 하잖소.”

“자네도 딱히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아닌가?”

“싫어하지 않는 게 아니라 노인들로부터 공대를 받는 거에는 아직은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거요. 하지만 금세 익숙해질 거요.”

김필도는 빙긋 웃었다.

“그때가 되면 나도 말을 올려야 하는 건가?”

“당연히 그래야 하지 않겠소. 그런데 여긴 어떻게 온 거요?”

“일부러 온 게 아니고 지나가던 길이었네.”

“그러면 우연히 지나가다가 우연히 차원 수리공이 돌아오는 걸 보게 됐다는 말이오?”

김필도는 베른과 리시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차원의 벽에서 한나절이나 떨어진 이곳 만남의 광장은 우연히 들를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다. 게다가 우연히 만난 사람이 프리우스 가문의 상징이었던 센카를 가지고 있다는 건 더욱 말이 되지 않는다.

“아가씨께서 차원의 벽을 구경하고 싶다고 해서 모시고 갔다가 돌아오던 중이었네.”

김필도는 리시아를 바라보았다.

“루나로 가는 길이었어요.”

“루나?”

루나는 황제가 바뀌기 전 발탄 제국의 수도였던 곳이다. 물론 김필도의 집도 거기에 있다.

“네.”

리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날 찾아가던 길은 아니겠죠?”

“그러길 바라세요?”

리시아는 김필도를 빤히 바라보았다.

“전혀요. 어렸을 때부터 혼자 살아서 그런지 난 내 생활에 누군가 끼어드는 걸 무지 싫어해요.”

김필도는 어깨를 으쓱했다.

“미안해서 어쩌죠?”

“네?”

김필도는 황당하다는 듯이 고개를 비스듬히 꺾었다.

그 말은 곧 그의 집으로 찾아가던 길이라는 의미였다.

“정말요?”

김필도는 확인차 물었다.

“네.”

리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끙! 어째 꿈자리가 뒤숭숭하더라니.”

김필도는 리시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리시아는 결코 예쁘다고 할 수 없다. 이카렌보다도 부족하고 시아나에 비하면 한참 모자란 얼굴이다.

15세 소녀라는데 성숙미가 물씬 풍기고, 눈동자는 상대의 마음속을 꿰뚫어볼 것처럼 맑고 깊다. 그러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원초적 욕망을 자극하는 색기가 넘친다. 청순함과 섹시함을 동시에 간직한 특이한 여자였다.

물론 그런 여자를 사귀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리시아가 찾아온 사람은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지 학사 사시미 김필도가 아니다. 게다가 학사 김필도에게는 너무 과분하다.

“제가 꿈에 나타날 정도로 무섭게 생겼나요?”

리시아는 김필도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물었다.

“그건 아니에요.”

“그런데 왜 그러죠?”

리시아의 눈엔 맞은편 남자는 뭔가 상당히 못마땅해하는 얼굴 같아 보였다.

“조금 전에 말한 것처럼 누군가와 엮이는 걸 싫어하거든요. 그리고 댁들의 정체도 아직은 알 수 없고요.”

“이것도 못 믿는다는 건가요?”

리시아는 센카를 들어 보였다.

“센카의 주인은 아버지이지 내가 아니거든요.”

“우리가 의도적으로 접근하는 것처럼 보이나요?”

“그렇지 않다고 말하기도 애매한 상황이잖아요.”

“자신이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만한 가치가 있다면 고민할 이유도 없겠죠. 리시아 양 말처럼 내겐 아무것도 없어요. 가진 재산도 없고, 믿고 따르는 부하도 없어요. 가진 거라고는 지금 당장 무너져도 하등 이상할 게 없는 낡은 성뿐이에요. 그런데 어느 날, 부족한 게 하나도 없어 보이는 여자가 불쑥 나타나서는 약혼자라고 말해요. 리시아 양 같으면 그 사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요?”

“힘들겠죠.”

“아무튼 이왕 왔으니까 쉬도록 하세요. 카판도 있으니까 생각나면 내려 마시고요.”

김필도는 자리에서 일어나 머나먼 숲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디 가는 거죠?”

“아무래도 댁들은 좋은 손님이 아닌 것 같네요.”

“그게 무슨 소리죠?”

“두 분이 오기 전엔 하늘이 맑았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김필도는 손끝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압도적인 크기를 자랑하던 블루 문은 사라지고,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곧 비라도 뿌릴 태세다.

“그럼 비를 피하러 가는 거예요?”

“비 오기 전에 볼일을 봐 둬야 할 것 같아서요.”

김필도는 휘적휘적 숲으로 걸어갔다.

“풋!”

리시아는 피식 웃었다. 그녀는 김필도가 놓고 간 잔에 맥주를 따라 입으로 가져갔다.

“어떻습니까?”

베른은 리시아를 보며 물었다.

“그에 대해 조사한 사람이 홀먼이었던가요?”

“예.”

“껍데기만 본 것 같네요.”

“아가씨께서는 어떻게 보셨습니까?”

“정확하게 어느 정도라고 말은 할 수 없지만 상당히 강자인 건 분명해요.”

“따라갈 겁니까?”

“어찌됐든 아빠와 그의 아버지는 약속을 했고, 나는 아빠의 모든 것을 상속받았어요.”

“아론 공께서 화를 많이 낼 겁니다.”

“난 약혼녀를 두고 바람을 피우는 남자를 용서해 줄 만큼 자비로운 여자가 아니에요.”

리시아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길었던 약혼 기간. 오래된 연인.

어쨌든 결혼식만 올리지 않았지 여느 부부와 다를 바가 없었다. 누가 됐든 원하면 언제든지 함께 밤을 보냈다. 그 전날 밤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함께했다. 함께 목욕을 하고 함께 술을 마셨다.

그는 영원히 사랑한다며 온갖 미사여구를 시인처럼 쏟아냈다.

그랬던 자가 다음 날 다른 여자와 밤을 보낸 것이다. 물론 다른 여자와 잠을 잘 수도 있다. 문제는 그런 사실이 없는 것처럼 속였다는 것이다. 다른 것은 다 용서해도 사람을 속이는 것만큼은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루시안 그자와 함께 간다는 건…….”

“난 성인이에요, 베른. 나는 약혼할 때 그에게 단 하나만을 요구했어요. 부인을 두 명 혹은 세 명을 맞아들여도 상관없으니까 속이지만 말라고 했죠. 그는 그렇게 하겠다고 맹세했고요. 약혼 서약을 어긴 사람은 내가 아니라 그예요.”

리시아는 잔을 단숨에 비웠다.

“그렇다고 해도 너무 극단적인 결정입니다, 아가씨.”

“아론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고 싶지 않아요.”

“알겠습니다, 아가씨.”

베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보다 베른이 보기엔 어때요?”

“루시안 그 친구 말입니까?”

“네.”

“끊고 맺는 게 확실하고, 작위를 적절하게 이용해 상대를 압박하는 영악함을 보이기도 하더군요.”

베른은 조금 전 보았던 광경을 떠올렸다.

상대가 제국 최고 권력자 중의 한 명인 헬모트 공작이라면 아무리 대공이라고 해도 대하는 게 쉽지 않다. 게다가 나이도 공작이 한참 많다. 그런데 그는 공작을 아랫사람 다루듯 하였다.

세상 물정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더니 마지막에는 순도 90퍼센트가 넘는 하만티움을 건네는 것으로 그때까지 오갔던 일을 무마시켜 버렸다.

헬모트 공작은 하만티움의 순도를 확인하는 순간 대공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을 잠시 묻어둘 것이다. 어쩌면 하만티움을 발견한 장소를 알아내기 위해 화해를 청할지도 모른다.

무모할 정도로 대담한 배짱과, 뛰어난 머리를 가진 자.

그가 바로 대공이었다.

“노련한 사람이란 뜻인가요?”

“다루기 어려운 자라는 뜻입니다.”

“그렇죠?”

리시아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김필도가 들어간 숲으로 시선을 던졌다. 숲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흥미로운 뭔가에 빠져 있는 아이처럼.

그때 김필도는 막 숲으로 들어서는 중이었다.

숲은 짙은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울창하게 쭉쭉 뻗은 나무가 하늘을 완전히 가려서인지도 모를 일이다.

눈에 보이는 거라고는 거무튀튀하게 우거진 나무와 숲을 관통하며 나 있는 길뿐이었다.

김필도는 감각을 끌어올렸다. 이윽고 어둠 속 주변 상황이 하나둘 머릿속으로 그려졌다.

그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실은 숲으로 들어온 것은 볼일 때문이 아니었다.

모두가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숲에서는 싸늘한 기운이 잔상처럼 남아 있었다. 그것은 밤이 오면서 기온이 뚝 떨어져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었다. 그 기운의 정체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죽이다 보면 정체를 알게 되겠지.”

김필도는 길 왼편으로 들어갔다.

우거진 나뭇잎 때문에 햇빛이 비쳐들지 못해서인 듯 바닥에는 풀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음지에서 자라는 키 작은 식물과, 이끼가 잔디처럼 덮여 있었다.

20여 미터 들어갔을 때 거대한 나무가 앞을 가로막았다. 나무 둥치는 수십 명이 에워싸도 모자랄 정도로 엄청나게 두꺼웠다. 마치 문 대륙에서 보았던 자이언트 트리 같았다.

그는 왼손 중지를 보았다. 오테르 인장은 어둠이 짙을수록 더 강한 광채를 뿌리곤 하는데 오늘 밤도 다르지 않았다. 마치 마신의 눈동자처럼 강한 광채를 쏟아내고 있다.

“이제 헬칸에게 부끄럽지 않게 됐으니까.”

김필도는 왼손에서 오테르의 인장을 뽑아 오른손 중지에 끼워 넣었다.

우웅!

그 순간 나직한 소성과 함께 오테르의 인장과 파라온에서 검은 안개가 흘러나왔다. 그 안개는 손등을 타고 서로를 향해 이동했다. 이윽고 오테르의 인장에서 나온 안개는 파라온으로 들어가고 파라온에서 흘러나온 검은 안개는 오테르의 인장으로 들어갔다.

웅웅웅! 웅웅! 웅웅웅!

오테르의 인장과 파라온은 어린아이처럼 칭얼댔다.

“너희들이 누군지 정체를 드러내야 할 거야.”

그가 마신의 팔찌 파라온의 비밀을 파악한 곳은 리모스였다. 히데우스가 떠난 후 그때까지 겪었던 상황을 종합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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