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
바람의 가문 가주들이 마신의 팔찌를 필사적으로 얻으려 했던 이유는 라칸 공국을 되찾기 위해서였다. 그건 곧 마신의 팔찌 파라온에는 라칸 공국을 되찾을 수 있는 힘이 숨겨져 있다는 뜻이다.
또 한 가지는 신성의 장소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고스트 킹은 이카렌을 없애려고 하였고, 결정적인 기회를 잡았다. 그런데 이카렌을 향해 검을 찔러 넣던 순간에, 마법처럼 사라졌다고 하였다.
그땐 경황이 없어 그 말을 생각 없이 넘겨 버렸다. 그러다가 며칠 후 차분하게 그때 상황을 되짚어보다가 어쩌면 마신의 팔찌 파라온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마신의 팔찌가 고스트 킹의 안식처라면 그 상황이 깔끔하게 설명된다. 즉 파라온의 팔찌를 차는 행동이 무덤에서 떠돌던 고스트 킹에게 내리는 귀환 명령이었던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꺼지듯 소멸될 리가 없을 터였다.
“고스트 킹이 사라진 곳은 이 안이었다.”
김필도는 마신의 팔찌 파라온을 보았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고스트 킹이 마신 파라온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러다가 히데우스로부터 마신 파라온에 대한 말을 듣고 비로소 팔찌가 간직한 비밀을 알 수 있었다. 신성의 장소를 지키고 있던 고스트 킹이 바로 히데우스가 말한 마신 파라온이었던 것이다.
더불어 마신 파라온은 팔찌의 주인이 됐다고 하여 깨울 수 있는 존재도 아니었다. 오테르 가문의 가주를 상징하는 오테르의 인장이 있어야만 불러낼 수 있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히데우스로부터 오테르의 인장을 받아 왼손에 끼울 때였다. 오테르의 인장과 마신의 팔찌 파라온이 일으킨 공명 현상.
그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하지만 히데우스에게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리고 히데우스가 떠난 후 반지를 오른손에 끼우고 소환 명령을 내렸다. 예상대로 고스트 킹은 팔찌 안에서 잠자고 있었다. 하지만 고스트 킹을 다시 돌려보냈다.
오테르 가문의 가장 위대한 전사였고, 마신의 직위까지 오른 존재를 오테르 가문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자신이 마음대로 부릴 수가 없었다. 아니 오테르의 반지와 헬칸을 물려 준 히데우스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최소한 히데우스의 검인 헬칸의 주인은 돼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때문에 알리토를 만나자 검술을 가르쳐 달라는 부탁을 하였고, 미친 듯이 익혔다.
“이제 난 그를 부릴 자격이 생겼습니다, 히데우스.”
김필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무 뒤편으로는 인기척이 감지되지만 주위엔 아무도 없다.
“오테르 인장과 마신의 팔찌 주인인 나 김필도가 명한다. 팔찌 속에 잠자는 파라온이여,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라!”
김필도는 소환 명령을 내렸다.
우우웅!
마신의 팔찌에서 나직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검은 안개가 흘러나왔다. 그 안개는 마치 헤를리온이 전투기갑으로 변할 때 흘러나오는 검은 안개와 비슷했다.
잠시 후 안개는 3미터 크기의 덩치로 변했다.
2미터 길이의 검을 들고, 크레디온을 걸친 모습의 그것은 신성의 장소를 수호하던 고스트 킹이었다.
“오랜만이다, 고스트 킹!”
김필도는 고스트 킹을 보며 말했다.
-오랜만이다, 권능의 주인!
그러자 머릿속으로 고스트 킹의 사념이 흘러들어 왔다. 놀랍게도 고스트 킹은 자아를 가진 존재였다.
하지만 그건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정령과는 달리 소환자의 마나를 소모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고스트 킹은 최고의 파트너였다.
-어쩐 일인가?
고스트 킹이 물었다.
“적!”
-이 숲에 있는 생명체를 말살시키면 되는 건가?
“마신이라 그런지 통이 크네.”
-가부만 말하라!
“짐승이나 몬스터는 두고, 인간만.”
-알았다, 권능의 주인. 나는 저곳으로 가겠다.
고스트 킹은 오른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야!”
김필도가 부르자 고스트 킹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한 번만 더 목에 힘주면… 디진다!”
김필도는 고스트 킹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
텅 빈 검은 눈동자가 김필도를 빤히 보았다.
눈싸움을 하듯 파란색 눈동자와 텅 빈 검은 눈동자가 중간에서 얽혔다.
-알았다, 권능의 주인.
고스트 킹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해.”
김필도는 나무를 돌아 나와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숲 입구에서 4백 미터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어둠에 익숙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시계는 10미터가 채 나오지 않는다. 검은 것은 어둠이고 어둠보다 더 짙은 것은 나무다. 그 외는 아무것도 구분할 수 없다.
쏴아아! 쏴아아! 쏴아아!
후두둑! 후두둑!
나무 위쪽에서 빗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더니 곧 나뭇잎 사이로 물이 떨어진다.
‘분위기 죽이네.’
김필도는 히죽 웃으며 감각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어둠 속에 많은 자들이 있다. 그런데 모습은 물론이고 기척을 찾아내는 것도 쉽지 않다.
김필도는 아공간에서 헬칸을 꺼냈다.
잠시 후 지름이 20미터가량 되는 공터 한가운데 선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곳은 나무가 벽처럼 둥글게 늘어서 자연적으로 형성된 장소였다.
김필도는 고개를 들었다.
마치 수직으로 뚫린 동굴처럼 작은 구멍이 보인다.
나뭇가지가 미치지 못해 생겨난 작은 공간이다. 그 구멍 사이로 손가락 두께의 비가 쏟아져 내렸다.
콰앙!
슈캉!
카카캉!
“크윽!”
“으윽!”
“아악!”
멀리서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고스트 킹이 먼저 시작한 모양이었다.
김필도는 헬칸을 바닥에 꽂았다. 그리고 설풍과 단도를 풀어 헬칸 옆에 도집째 꽂았다.
그리고 오른손을 심장 위에 댔다.
“클로스(Closed)!”
심장에서 검은 운무가 솟아나왔다. 그 운무는 위쪽과 아래쪽으로 흘러가더니 잠시 후 몸 곳곳에서 쇳소리가 들려왔다.
전투기갑을 걸친 모습이 되자 김필도는 설풍과 단도를 원래 위치에 차고 헬칸을 들었다.
“언제든지 말을 하면 돼! 이름과 신분, 소속을 말한 다음 날 없애라고 지시한 자를 밝히면 멈출 거야.”
헬칸을 비스듬히 늘어뜨렸다. 빗물이 헬칸의 표면을 타고 또르르 흘러내렸다.
휙! 휙휙! 휙!
나무 주변에서 은밀한 움직임이 일었다.
김필도는 시선을 들었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나무나 혹은 나무 옆 공간의 색이 조금씩 변하는 것으로 빠르게 움직이는 적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
묵직한 목소리가 나무 위쪽에서 들려왔다.
김필도는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눈으로 좇았다. 목소리의 주인은 10미터 높이에 있는 나뭇가지 사이에 있었다.
처음엔 잘 보이지 않았다. 의식을 집중하고 주위 환경을 하나씩 제거해 나가자 비로소 목소리의 주인이 보였다.
사내는 전투기갑을 걸치고 있었다. 커다란 나뭇가지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있는데 어둠은 물론이고 나무와도 완전하게 동화돼, 여간해서는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은밀했다. 문득 카멜레온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기능을 뭐라고 하지?”
김필도는 감각을 최대한 개방하며 물었다.
전투기갑을 걸친 사내의 동체는 나무와 허공 그리고 나뭇잎에 걸쳐 있는 상태다. 흑백 사진 속에서도 사물이 구분되는 것처럼 어둠 속에서도 허공과 나뭇가지와 이파리는 확연하게 구분할 수 있다.
그런데 사내의 전투기갑 또한 허공, 나뭇가지, 이파리, 세 가지 색을 띠고 있다. 자신의 몸을 주위 환경과 완전하게 동화시키는 기능.
놈들이 걸치고 있는 전투기갑에는 그런 기능이 포함돼 있었다. 문제는 저런 엄청난 놈들이 왜 노리느냐 하는 것이었다.
“섀도 기능이라고 한다.”
사내는 몸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그가 일어나자 전투기갑의 색이 빠르게 변했다. 아울러 주위에 안개처럼 살기가 깔렸다.
콰앙! 퍼억! 슈캉!
“큭!”
“커억!”
“크윽!”
“응?”
사내의 얼굴이 반사적으로 비명이 들려온 쪽으로 향했다.
비명은 조금 전에도 들었고,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기 위해 부하 한 명을 보냈다. 그런데 또다시 비명이 들려온다.
“너를 돕는 자가 누구냐?”
사내는 김필도를 바라보았다.
“나도 궁금한 게 많아, 친구. 이건 어떨까? 누가 됐든 패하는 놈은 모든 걸 털어놓는 거 말이야. 그러니까 모든 걸 털어놓고 깨끗하게 목이 잘려 죽는 거야.”
김필도는 헬칸을 들어 올려 수평으로 폈다. 쏟아지는 빗줄기가 검면을 무심하게 두들겼다.
“날 원망 마라,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 시작하라!”
사내는 차갑게 소리쳤다.
스윽!
그러자 곧바로 짙은 그림자들이 김필도를 향해 쏘아져갔다.
제3장 어둠의 전사 다르
“날을 잘못 잡았어.”
김필도는 활짝 폈던 오른팔을 어깨 앞까지 잡아당기고 왼손을 뻗어 헬칸 손잡이 아래쪽을 쥐었다. 그러고는 무게 조절기를 최대한으로 돌렸다. 그러자 헬칸의 무게가 배로 늘어나며 묵직해졌다.
스악!
바로 그때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김필도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맺힌다. 완벽하게 은신한 것 같지만 빗방울이 통과하지 못하는 몸통이 보이고, 검의 윤곽이 흐릿하게 눈에 잡힌다.
적의 검이 날아오는 곳은 왼편 목이다.
김필도는 헬칸을 왼편으로 이동하여 비스듬히 세웠다.
카앙!
검이 부딪치는 순간 손목에 힘을 풀었다. 그러자 검은 미끄러지듯 아래로 흘렀다.
“헛!”
갑자기 검이 쑥 빠져나가며 중심이 흐트러지자 공격했던 사내는 깜짝 놀라 신음을 흘렸다. 바로 그 순간 김필도는 헬칸의 손잡이를 사내의 얼굴로 쭉 뻗었다.
퍽!
사내의 안면에서 둔탁한 소성이 흘러나왔다.
갑작스런 충격에 사내는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하지만 이내 사내의 얼굴엔 조소가 어렸다. 중심이 흐트러져 물러나긴 했지만 몸은 아무런 충격도 받지 않았던 것이다.
즉 검 손잡이로 안면을 강타하는 건 의미 없는 공격이었다.
“그 정도로는… 헉!”
사내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막 검을 들어 올려 공격하려고 하는데 대검이 무서운 속도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건 나도 알아.”
김필도는 차갑게 말하며 헬칸을 강하게 내리찍었다.
콰앙!
무식하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광경이었다. 헬칸은 사내의 갑옷과 몸통을 동시에 잘라냈다.
아니 부쉈다.
“크악!”
폭포 같은 피가 사내의 몸에서 솟구쳐 올랐다.
김필도는 내리찍었던 헬칸을 오른편으로 이동시켜 비스듬히 내렸다.
차앙!
헬칸 아래쪽에서 날카로운 소성이 들려왔다.
“차앗!”
김필도는 손목을 강하게 꺾어 올렸다. 마족이나 천족을 상대하는 것도 아닌데 굳이 흘리는 기술을 사용할 이유가 없었다.
차앙!
적의 검이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김필도는 빈손으로 서 있는 사내의 머리를 향해 다시 헬칸을 찍었다.
퍼억!
둔탁한 소성과 함께 헬칸은 투구와 함께 사내의 머리를 박살냈다.
휘익! 차앙!
퍼억! 스악!
콰앙! 카카캉!
알리토로부터 배운 대검술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순간이다. 막고 흘리고 자르고, 막고 튕겨내고 부순다.
김필도가 움직이는 공간은 지름 3미터가 채 되지 않았다. 그 안에서 그는 상대의 검을 막아 내며 반격을 가했다.
일격필살.
두 번의 칼질은 없다. 늘 단 한 번의 칼질로 상대의 머리를 혹은 몸통을 잘라 낸다.
말없는 접전은 20분 이상 지속됐다. 김필도 주변에는 30여 구 이상의 시체가 쌓였다.
시체가 쌓여갈수록 검은 그림자들의 공격은 더욱 거칠어졌다. 하지만 결과는 같았다. 아니 오히려 더 많은 자들이 죽어나갔다.
“침착하라!”
나무 위에서 명령을 내리던 자가 낮게 소리쳤다. 그러자 김필도를 향해 달려들던 자들이 일제히 물러났다. 그들 또한 자신들이 성급했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다.
김필도는 헬칸을 얼굴 높이로 들어 올려 옆으로 눕혔다. 그런 다음 헬칸의 날이 지면으로 향하도록 손목을 틀었다. 비록 검면은 검은색이지만 워낙 반진반질 윤이 나 뒤쪽 상황을 살피는 거울 역할을 해 주었다.
어둠 속에 숨은 자들은 천천히 오른편으로 돌며 기회를 엿보고 있다.
‘총 20명. 아니 나무 위에 있는 놈까지 합치면 21명.’
뒤쪽 상황을 확인한 김필도는 검 끝의 방향을 오른편으로 바꿨다.
“다가오지 않으면 내가 가야겠지.”
‘광속의 바람 라콰(Laqwa)!’
파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