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
김필도의 신형이 전방으로 폭사됐다.
“헉!”
김필도와 마주하게 된 사내의 입에서 헛바람이 새어 나왔다. 사내는 급하게 검을 들어 올렸다.
창!
사내의 검은 너무나 간단하게 잘려 나갔다.
40킬로그램의 무게를 지닌 헬칸은 마나를 전혀 싣지 않아도 가공할 파괴력을 지닌 무기였다. 검을 잘라 낸 헬칸은 그대로 사내의 목을 스쳐 지나갔다.
슈캉!
전투기갑이 잘려 나가는 소리가 들려오고 머리 하나가 둥실 떠올랐다.
휘이익!
허공으로 떠오른 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지기도 전에 김필도는 세 번째 사내의 목을 잘라 내고 있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김필도는 알리토와 싸울 때, 몸무게 150킬로그램, 헬칸 40킬로그램, 모래주머니 60킬로그램, 총 250킬로그램이었고, 그 상태에서도 엄청난 속도로 움직였다.
그런데 지금은 모래주머니를 제거한 상태다. 게다가 신갑 헤를리온을 걸치고 있다.
알리토와 싸울 때보다 빠를 수밖에 없었다.
“컥!”
“크윽!”
김필도에게 당한 두 명의 비명이 울려 퍼지고 몸통과 머리가 분리된 자들이 쓰러질 때, 김필도는 네 번째 사내를 없애고 다섯 번째 그리고 여섯 번째 사내의 목을 잘라 내고 있었다.
마치 공터는 그가 만든 마법 공간 같았다.
때로는 공터를 가로지르고, 때로는 좌측 혹은 우측으로 움직이며 검은 그림자들의 머리를 분리하고 몸통을 부쉈다.
“이동하라!”
나무 위에 있던 사내가 보다 못해 소리를 내질렀다.
파앗! 파앗!
검은 그림자들은 빠르게 어둠 속으로 몸을 날렸다.
“큭!”
김필도의 입가에 조소가 어렸다.
“그럼 난 더 좋고.”
‘흐름의 광풍, 쿠라 라콰(Kura laqwa)!’
파앙!
김필도의 신형이 가공할 속도로 쏘아져 갔다.
흐름의 광풍, 쿠라 라콰는 장애물이 많은 지역에서 빠르게 나아가는 실전 마법 중의 하나다.
실전 마법은 특별히 정해진 주문이 없다. 한 가지 또는 두 가지 혹은 세 가지, 네 가지를 합쳐 새로운 마법을 만들어 낸다.
처음 펼칠 땐 어색하지만 두 번째부터는 익숙하게 펼칠 수 있다. 흐름의 광풍 마법을 펼치자 주변 사물이 빠르게 스치고 지나간다. 나무가 나타나면 오른편 혹은 왼편으로 피하고 바위가 가로막으면 뛰어넘는다.
물이 바위를 스쳐 지나가듯 바람이 숲을 빠져나가듯 자연스럽게 내달린다.
그리고.
슈캉!
“커억!”
치워야 할 장애물은 태풍처럼, 해일처럼 쓸어버린다.
퍼억! 콰앙! 스악!
“크악!”
“아악!”
“으악!”
숲에서는 쉬지 않고 비명이 흘러나왔다.
“말도 안 돼.”
사내는 멍한 얼굴로 부하들의 시체를 보았다.
상대는 단 두 명이다. 부하를 도륙하는 저자는 전투기갑을 걸치고 마족의 검처럼 보이는 무식하게 큰 대검을 들었다. 하지만 그것뿐이다.
부하들 또한 전투기갑을 걸쳤고, 무기를 들었다. 게다가 어둠의 전사 최고 비술이라 할 수 있는 섀도 기술까지 완벽한 경지에 이르렀다. 그런 다르가 1백 명이나 된다. 그런데 처참하게 깨지고 있다.
“커억!”
“크윽!”
“아악!”
“난…….”
사내는 공연히 나섰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원래 그의 목표는 김필도가 아니었다. 임무는 따로 있었다. 김필도를 없애려 했던 것은 방해가 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치적거리는 장애물을 치우려 했던 단순한 행동이 부하들을 전멸로 몰아넣어 버린 것이다.
사내는 우뚝 걸음을 멈췄다.
어쩌면 자신 또한 대공의 상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차피 상대가 되지 않을 거라면 쫓아가 싸우다가 개죽음을 당하느니, 수십 명의 다르를 가볍게 없애는 엄청난 실력자가 목표물과 함께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하는 게, 조직을 더 위하는 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난 겁이 나서 도망가는 게 절대 아니야. 합리화하는 게 아니라고.”
빠져나가기로 마음먹은 사내는 몸을 돌렸다.
“허억!”
하지만 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바로 앞에 족히 3미터는 돼 보이는 거대한 덩치가 서 있었다. 고스트 킹이었다.
사내는 바로 검을 들고 경계 자세를 취했다.
-의미 없다, 인간!
고스트 킹은 대검을 번쩍 들어 올려 내리찍었다. 사내는 황급히 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콰앙!
“커억!”
강력한 힘이 검을 타고 들어왔다.
쩌억!
그리고 검면에 금이 쩍쩍 갔다.
‘빌어먹을!’
아차 싶었다.
마족이나 천족과 싸울 때에는 받아치지 말고 피한 후 공격하라는 교육을 받았다. 그런데 아무 생각 없이 마족의 검을 막아 버리고 말았다. 금이 가는 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몰랐다.
휙!
자세를 채 잡기도 전에 대검이 다시 머리를 향해 떨어졌다. 사내는 갈등했다.
그에게 대검을 막을 수 있는 것은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금이 가 있는 검이고, 다른 하나는 왼팔이었다.
만일 검을 들어 올려 막았다가 부서져 버리면 머리까지 위험해진다. 반면에 왼팔로 막으면 잘려 나갈 가능성도 없진 않지만 금이 가 있는 검보다는 낫다. 하지만 검으로 공격이 가능하다.
‘왼팔을 버린다!’
결정과 동시에 사내는 왼팔을 구부려 머리 위로 들어 올리고 롱소드를 고스트 킹의 심장으로 찔러 넣었다.
치명적인 실수였다. 어쩌면 천족이나 마족과 싸운 경험이 없었기에 그랬는지도 몰랐다.
마나를 잔뜩 머금은 사내의 검은 마족의 심장에 미치지 못하고 허공을 찌르고 말았다. 마족의 키가 3미터고, 검의 길이가 2미터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롱소드를 찔러 넣은 결과였다.
실수의 대가는 처참했다.
퍼억!
“크윽!”
마족의 검을 막아 줄 줄 알았던 왼팔이 싹둑 잘려 나갔다. 그리고 대검은 팔을 잘라 낸 여세를 몰아 사내의 머리로 파고들었다.
“크아악!”
사내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고스트 킹의 검이 사내의 몸통을 장작처럼 쪼개 버린 것이다.
“커억!”
“크윽!”
“아아악!”
숲 깊숙한 곳에서 연이어 비명이 들려왔다.
고스트 킹은 숲을 바라보았다.
-신검 헬칸, 신갑 헤를리온, 철족의 마법으로 무장한 자가 인간이라니…….
고스트 킹은 고개를 흔들며 숲속으로 들어갔다. 그때 김필도 또한 싸움을 끝내고 나오는 중이었다.
“몇 명 잡았냐?”
그는 고스트 킹을 보며 물었다.
-45명 잡았다.
“그럼 95명 잡은 거네?”
-5명이 부족하구나.
“원래 1백 명이었어?”
-정확하진 않지만 내가 파악한 건 그렇다.
“그럼 놓친 게 맞네. 나도 그 정도로 파악했으니까.”
김필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장으로 보이는 자는 잡았다.
“그런데…….”
-왜 그러느냐?
“날 노리기엔 너무 강한 자들이란 생각 안 들어?”
-권능의 주인 너도 충분히 강하다.
“하지만 나를 아는 자들은 내가 강하다는 걸 몰라.”
-이곳에 있던 자들은 권능의 주인 널 노리고 온 게 아니란 말인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그럼?
“수장 시체는 어디 있지?”
-저쪽에 있다.
“그만 들어가 있어.”
김필도는 마신의 팔찌를 쥐고 마나를 끌어올리면서 귀환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고스트 킹은 검은 운무로 변해 마신의 팔찌 안으로 스며들어 갔다.
“왜 이리 늦죠?”
리시아는 베른을 보며 물었다.
김필도가 숲으로 들어간 지 1시간이 넘었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공연히 걱정이 됐다.
“저 숲에는 다르 1백 명이 은신해 있습니다.”
“저, 정말이에요?”
리시아는 깜짝 놀란 듯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어제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숲으로 가지 않고 기다렸던 거예요?”
“네.”
베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는…….”
“오히려 없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죠?”
“굳이 아론 그분을 자극하기 위한 거라면 실체가 없어도 상관없다는 겁니다. 천둥의 성 주인이 되어 있는 것만으로도 그분을 충분히…….”
슉!
베른은 말을 끝까지 할 수가 없었다.
거미줄처럼 가늘고 투명한 실이 그의 목을 친친 감아 돌고 있었다. 투명한 실 끝에는 가운뎃손가락 크기의 장식물이 달려 있는데, 그것은 거미였다. 아니 마계 몬스터의 한 종류인 운골리안트 모습이었다.
“베른!”
얼음장보다 더 차가운 목소리가 리시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가, 가주님!”
베른은 잔뜩 굳은 얼굴로 목을 감아 돈 실을 바라보았다. 투명했던 실이 조금씩 붉은색으로 변해가고 있다.
데스 와이어(Death Wire)라 불리는 그것은 지옥의 종족인 헨 족의 최강 무기였다. 붉게 변해 가는 데스 와이어를 바라보던 베른의 시선이 운골리안트로 향했다.
운골리안트마저 붉은색으로 변하게 되면 살아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제,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가주님!”
베른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데스 와이어가 목으로 파고들어 피가 흘러나왔지만 개의치 않았다. 지금은 어린 가주의 화를 삭이는 게 급선무였다. 가주가 화를 풀지 않으면 이곳에서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가 나오지 않으면 운골리안트가 피를 흘리게 될 거야, 베른.”
속삭이듯 낮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목소리를 들은 베른은 벼락을 맞은 것처럼 부르르 떨었다. 목소리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건 가주가 정말로 살심을 품었다는 뜻이었다.
“가, 가주님!”
베른은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하지만 리시아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그녀는 머나먼 숲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저벅! 저벅!
휘릭!
머나먼 숲 입구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자 베른의 목을 감아 돌았던 데스 와이어가 풀리더니 리시아의 허리로 감겼다.
‘후우!’
베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김필도는 두 사람 곁으로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둥그런 물체 하나가 덜렁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고스트 킹에게 죽은 사내였다.
“야영을 자주 해 본 모양이죠?”
김필도는 두 사람의 머리 위를 살피듯 보았다.
널따란 천이 활짝 펴진 채 비를 막아주고 있다. 천의 크기는 가로 4미터 세로 4미터 정사각형이다.
천을 허공에 고정시킨 물체는 창과 비슷한 폴 2개와 가느다란 줄이었다.
줄은 폴 하나에 두 개가 걸려 있는데, 한쪽은 폴 꼭대기의 천이 끼워진 부분에 걸려 있고, 다른 편은 90도 간격으로 벌어져 커다란 바위에 묶여 있다.
땅에 박아 넣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중심을 잡고 서 있는 것은 천과 밧줄 두 개가 서로 당기며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었다.
반대편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런 상태에서 기둥을 세우지 않은 네 모서리는 밧줄로만 처리를 했다. 밧줄의 한쪽 끝은 천 모서리에 있는 작은 구멍에 끼워 묶고, 반대편은 커다란 돌에 묶는다. 그런 다음 돌을 당기면 천이 팽팽하게 펴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자 기둥이 있는 중간 부분은 높고, 좌우측은 낮은 지붕 형태가 됐다. 비는 물론이고 바람도 막을 수 있는 구조였다.
“그건 뭐죠?”
리시아의 시선은 김필도 손에 가 있었다.
사람 머리라는 걸 모르고 묻는 게 아니었다. 왜 두 쪽으로 잘려 나간 머리를 들고 왔는지 그게 궁금할 따름이었다.
“나는 이런 엄청난 자들을 파견해서 없앨 정도로 강자가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숲에 있는 자들은 공자를 없애기 위해 온 자들이 아니라는 말인가요?”
“나를 모르는 자들은 내가 호신술 수준의 검술을 익힌 정도로 알고 있고, 조금 아는 자들, 즉 문 대륙으로 함께 갔던 자들은 어지간한 기사 몇 명 정도는 없앨 실력이 된다고 알고 있어요.”
“문 대륙에서의 활약이 소문나기엔 너무 이르다는 말인가요?”
“헬모트 공작도 그걸 시험해 보려고 기사 여섯 명을 희생시켰으니까요. 아무튼 나에 대한 소문이 나기엔 좀 이를 뿐 아니라 설사 소문이 났다고 해도 이런 녀석들을 보낸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아요.”
김필도는 손에 들고 있던 머리를 옆으로 던졌다.
“그자는 올랜도 미들헤임이란 자로 어둠의 상단 상단주 아들이에요.”
“어둠의 상단?”